'세계외교사'에 해당되는 글 2건

  1. 2016.01.26 중세와 근대 질서의 충돌 (3)
  2. 2015.12.23 세계외교사 연표

중세와 근대 질서의 충돌

(김용구, 세계외교사)


 

1 나폴레옹전쟁


 

1. 혁명 프랑스와 유럽

-1792년 전쟁

1789년 프랑스 혁명 -> 혁명 프랑스가 외교의 새로운 형식을 표방, 국제정치의 기존 규범을 변혁시키려고 하자 유럽 열강들과 충돌. 처음에 몇몇 분쟁들이 있었지만 각국의 사정으로 인하여 바로 무력충돌로 이어지지 못함. 루이 16세와 그 가족들이 해외로 도피하려다 발각돼 압송되는 사건이 발생하였고 이를 계기로 프랑스 혁명에 유럽 전체가 공동 대응해야 한다는 필니츠선언이 발표. 오스트리아와 프로이센은 179227일 프랑스에 대한 동맹을 체결하고 420일에는 프랑스가 오스트리아에 전쟁을 선포.

 

-1792년 전쟁의 원인에 대한 견해들

공화정과 군주제의 상반된 이데올로기의 전쟁으로 보는 견해 혁명 프랑스도 전통을 그대로 계승해서 오스트리아에 대한 전통적인 혐오 정책의 결과로 보는 견해 국가이성이 국제 관계의 지배적인 역할을 했다는 것을 입증한다는 견해 특정한 국가의 정책으로 말미암아 발발했다는 견해 지롱드 당에 전쟁의 책임을 돌리는 견해 열강들의 오산이 전쟁을 유발시켰다는 견해

 

2. 나폴레옹 전쟁(1)

-전쟁 명분의 논쟁-겐츠와 오트리브

오트리브 : 진정한 세력균형은 영토와 군사력의 균형이 아니라 해양통상의 균형. 하지만 영국이 해양을 독점해 유럽 국가체제를 파괴하는 근본적인 원인. 영국은 대륙균형과 해양균형을 유지시킬 수 있는 유일한 세력인 프랑스를 소멸시키려함. 따라서 대륙 국가들은 프랑스와 단결해 해양법을 개정 필요.

겐츠 : 세력균형을 영토적이고 군사적인 측면에서 분석했으며 그 파괴자는 혁명 프랑스라고 규정. 프랑스 혁명이 유럽의 국가 체제를 파괴한다는 버크의 견해에 동조. 동맹은 유럽 체제 안에서 개별 국가들의 이해에 따라 단결하는 것이고 연합은 유럽 전체의 이해에 의해 단결되는 것이라고 구별.

 

-1차 연합(1793~1797)

1792420일 프랑스가 오스트리아에 전쟁을 선포한 후에 벌어진 발미 회전은 혁명 프랑스의 최초의 승리이자 구체제 프랑스의 최후 승리. 프랑스는 군주제를 폐지하고 공화정을 선포. 영국은 대륙에서는 세력균형이 유지되도록 하고 자국은 자유로이 해외진출을 도모한다는 전통적인 정책이 위협을 받게 되자 영국을 중심으로 약 10여 개국의 연합을 결성. (오스트리아, 프로이센, 바덴, 뷔르템베르크, 바바리아, 포르투갈, 피에드몬트, 교황령, 나폴리 왕국, 러시아) 하지만 예상과 달리 프랑스가 대외 팽창의 길을 걷게 되자 연합은 와해.

 

 

-캄포 포르미오 조약(1797 1018)

프로이센은 폴란드 방면으로 진출한 러시아에 불안을 느껴 179545일 바젤조약을 통해 프랑스와 화해의 길. 러시아와 오스트리아도 연합에 남아있기보다는 제 3차 폴란드 분할처럼 다른 곳에서 보상을 얻고자 함. 프랑스는 전쟁에 더욱 박차를 가하였고 영국을 직접 공격할 수 없자 오스트리아의 영향권에 있던 이탈리아로 침공해 결국 오스트리아와 캄포 포르미오 조약을 체결해 전쟁상태를 종식. 이로써 제1차 연합은 완전히 해체.

 

-2차 연합(1798~1801)

17985월 나폴레옹이 이집트를 침공. 오트만 제국에 중대한 이해관계를 갖고 있던 러시아와 정면으로 충돌. 이에 영국과 러시아를 주축으로 오스트리아, 포르투갈, 오토만 제국이 참여한 연합을 구성. 영국의 피트 수상은 러시아 정부에 유럽 개편안을 제안하였고 이는 전쟁의 목적을 처음으로 명백히 밝힌 점에서 중요하며 훗날 빈 회의 결정의 큰 골격이 됨.

 

-루네빌 조약(180129)

러시아가 오스트리아의 군사 활동에 반발하고 군사적인 부담을 러시아만 떠맡고 있다고 판단하여 연합에서 이탈. 오스트리아 또한 호헨린덴 전투에서 패하고 프랑스와 180129일 루네빌 조약을 체결하여 연합에서 이탈. 조약 체결로 인해 사실상 신성로마제국은 붕괴.

 

-아미앵 조약(1802327)

프랑스와 전쟁을 수행하는 국가는 영국뿐. 나폴레옹이 포르투갈로 공격방향을 바꾸자 결국 영국도 화해를 모색. 1802327일 아미앵 조약 체결을 통해서 영국은 거의 모든 식민지를 프랑스에 양여. 양국의 유일한 화평조약이었으며 이를 통해 오랜만에 유럽은 평화 상태가 됨. 하지만 영국의 지나친 양보로 인하여 비판이 일어났으며 아미앵 조약은 일종의 휴전 조약에 불과했기에 무역에서 프랑스와 충돌하게 되었고 다시 전쟁 선포.

 

-3차 연합 전선(1805~1807)-영국과 러시아

180412월 나폴레옹은 황제가 됩니다. 이에 영국은 프랑스에 대한 연합을 다시 형성하게 되고 러시아 또한 영국과 동맹을 원함. 러시아와 이미 비밀 합의가 있던 오스트리아도 참여하게 됩니다. 연합군은 해전에서 영국 해군의 활약으로 승전했으나 대륙에서의 패배로 러시아군은 후퇴하였고 오스트리아는 프랑스에 휴전. 한편, 바젤 조약이후 중립을 지켜오던 프로이센이 하노버 문제로 18069월 프랑스에 전쟁을 선언하지만 예나와 아우에르슈타트 전투에서 프랑스군이 승리하여 베를린에 입성. 그리고 여기서 영국 봉쇄를 선언하는 대륙 체제를 알리는 베를린 포고를 발표. 이로써 제3차 연합도 와해.

 

3. 나폴레옹 전쟁(2)

-나폴레옹 제국

나폴레옹은 유럽 전역을 실질적으로 지배. 프로이센을 패배시킨 후에 계속 동진해 러시아와 대치. 여기서 러시아의 알렉산드르 1세와 프로이센의 프리드리히 빌헬름을 만나 180777일 해당국들에게 실로 굴욕적인 틸지트 조약 체결. 프랑스에 대해 많은 부분 양보. 프랑스는 대륙 체제에 포르투갈을 편입시키기 위해 침공을 단행하는데 영국이 프랑스에 대적해 반도 전쟁을 승리하며 프랑스의 무적 신화를 깨트립니다.

-1812년 프랑스-러시아 전쟁

18104월 나폴레옹과 오스트리아 황제의 딸이 결혼함으로써 러시아와 프랑스 관계가 악화되기 시작. 더욱 관계가 악화되어 양국의 동맹 관계가 깨지게 됨. 프랑스에게 오스트리아와 프로이센은 프랑스에게 최소한의 협력제공을 러시아에 비밀리에 약속. 프랑스는 18126월 러시아를 침공해 모스크바까지 점령했으나 이미 쓸모없는 도시가 되어있음. 추위와 코작 기병들의 공격으로 대패하여 파리에 돌아왔을 때, 60만을 헤아리던 나폴레옹 군의 숫자가 불과 8천 명 정도로 줄었음.

 

-4차 연합(18136~)

나폴레옹이 패배 후에 파리로 돌아오자 프로이센은 프랑스와 동맹관계 청산하고 러시아와 1813228칼리쉬 조약을 체결. 이 조약은 영국, 러시아, 프로이센, 오스트리아 4개 국가의 합의로 발전. 오스트리아는 명분상 아직 프랑스의 동맹국이었지만 연합국과 프랑스의 조정자 역할을 하게 되고 오스트리아의 메테르니히는 나폴레옹에게 평화 조건을 제시하고 연합국과 프랑스는 일단 휴전 상태에 들어감. 하지만 나폴레옹이 이 조건을 수락하지 않을 때는 전쟁을 선포하기로 연합국과 오스트리아는 합의.

 

-드레스덴 회의(1813626~30)

나폴레옹과 메테르니히가 역사적인 만남을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휴전기간 연장을 제외하고는 아무런 성과 없이 끝남. 평화 조건에 대한 나폴레옹의 회답이 없자 오스트리아는 결국 프랑스에 전쟁을 선포. 또한 전쟁 중에 외국인 부대들의 이탈이 시작 되었고 이는 나폴레옹군의 대패로 이어짐.

 

-쇼몽 조약(181431)

25일 샤티옹에서 열린 마지막 회의에서 나폴레옹에게 전쟁으로 얻은 모든 영토를 포기하라고 제의했지만 나폴레옹은 거절. 결국 연합국 대표들은 181439일 쇼몽 조약을 체결. 이는 4국 동맹의 모체가 되었으며 세력 균형론 자들이 주장하던 원칙들을 하나의 조약으로 합의한 최초의 문건. , 프랑스가 다시 침략행위를 하지 못하도록 예방하는 장치 구상했다는 점에서 일반적인 동맹 조약과는 다른 성격을 지님.

 

-폰텐느블로 협정(1814411)

연합군 파리에 입성하게 되었고 연합국들은 나폴레옹의 무조건 퇴위를 주장. 결국 나폴레옹은 엘바 섬으로 격리. 알렉산드르 1세의 낭만주의적 주장으로 협정의 내용이 관대.

 

-1차 파리 평화조약(1814530)

파리에 입성한 연합국들은 프랑스와 평화조약 체결, 이를 제1차 파리 평화조약이라고 함. 영국, 러시아, 오스트리아, 프로이센, 스웨덴, 스페인, 포르투갈, 프랑스 8개국이 형식상의 서명 국가였으며 조약은 정당한 세력의 분배로써 영구 평화이룩을 말함. 그리고 프랑스는 1792년의 국경선으로 돌아간다는 내용도 포함.


 

 

2절 빈 회의 



1.빈 회의의 구성과 기본원칙

18149월 빈에서는 세계역사상 그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대규모 회의가 열렸는데 이는 20여 년에 걸친 나폴레옹 전쟁을 마무리 짓는 평화회의. 유럽 국제사회에서 중세적인 요소들을 상당히 제거시킨 빈 회의는 유럽 국제정치 구조를 변화시킴.

 

-회의 참석자 범위 문제

빈 회의는 최종의정서를 채택할 때까지 한 번도 전체회의를 열어보지 못한 특이한 회의. 1차 파리 평화조약에서 정한 규정의 모호함에서 기인된 것으로 이해하기 힘든 대표들이 많이 참석하였기 때문.

-영국-러시아-오스트리아-프로이센-프랑스

 

-정치 위원회

1차 파리 평화조약 비밀조항에서 합의된 사항으로 비밀조항 제1조를 보면 프랑스가 포기한 영토의 처리와 유럽의 세력균형 체제 유지에 관한 모든 문제는 연합국인 4대 강국들이 합의한 원칙들에 입각해 장차 열릴 회의에서 결정. 국제정치의 강대국 중심의 성격이 국제법 규칙으로 명문화 됐으며 훗날 국제 연맹의 이사회나 국제연합의 안보리 구성 원칙을 예고. 하지만 프랑스 탈레이랑이 반론을 제기하고 전체회의에서 유럽의 문제들이 결정되어야한다는 의견이 4국 이외의 국가에서 지지를 받게 됨에 따라 파리 평화조약 8개국이 회의를 주도해야 한다는 명분을 세움. 그 후 빈 회의의 최대 현안인 색스니 문제로 4개국 간에 대립관계가 형성되었고 결국 프랑스를 포함한 5국 위원회를 결성하게 되고 최종의정서를 작성한 기초위원회도 5국 위원회가 구성.

 

-전문 위원회

10개의 전문위원회로 구성되었으며 전문위원회가 연구 검토한 자료들은 4국 위원회, 5국 위원회의 결정에 참고

 

-기본원칙

기본 원칙의 전제는 유럽의 국제정치 질서는 전쟁 이전의 현상유지( 1792년 이전의 정치질서)로 돌아가야 한다는 것. 세력균형 원칙과 정통주의라는 빈회의의 2대 기본원칙이 나옴. 현실적인 의미를 생각해 보았을 때 크게 두 가지로 나뉘는데 하나는 프랑스가 다시 강대국이 되어 유럽의 국제정치 질서를 파괴하지 못하도록 예방할 수 있는 장치를 어떻게 강구하느냐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나폴레옹에 의해 개편된 유럽의 국경선을 어떻게 다시 획정하느냐. 하지만 이런 정통주의 원칙이 독일 지역에서는 거의 적용되지 않음.

 

2. 빈 회의의 결정들

-폴란드와 색스니

빈 회의 최대의 현안은 폴란드와 색스니 문제였는데 색스니는 나폴레옹과 오랜 기간 연합했기에 보상을 위한 대상 지역으로 여겨져 왔음. 폴란드는 러시아, 오스트리아, 프로이센, 동유럽 3국의 관심사였습니다. 일련의 조약에서 자창 폴란드는 이들 세 국가에 분할되며 구체적인 것은 우호적인 합의에 따른다고 막연히 규정하여 열강들의 대립을 야기. 각국의 이해관계를 위해 대립이 진행되던 중 181513일 영국, 오스트리아, 프랑스는 3국 동맹을 결성하게 되었고 이렇게 되자 러시아와 프로이센은 후퇴. 결국은 러시아가 폴란드의 대부분 지역을 점유하고 크라코우와 그 인근 지역을 동유럽 3국이 감독하는 자유시로 만드는 것에 동의. 프로이센은 색스니의 2분의 1 지역점유에 만족.

-독일연방의 구성

이전 신성로마제국이었던 이 광활한 지역을 어떻게 조직하느냐하는 문제는 어려운 현안. 이 문제는 독일 내부의 문제이면서 유럽 전체의 문제. 내부에서 여러 이해관계가 겹치면서 이들 모두를 조화시키는 것이 어려움. 4대 강국이 빈에서 반복된 논쟁을 펼치면서 끝나지 않던 문제가 나폴레옹이 엘바 섬을 탈출하면서 급전직하로 해결. 181568일 합의된 독일 연방의 형태는 34개의 군주와 4개의 자유시로 구성된 느슨한 방어 동맹과 유사.

 

-네덜란드 왕국의 성립과 북부 유럽

프랑스 북부 지역에 강화된 네덜란드 국가를 건설해 프랑스의 팽창을 저지한다는 것은 영국의 기본 정책이었기에 현재 네덜란드지역과 벨기에 지역에 해당하는 지역을 통합. 소위 세력균형이라는 정치적 편의에 따른 통합결정은 오래가지 못하게 되고 벨기에는 독립운동 후 영세 중립이 결정.

 

-스위스와 이탈리아

열강들은 스위스의 영세 중립은 유럽 전체의 이익, 프랑스 봉쇄 수단에, 그리고 스위스의 전통적인 정책에도 합치 된다고 판단. 이에 파리 평화조약 서명 8개국은 스위스를 영세 중립국가로 승인하였고 나머지 국가들은 1차 세계대전 이후 베르사유조약 제435조에 가입함으로 인정. 9개의 정치 단위로 구성된 이탈리아는 오스트리아의 강력한 영향권 안에 있었기 때문에 이탈리아는 순전히 지리적으로만 존재했고 정치적인 의미에서는 존재하지 않았음. 오스트리아의 지배에 대해 통일 이탈리아라는 사상이 싹트고 나폴리 지역을 중심으로 통일 운동이 전개.

 

-외교관의 등급, 노예무역 그리고 그 밖의 문제들

외교관의 등급과 석차는 중세 이래 분쟁의 불씨가 되어왔는데 빈 회의에서 완전한 해결(대사, 전권공사, 대리공사)을 보았으며 엑스--샤펠 회의에서 변리공사를 두어 보완. 변리공사는 1961년 외교관계에 관한 빈 협정에서 이 등급을 삭제하게 됩니다. 19세기에 들어오면서 노예무역에 대한 인도주의적인 관점에서 영국이 앞장서서 반대를 주장했지만 프랑스, 스페인, 포르투갈의 반대로 인도와 보편적인 도덕성에 위배 된다는 원칙적인 선언에 만족.

 

-최종의정서(181569)

빈 회의 최종의정서는 121개 조항과 17개의 부속문서를 포함한 방대한 조약. 빈 회의가 소집된 이래 모든 국가들이 한자리에 처음 모인 날은 그 날이 처음. 회의가 예상보다 오래 걸렸으며 나폴레옹의 엘바섬 탈출로 완전한 전후 처리는 제 2차 파리 평화조약으로 연기.

 

3. 2차 파리 평화조약

-열강의 대응

나폴레옹이 엘바 섬을 탈출하였으나 대표들이 한자리에 모여 있었고 전투태세도 그대로 유지되고 있던 터라 전투의 재개가 신속히 결정되었으며 25일에는 쇼몽 조약으로 다시 돌아간다고 천명. 나폴레옹의 재등장으로 영국과 프랑스의 화해는 와해되고 러시아가 다시 유럽의 구세주로 행세. 하지만 1815715일 나폴레옹은 결국 투항하여 세인트헬레나로 압송되어 그곳에서 생을 마감.

 

-2차 파리 평화조약(18151120)

프랑스가 다시는 유럽의 평화를 위협하지 못하도록 강력한 예방 장치를 마련하자는 극단론이 대두. 4국 위원회의 토의는 프로이센 강경파와 영국-러시아의 온건 노선의 논쟁이었는데 이후 의견의 일치를 보고 제1차 파리 평화조약이 성립. 외교사에서 1790년과 1792년의 국경선이라는 용어가 이때부터 사용. 1818년 엑스--샤펠 회의에서 모든 보장 점령군 철수가 결정. , 패전국에게 배상금을 부과하고 그 약속 이행과 패전국의 치안을 위해 일정 지역을 전승국들이 보장 점령한 것은 이 조약이 처음이라는 점.

 

-4국 동맹(18151120)

2차 파리 평화조약과 함께 같은 날에 4국은 동맹과 우호조약 체결. 프랑스가 침략을 기도하거나 나폴레옹 가문이 등장하는 경우 4국의 원조 의무 발생을 언급한 것이나 정기회의 개최는 국제 사회의 조직화를 도모한 최초의 예.

 

4. 빈 회의 결정의 의의

-민족주의 문제

군주의 이익을 위해 주민의 요구가 무시되었고 약소국들의 권익이 강대국의 정치적 편의에 따라 무시됐다는 견해와 반대로 그 어떠한 전후 처리보다 우수했다는 견해가 있습니다. 프랑스 혁명이나 나폴레옹 전쟁을 통해 유럽 전역에는 법 앞에는 평등, 봉건적 잔존의 철폐의 신념이 전파되어 빈 회의는 혁명을 잉태.

 

-영국과 러시아(빈 회의 이후 각국 상황)

영국은 유럽 대륙에서는 열강의 상호 균형을 유지시키면서 자국은 세계로 나아간다는 것이 기본 구상이었고 빈 회의의 결정은 이를 잘 반영. 러시아 또한 폴란드의 거의 전역을 장악해 중부 유럽을 석권할 형태를 이루었으며 이런 위협은 제1차 세계대전까지 지속.

-프랑스 : 1790년의 국경으로 돌아가게 되었고 수치스런 빈 조약의 수정을 요구하는 현상 타파의 국가로 등장

-오스트리아와 프로이센

빈 회의의 결정은 남부 독일에 대한 프로이센의 요구를 수용하지 않았기에 프로이센도 현상 타파 국가가 되었고 오스트리아는 명분상 최강대국의 하나였지만 너무나 광활한 지역을 가져 취약했으며 너무나 다양한 인종으로 허약.

-결정들의 효력

예를 들어 프랑스의 북부 국경과 스위스의 영세 중립, 외교 석차에 관한 규정은 오늘날까지 효력.

 

-현실과 이상

빈 회의는 열강의 정치적 이익을 조정하는 현실 정치의 측면과 전쟁의 재발을 방지하려는 미래지향적인 측면을 가짐. 열강의 정기적인 회의를 통해 국제 분쟁의 해결을 도모했다는 점에서 국제 사회의 조직화에 대한 선구적인 역할을 했다고 볼 수 있음.


 

 

3절 신성동맹


 

1. 신성동맹의 형성

 

러시아와 새로운 국제정치질서의 모색

빈회의 당시 프로이센, 오스트리아, 러시아 신성동맹에 합의(18159)

신성동맹의 기본구상은 유럽공법을 기독교 원칙에 따라 재건, 모든 종파의 통합으로 국제평화 이룩함 (러시아의 사상과 입장대변 유럽사회의 문제화)

러시아는 당시 유럽의 평화를 찾아준 구세주로 간주(절대적 발언권) 전쟁 후 정치 질서 방향 제시로 유럽인들은 치욕이라 생각

신성동맹의 형성과정이 알렉산드르 1세의 개인성품과 관련, 처리과정이 매우 슬라브적

 

알렉산드르와 기독교

18077월 틸지트 조약으로 러시아 프랑스의 대륙봉쇄체제에 편입

18126월 프랑스의 러시아 진격, 모스크바 함락

일련의 사건을 거치게 되면서 기독교에 심취하게 됨

러시아 성서회의 조직, 알렉산드르, 슈틸링, 스투르자 3인기도회 조직

당시 유럽전역에 기독교 부흥에 관한 과격한 이론의 횡행 - 생 마르텡, 하르덴베르크 백작, 바아더, 크뤼테너 부인

 

바아더

1815년 팸플릿 발표, 문서의 초고 러시아 오스트리아 프로이센 국왕에게 보냄

영혼의 동맹이 없이는 국가 사이의 동맹이 있을 수 없고 아직 진정한 기독교 국가는 이 세상에 존재해 본적은 없지만 이제야 비로소 종교, 사랑, 자유의 원칙들이 정치의 영역에 적용된 시기가 됐다.”알렉산드르에게 영향

알렉산드르는 성서의 가르침에 따라 실천으로 옮김

 

크뤼데너 부인

신성동맹에 중요한 역할을 함

골리친과 스투르자를 통해 알렉산드르와 만남(181564) 알렉산드르 감동

이후 정기적으로 만나면서 종교에 대하여 토론 이 기간에 신성동맹의 초안이 작성

이 둘의 대화는 교회의 재건, 기독교정신에서의 인류구원, 프랑스의 구원에 초점

알렉산드르는 1815911일 러시아 군대의 사열이후 인류구원이 사명이라 여김

알렉산드르의 정치적, 종교적인 고민, 프랑스 구원 생각 끝에 나온 것이 신성동맹

 

2.신성동맹의 내용

 

초안

알렉산드르 황제의 초안은 918크뤼데너 부인이 결정적 역할을 함

오스트리아 황제에게 1815919일 초안 전달하였으나 프로이센 국왕과 오스트리아 프란시스 황제 탐탁치 않아함

메테르니히 - “종교의 외투 밑에 있는 박애의 열망

메테르니히와 프란시스, 알렉산드르의 수정안으로 25일 동의 26일 서명

 

내용

신성동맹 조약은 전문과 3개의 조항으로 구성

전문

유럽은 기독교의 가르침에 따라 지배되어야 한다고 강조

지난 3년을 특징지었던 대사건들의 결과로, 특히 신의 섭리에만 신념과 희망을 둔 국가들에게 내려진 축복의 결과로, 열강들이 그 상호관계에 있어서(a과거에 채택된 방향은 절대적으로 변경되어야하며) 채택되어야 할 방향은(b과거에 채택된) 우리들 구세주의 성스러운 종교가 가르치는 숭고한 진리에 입각할 필요가 있다고(c) 깊은 확신을 얻게 되었다. 이 문서는 온 세상 앞에 자국의 운영에 있어서나 다른 정부의 정치관계에 있어서나 신성한 종교의 가르침, 정의의 가르침, 사랑과 평화의 가르침 - 이들 가르침은 인간의 제도를 공고히 하고 그 불완전한 것을 교정하는 유일한 수단으로서 오로지 사생활에만 적용되는 것이(d 오늘날 사람들이 생각한 것 같이) 결코 아니라 반대로 군주들의 결의와 행동에 직접 영향을 미쳐야 하는데 - (e 장차) 그들의 유일한 지침으로 삼는다는 확고한 신념을 알리는 것 이외에는 아무런 목적이 벗음을 엄숙히 선언하면서 세 군주들은 다음의 조항에 합의한다. ”

본문

모든 인간은 서로 형제라고 가르친 성경 말씀에 따라서 세 군주들은(a 세 체약국의 신민들은) 진실하고 끊을 수 없는 우애의 결속으로 단결되어있고 세 군주들은 서로가 같은 나라의 사람들이라고 간주함으로써 어떤 경우나 또 어디에서나 서로 원조와 지원을 보내주면 자신들은 자국의 신민과 군대에 대하여 가장(家長)으로 자처하여 세 군주들이 종교, 평화 그리고 정의를 보호하려고 하는 그런 박애의 정신으로 이들 신민과 군대를(b 같은 군대의 일부분으로 서로 간주될 각자 군대) 지도한다

 

2: 세 나라는 한 가족의 분파로서 구세주가 가르치는 원칙과 의무를 성실히 이행해야 한다.

3: 열강의 가입을 권유

 

3.신성동맹의 발표와 평가

 

열강의 가입

1815926일 세 군주들은 신성동맹 조약에 서명하고 열강의 가입을 요청

-영국

카슬레이의 보고서 : “숭고한 신비주의와 난센스에 불과

106일 알렉산드르에게 거절

-프랑스

알렉산드르가 다른 두 군주와 상의도 없이 루이18세에게 요청

1119일자 서한으로 가입 수락

-스위스

크뤼데너 부인의 아들 폴의 노력으로 스위스도 동참

-미국

1816년 알렉산드르는 미국에게도 가입요청

1820년 미국 국무장관 애덤스는 1783년 이후 유럽체제에는 관여하지 않는 것이 기본정책이라고 가입 거절

-영국, 터키, 법왕청을 제외하고 유럽 주요 국가들이 모두 가입

-()터키정책? 신성 동맹은 비기독교인에게 어떠한 적개심도 함축하지 않고 있다.

 

발표

세 군주는 적당한 시기라고 동의하는 시점에 가서 발표하기로 일단 합의

알렉산드르: 1815년 성탄절에 신성 동맹의 전문 발표

181622일자 프랑크프루트 신문,26일자세계신보에 신성동맹의 내용 발표

1816115일자 오스트리아 관찰자: 메테르니히 신성 동맹에 관한 글

 

평가

카슬레이: 숭고한 신비주의와 넌센스 - 1815928일자 리버풀에 보낸 보고서

메테르니히: 공허하고 요란한 유물 - 그의 회고록

“19세기 외교문서집 속에 괴이한 유물로 남을 것

1820년 트로파우 회의: 혁명은 신성동맹의 결과라 여겨 강한 비판

19세기 자유주의: 신성동맹은 인민을 억압하기위한 군주들의 동맹

아노토: 일종의 제국주의 적이고 신비스런 국가들의 연합으로 열강의 프랑스에 대한 동맹

말레: 신민에 대항하는 군주들의 상호 부조사회

긍정적인 인식: 영국의 필립스, 스위스의 트라즈

국제연합의 탄생이후 부르캥의 연구에서 국제기구의 선례로 각광

센크: 평화와 곤용에 입각한 국제질서를 세우려는 순수한 의도

베르티에: 반동적인 것은 타국의 내정간섭을 규정한 4국동맹

레이: 신성동맹을 알렉산드르의 순수한 동기에서 출발

신성동맹은 러시아의 팽창 정책의 한 표현

 


4절 유럽 협조 체제


 

1. 전후처리 - 엑스--샤펠 회의

 

용어의 문제

빈회의 이후 회의 외교 congress diplomacy’,'회의 체제 congress system' 또는 유럽협조concert of Europe’

diplomacy가 등장

congress VS conference

reunion: conference와 같은 규모지만 합의에 도달하지 못하는 모임

1830년대부터 유럽협조라는 용어의 등장 1856년 파리조약의 조문에 사용된 후 1870년대에 들어서 유럽에서 크게 유행

 

4국 동맹조약 제6조의 내용과 목적

181511204국 동맹 조약 제 6조의 규정 - 국제법적 제도화

국제사회의 조직화를 위한 첫 시도

국제정치의 강대국 중심을 명확히 함

 

회의 외교의 목적

프랑스에 독재자 출현 방지, 혁명 방지

1814~1815년의 국경선유지

1815년 당시 근본 국제정치 질서 유지

 

엑스--샤펠 회의의 구성문제

프랑스 주둔 연합군의 점령기간 만기로 4국의 문제토의 필요성 대두(1818.11)

9월초 4국 동맹 6조에 의한 정기회의 처음으로 개최

러시아: 프랑스와 스페인의 참가 주장, ‘일반 동맹에 프랑스 참여시키되 기존조약을 엄격히 준수해야함

프랑스도 4국 동맹을 와해시키기 위해서 러시아와 협력 “5국 동맹 체제주장

알렉산드르는 스페인을 통해 남미지역에 진출하려함, 프랑스도 스페인 정치 불안을 빌미로 내정간섭을 하려함

러시아와 프랑스 정책을 영국, 오스트리아는 용납하지 않음 관철 되지 못함

 

엑스--샤펠 회의(18189~11)

프랑스의 리슐리외는 프랑스 선거이전에 외국군의 철수와 4국과 동등한 위치를 획득하는 것이 급선무라 판단 카슬레이에게 영국의 동의를 구했으나 거부

알렉산드르 1세에게 다시 동의를 구했으나 원하는 대답을 듣지 못함

프랑스의 혁명위험성의 상기로 점령군 철수문제를 먼저타결(1818.10.9): 철군기한은 늦어도 18181130일까지이며, 18151120일 제 2차 파리 평화조약 제4조의 배상 총 액을 모두 26500만 프랑으로 확정

철군문제 해결 이후 러시아 유럽체제의 변혁 요구

 

카포 디스트리아 비밀각서

일반 동맹- 엑스--샤펠 회의중 파문을 일으킴

“1814~1815년의 조약들로 이루어진 유럽체제는 물질적인 기초와 정신적인 기초에 근거를 두고 있다. 물질적인 기초란 연합국의 프랑스 점령인데 이 기초는 없어지게 되어 정신적인 기초(4국 동맹 조약, 신성동맹 조약)를 더욱 강화해야 한다는 것이다.”

러시아의 선언채택 주장과 스페인, 미국 참가시키려는 움직임은 영국, 오스트리아, 프로이센의 반대로 무산

러시아의 일반 동맹안 의견 조정, 프랑스 강대국 대열에 참여 결정

 

엑스--샤펠 의정서(1818.11.15)의 내용과 의의

전문, 본문5개 항목 그리고 부속문서인 5국 정부의 선언으로 구성

5국은 기독교의 우애로 단결에서 이탈하지 않는다.

평화유지에 목적이 있으며, 종교적 존중에 근거함

합법국가로 회복된 프랑스는 현 체제의 유지와 강화에 동의

회의가 필요할 시 외교통로를 통해 결정

의정서의 결정사항은 모든 국가들에 공표

‘5국 정부의 선언이라는 특수문건으로 엑스--샤펠 회의의 결과를 세상에 알림

국제법과 열강의 독립을 언급한 점에서 영국의 입장을 반영한다고 볼 수 있으나 그 선언이 신을 찾고 있다는 점에서 볼 때 신성동맹을 강화 한다고 할 수 있다.

이 회의로 나폴레옹 전쟁의 전후처리는 끝나게 되었고 프랑스는 강대국의 지위를 회복하게 되었다.

 

2.회의외교

 

빈 체제 반대 움직임과 열강의 탄압

러시아, 오스트리아는 혁명의 움직임은 존립의 문제로 직결 그러나 영국은 방관자적 태도를 취함

빈 회의 체제에 대한 도전은 엑스--샤펠회의를 거치면서 유럽각지에서 시작됨

메테르니히의 탄압: 영국의 무관심 때문에 가능 소요를 특정국가의 단독적인 간섭이 아니라 유럽협조체제의 이름으로 공동으로 간섭할 것을 주장

스페인의 반란: 알렉산드르 1세 격분, 혁명이 유럽전역으로 퍼지기전에 스페인 국왕 후원을 역설

영국의 대응: 카슬레이는 불간섭을 원칙으로 하는 문서를 작성하여 4국에 통보

이후 유럽협조체제 간섭이냐 불간섭의 기로

 

트로파우 회의(1820.10~12)와 라이바흐 회의(1821.1~5)

영국은 오스트리아가 이탈리아에 간섭할 수 있는 국제법상의 원리가 있다고 양해

프랑스와 러시아의 국제회의 소집 메테르니히는 영국과 러시아의 타협안 마련 타결

트로파우와 라이바흐 회의는 메테르니히의 승리로 끝남

18201119일 세 군주들은 예비 의정서에 합의 : 메테르니히의 정치적인 입장과 알렉산드르의 구상을 그대로 반영

이후 3국은 해외공관에 서한 발송

영국: 영국은 합의의 당사자가 될 수 없으며, 예비 의정서라 하는 것은 국제법 위반이라 못 박음

라이바흐 회의는 트로파우 회의의 연장

512일 공동선언에서 트로파우 회의의 결정을 다시 한 번 확인하고 나폴리 진압을 공포

두 차례의 회의를 통해 유럽 협조 체제의 성격이 변화됨

영국은 공식적으로는 반대 입장이나 배후에서 오스트리아 지지

 

베로나 회의(1822.10~11)

유럽협조체제를 좁은 의미로 해석할 때 그 시기의 마지막 회의

이탈리아 토의 문제를 위해 소집되었으나 카슬레이의 거절로 메테르니히는 당시 현안문제로 등장한 그리스 문제를 토의하는 빈 주재 열강 대사회의 개최하고 카슬레이를 초청

그러나 카슬레이의 자살로 유럽협조체제 자체에 문제 발생

후임 캐닝의 훈령은 영국은 어떠한 경우라도 스페인 문제의 당사자가 되는 것을 금지

그리스 문제와 스페인 문제로 토의, 화의에선 서로 밀접하게 연관: 러시아의 동방진출 저지를 위해

그리스 독립문제

메테르니히의 활약으로 러시아의 공동 간섭안이나 프랑스의 단독개입주장도 저지됨

혁명원칙을 단호히 반대하며 그리스 혁명을 비판하고 스페인으로부터 공관을 철수 한다는 결론

 

프랑스군의 스페인 진주

프랑스 정부는 국내의 불만세력을 무마시키기 위하여 스페인 간섭이 필요했고 또 프랑스의 권위를 높인다 판단 따라서 베로나회의 이전부터 프랑스의 무기 공급과 감시군의 파견

단지, 화의 중에는 영국의 반대와 프랑스 내부의 불일치로 단독개입이 허용되지 않음

1823년 샤토브리앙이 외상이 되면서 프랑스 영광 되찾기 위해 노력하였고, 영국을 견제하고 러시아와의 접근을 추진하면서 1월말 프랑스는 스페인에 최후통첩을 보내고 스페인에 진주

프랑스의 단독 개입 움직임에 영국의 캐닝은 저지하기 위해 노력했으나 허사였음

따라서 1823년 파리주재 영국대사에게 세 가지 조건을 프랑스가 동의하면 영국은 스페인문제를 중립을 지키겠다고 타협

트로파우 회의를 계기로 유럽협조체제의 와해 조짐

 

3. 유럽협조체제와 미국-먼로주의

 

배경

1823123일 미국대통령 먼로의 연두교서의 내용

18219월초 러시아 황제의 칙령

프랑스가 스페인의 아메리카 구 식민지에 영향력을 행사하려는 움직임

프랑스의 움직임에 대해 영국의 캐닝은 미국과 대처를 구상했으나 미국의 전제조건을 수용할 수 없어 실패, 이후 프랑스와 직접 교섭 - 장차 스페인의 구식민지에 어떤 영향도 행사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받아냄

미국의 먼로선언으로 유럽협조체제는 붕괴위기에 직면

 

내용

아메리카 대륙은 유럽열강의 식민대상이 될 수 없다

아메리카와 유럽의 정치제도는 상이하며, 유럽 국가에 의한 아메리카 대륙간섭은 비우호적인 것이다.

미국은 유럽열강의 국내문제에 전혀 관여하지 않겠다.

-주요 내용은 비식민과 불간섭 원칙

 

의의

19세기 중반에 이르러 먼로주의라고 불리면서 미국외교정책의 기본적인 명분으로 등장

당초 먼로주의는 아메리카 대륙은 유럽팽창의 대상이 될 수 없다는 소극적인 내용

19세기 중엽이후 팽창주의 적 명분으로 변모 이후 일종의 종교적인 신념으로 자리 잡게 됨

20세기에 들어서면서 미국에 적용되지 못함

특정시기의 미국국익을 정당화해주는 미국외교정책의 이데올로기

Posted by Economist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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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6.01.27 10:47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비밀댓글입니다

  2. 1466248807 2016.06.18 20:20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잘 읽고 가여~

  3. 1466902748 2016.06.26 09:59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잘 읽고 가여~

세계외교사 연표


유럽에 있어서 민족주의와 세력균형

독일·이태리 민족국가 탄생과 영국에 의한 세력균형

유럽의 세력균형 변화와 극동에서의 세력균형

 


1789 프랑스 대혁명


1792 프랑스와 오스트리아, 프로이센 전쟁


1796-1815 나폴레옹 전쟁


1814 빈회의


1815 신성동맹 형




1853-56 크림전쟁


1870 독일, 이태리 통일


1873 비스마르크, 프랑스 고립. 독일-오스트리아-러시아 3제협상


1877-78 러시아 터키와의 전쟁 승리. 그러나 베를린 회의를 통해 러시아 발칸반도 진출 좌절


1879 독일-오스트리아 양국동맹


1882 3국동맹


1894 프랑스-러시아 동맹 체결 (비스마르크가 주도한 러시아, 프랑스 분리 노력이 실패)

 



1894 중일전쟁


1898 미서전쟁


1904-05 러일전쟁


1905 을사조약


1910 한일합병조약


 프랑스혁명 전쟁은 왕조간의 전쟁이 아니라 전쟁의 형태를 취한 국제 규모에 있어서의 계급투쟁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 프랑스혁명은 신권왕국의 입장에 선 부르봉왕조의 통치를 인민주권론의 이름으로 부인한 것이다. 여기에 대응하여 처음으로 전유럽적 규모의 세력균형이 적극적으로 시도되었다. 이후 나폴레옹을 몰락시킨 러시아에 대한 공포로 전환된 가운데 빈회의 이후 정통주의와 세력균형을 지도원리로 하는 복고의 시대로 돌아간다


 그러나 각국의 피지배계급은 이미 프랑스혁명의 자유, 평등선언 뒤 절대주의적 정치체제가 타도되는 것을 목격하였고, 혁명전쟁 및 나폴레옹 전쟁을 통해서 프랑스의 세력 하에 놓인 지역에 혁명의 성과가 이식, 도입되는 것을 보았다. 이렇게 치열한 전유럽적 세력균형과 민족의식이 발달하는 역사 속에서 빈회의 후 각국의 피지배계급, 피지배민족 간에는 정치적 자유운동, 민족적 해방운동이 발전되어 국제정치의 중요한 축으로 역할하게 된다.

 독일, 이태리 2대 민족국가의 탄생으로 유럽국제정치의 진전은 빈체제를 완전히 붕괴시키고 이것은 빈회의 이후 세계정치에 있어서 영국의 우월적 지위를 더욱더 확고하게 하였다. 그것은 영국에 의한 세력균형과 영국해군에 의한 것으로 영국 산업자본의 세계적 우월에 뒷받침되고 있었다. 그러나 이 시대 영국에 의한 평화를 위협하는 것으로 러시아제국이 있었다.


 비스마르크가 제국재상에 있을 때와 지위를 떠난 후 유럽 국제정치에 거대한 변화가 생기게 되는 과정은 그의 세계정치에의 영향을 보여준다. 우선 독일 내 빌헬름 2세의 세계정책에 의한 강력한 제국주의정책과 이것이 영국을 자극함으로 3국협상 성립에 이르는 것으로 나타난 국제정치의 불안정성이 그것이다. 3국협상 성립에 의해 유럽 제국주의 대국은 양분되어 대립하게 된다. ‘영광스러운 고립으로 위대한 균형자로서 역할해 온 영국이 반독 3국협상에 속하게 됨으로서 이제 유럽 제국주의 각국 간의 세력균형은 전혀 우연에 맡겨지게 된 것이다.

 제국주의 시대는 비유럽에 있어서는 극동에 있어서 미·의 등장으로 진전한다. 미국은 1823년 먼로주의 선언으로 유럽의 세력균형으로부터 아메리카 대륙에 있어서 자국의 안전을 보장받으려 했다. 미서전쟁 후 동아시아 영토로 진출하면서 극동국가로 등장한다. 그후 만주 및 한국을 둘러싼 러일전쟁은 일본과 러시아 양국 사이의 전쟁일 뿐 아니라 전쟁의 진행 및 수습에 서양제국주의 각국이 관여하여 러일전쟁과 세계정치와의 연관을 갖게 하였다. 특히 미국은 화평주선을 함으로써 러·일 양국간에 세력균형을 수립케 하였다. 더 나아가 러·일전쟁과 세계정치와의 연관은 패전 후 러시아 제국주의가 팽창의 방향을 극동에서 발칸반도로 전환해 제국주의적 대립을 격화하게 한 것으로도 나타났다.


 세계 각국에 자본주의 성장은 제국주의 시대를 가져오며 세계정치의 중심점은 다원화되기에 이르렀다. 유럽대국들, 다음에 미·일이라는 비유럽국가가 세계정치에 등장하면서 그와 함께 영국에 의한 세력균형, 영국에 의한 평화시대와 다르게 세계정치의 중심점은 현저하게 다원화된 것이다.


 교린질서의 붕괴와 이후 제국주의 세계정치 질서 속에 강제 편입된 한국은 씻을 수 없는 과거를 지니게 되었다.

 

Posted by Economist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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