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 서양정치사상사를 수강하면서 작성한 글입니다.


 

Thomas Hobbes의 정치사상


 

I. ‘방법론적 개인주의에 의한 정치적 아리스토텔레스주의의 전복

 

 사회계약론으로 통칭되는 근대 정치철학은 근대 이전의 정치를 지배한 아리스토텔레스주의를 전복한다. 양자의 관계가 계승과 변형의 관계가 아니라 전복의 관계인 것은 근대 정치철학이 아리스토텔레스주의의 근본명제에 대한 부정으로부터 출발하기 때문이다.


 아리스토텔레스정치학의 출발점은 인간은 본성상으로 정치적 동물”(정치학, 1253 a 2)이라는 주장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정치적 공동체의 필연성을 인간 본성으로부터 끌어낸다. 정치공동체가 인간의 본성적인 욕구 속에 그 기초를 가지고 있으며(정치학, 1253 a 28), 정치공동체에 대한 참여는 삶의 목적으로 파악된다.

 중세의 사회정치철학 체계를 수립한 아퀴나스도 아리스토텔레스를 수용한다. 정치적 공동체를 형성하고자 하는 욕구는 인간의 본유 관념으로 파악된다(신학대전 Summa theologica, IIa-IIae, quaest. 124, art. 4, ad 3; Ia-IIae, quaest. 92, art. 1). “정치적 동물테제의 핵심은 정치공동체의 개인에 대한 존재론적 우위이다. 정치적 아리스토텔레스주의의 틀 안에서 개인은 정치적 공동체로부터 독립적으로 파악하지 않는다. 정치적 공동체에의 참여 없이는 개인의 인륜적 완성은 이루어질 수 없기에 정치공동체는 개인에 대하여 인륜적인 우위를 가진다.


 하지만 정치적 아리스토텔레스주의의 핵심은 오늘날 다양한 공동체주의자들에 의하여 주장되는 공동체의 인륜적 우위보다 한 걸음 더 나아간다. 즉 정치공동체에의 참여는 인간의 고유한 목적이기에, 정치공동체는 개인들에 대하여 존재론적인 우선성까지 획득한다. 정치적 공동체는 본성상 개인보다 선차적’(정치학, 1253 a 25)이다.

 

 근대 정치철학은 정치적 아리스토텔레스주의의 근본명제인 정치적 동물테제를 전복한다. 정치공동체는 개인에 대하여 존재론적 우위를 가지지 않는다. “정치적 동물테제의 전복의 결과는 방법론적 개인주의이다. 근대 정치철학은 개인으로부터 출발하며, 정치공동체는 개인들이 만든 것에 불과하다.


 정치공동체는 홉스가 주장하듯 제작된 것이거나 로크, 루소와 칸트가 말하듯이 자유의지를 가진 개인들의 결합에 지나지 않는다. 근대 정치철학의 공통특징을 방법론적 개인주의라고 규정하는 것은 중요한 의의를 가진다. 그것은 근대 정치철학이 개인에서 출발하지만 논증 목표는 개인의 우위에 머무르지는 않음을 암시한다. 근대 정치철학은 개인들로부터 출발하여 개인들의 결합으로서의 정치공동체를 논증하는 체계이다. 이는 자연상태, 사회계약, 정치공동체의 세 단계 논증구조를 가진 사회계약론으로 나타난다.


 자연상태는 사회계약 이전의 상태로서 개인들이 정치공동체 없이 존재하는 상황이다. 이처럼 자연상태를 전제한다는 것 자체를 정치적 동물테제의 전복으로 볼 수 있다. 그런데 근대 정치철학은 자연상태의 정당성에 대한 논증이 아니라 자연상태에 대한 극복의 필연성의 논증이라는 점이 더욱 중요하다. 근대 정치철학은 자연상태를 극복하고 사회계약을 통하여 국가를 수립해야 할 필연성을 논증한다. 이는 근대 정치철학이 국가의 정당성에 관한 논변이며, 지배의 정당성에 관한 논변임을 뜻한다. 근대 정치철학은 정당한 지배의 기준을 제시하고자 한다. 바로 이 점은 근대 정치철학에 의한 아리스토텔레스주의의 전복이 정치철학 체계의 출발범주의 문제만이 아니라 보다 심층적으로 논증목표와 관련된 것임을 뜻한다.

 


II. 지배의 정당화 논변으로서의 사회계약론

 

정치적 아리스토텔레스주의의 틀 안에서 지배나 강제에 대한 논변은 불가능

- ‘생성과 존재의 구분’ : 모든 생성은 오직 존재를 위한 생성’ (형이상학 IX, 8, 1050 a 4-9)

- 인륜적으로 좋은 삶은 폴리스의 존재근거’, 폴리스의 발생근거인 단순한 생존보다 우위

- 폴리스는 개인의 내적 목적’, 공동체에 참여하는 것은 강제가 아니라 인간적인 목적의 실현

 

17-18세기의 근대 정치철학: 사회계약론의 형태를 통해 지배에 대한 정당화 논변 제시

- 지배에 대한 정당화 논변을 제시한다는 것은 동시에 이와 같은 정당화의 기준을 충족시키지 못하는 부정당한 지배에 대한 저항 논거를 제시

- 홉스는 지배의 문제를 정치철학의 중심 문제로 끌어올린 최초의 근대 정치철학자

- 아리스토텔레스의 정치철학이 최고의 선과 관련된다면, 홉스의 정치철학은 '만인과 만인의 전쟁이라는 최악'을 막을 수 있는 평화의 수단을 구상

- 지배나 강제에 대한 논변을 불가능하게 만드는 아리스토텔레스 목적론의 체계 전복은 기하학적 방법’(mos geometricus)의 도입을 통해 수행 : 발생론적이며 인과론적 방법, ‘사유실험

- 홉스에 의한 전복구조

 

아리스토텔레스

홉스

국가공동체의 위상

그 자체로 인간의 목적이다

수단이다(목적-수단관계의 전도)

인간관

협동의 인간학(사회적 본성)

갈등의 인간학(만인과 만인의 투쟁)

폴리스vs개인

개인에 대한 폴리스의 우위

개인이 출발범주(방법론적 개인주의)

이성개념

이성능력과 이성적 판단 내용은 구분되지 않으며 통일된다 (phronesis)

이성은 전략적 판단을 위해 필요한 계산능력 (techne)

- 자연상태, 사회계약, 사회계약을 통해 수립된 국가라는 세 가지 단계의 논증구조 정치공동체의 성격과 상은 전적으로 자연상태에 관한 서술에 의해 결정

- 홉스와 달리 로크의 자연상태는 평화상태와 전쟁상태의 요소를 복합적으로 가지고 있어 자연상태를 극복한 정치상태인 국가는 제한적인 주권권력만을 가진다. 따라서 홉스의 사회계약론이 절대국가로 귀결되는 반면에 로크의 사회계약론이 생명, 자유, 재산을 보호하는 헌법국가로 귀결

- 로크는 목적론 체계에 대한 전복을 본유관념론에 대한 경험론적 부정으로부터 시작(이성능력을 특정한 판단내용과 구분했지만 그가 이성을 홉스처럼 이기적 타산능력으로 환원한 것은 아니다)

- 홉스 이후의 사회계약론은 로크처럼 홉스의 패러다임을 그대로 따르면서 자연상태관을 바꾸거나, 루소나 칸트처럼 사회계약론의 논증구조에서 자연상태관이 차지하는 중요성을 감소시키고 사회계약의 논증적 역할을 증대시키는 전환을 시도

 


III. 지배의 역설

 

1) 강제력 없이는 사회적 협력체제가 있을 수 없다

- 자연권의 영구적인 상호포기가 평화상태를 수립하는 것 같지만 전쟁의 종식과 평화상태는 질적으로 다른 상태. 평화상태를 위해서는 생산, 분배, 교류의 협력이 필요. 홉스는 그와 같은 협력의 규칙, 곧 정의는 국가권력을 전제한다고 주장

- "정의롭다 또는 부정의하다라고 말할 수 있기 위해서는 계약을 어겼을 때 기대되는 이익보다 처벌의 두려움이 더 크게 작용하여 사람들로 하여금 계약을 지킬 수 있도록 만드는 강제력이 먼저 있어야 한다. 그러한 권력은 국가의 수립 이전에는 있을 수 없다."

- 이 역설은 이기적 개인들이 합리적 선택의 결과(교섭/타협)로 계약이 성립한다는 변명으로 해소한다. 그러나 비록 자연상태로부터 국가상태로의 이행이 가장 합리적인 선택임을 재구성할 수 있다 할지라도 리바이어던의 제작이 합리적 선택일 수 있는지의 문제는 여전히 남는다.


2) 절대권력자는 왜 만인에게 포함되지 않는가?

- 계약의 내용은 만인이 만인에 대해 만인과 만물에 대한 권리(1의 자연법)을 포기한다는 내용이다. 무한축적의 포기이며 자기통제의 권리를 포기하는 것이다. 이것은 만인대 만인의 계약이다.

- 그런데 권리를 포기하지 않는 단 한명의 늑대가 있다. ‘성 안을 어슬렁 거리는 늑대가 결국 주권자가 된다. 그런데 만약 계약에 참여하지 않은 늑대가 한 마리가 아니라면 어찌 되는가?

- 주권자는 자신의 권리를 포기 안한 제3자이며 만인에 속하지 않는다. ‘만인이라면 모두가 하는 계약이어야 하는데 주권자만이 이 계약에 참여하지 않는다. 모두가 자연권을 포기한 상태에서 오로지 그 사람만이 자연상태이다.

- 홉스는 주권자가 왜 계약에 참여하지 않는지, 어디서 온 건지 설명하지 않는다.


 

IV. 지배와 민주주의

 

 먼저 민주주의 개념에 대한 긍정적인 평가는 철저히 근대적인 특징이라는 점부터 살펴볼 필요가 있다. 고대의 민주주의 개념은 인민(Demos)의 지배(Kratia)를 뜻하며 때로 폭도들의 수탈과 같은 부정적인 맥락에서 사용되었다.


 예컨대 아리스토텔레스는 다수 인민의 참여를 전제한다는 점에서 민주정을 비록 참주정이나 과두정보다 나은 정체로 보지만 공동의 영역인 폴리스를 다수의 오이코스로 타락시키는 정체로 보았으며, 폴리스와 오이코스의 구분이 유지되는 군주정이나 귀족정보다도 덜 건전한 정체로 파악한다.


 정치적 아리스토텔레스주의에서 가장 건전한 정체는 혼합정이며, 이는 폴리스와 오이코스의 엄격한 공화주의적 구분을 유지하면서도 군주와 귀족뿐만 아니라 인민도 참여할 수 있다는 점에서 가장 많은 참여를 보장하기 때문에 가장 우월한 정체로 파악된다.


 정체에 대한 가치 판단에서 제1기준은 폴리스와 오이코스의 구분이다. 양자의 구분을 유지하는 군주정이나 귀족정이 겉보기에 더 많은 인민의 참여를 보장하는 민주정보다 우월한 이유는 바로 이러한 제1기준 때문이다. 두 번째 기준은 인민의 참여라고 할 수 있는데, 이는 제1기준과 독립적인 준거로 이해되지 않았다. 근본적으로, 아리스토텔레스는 참여와 지배의 문제를 엄격히 구분한다. 모든 참여는 제1기준의 충족을 전제하며, 모든 지배는 제1기준의 위반, 즉 폴리스를 찬탈하여 오이코스로 만드는 행위로 이해되었다.


 이와 같은 참여와 지배의 대립은 - 앞서 밝혔듯이 - 아리스토텔레스주의의 틀 안에서 정당한 지배에 관한 논변이 등장할 수 없었던 이유이기도 하다. 고전 고대적 어법에서 인민 지배로서의 민주주의 개념은 사적 이해관계를 벗어난 참여라는 공화주의적 이상과 충돌하며, 그러한 한에서 민주주의 개념은 공화국의 이념에 비하여 부정적인 문맥을 가진다.

 

 민주주의 개념에 대한 긍정적인 가치 부여는 '지배 형식'으로부터 '결합 형식'으로 민주주의 개념의 전환에 의하여 이루어질 수 있었다. 홉스 이후 근대 정치철학은 아리스토텔레스주의가 지배의 문제를 도외시했다고 보고 지배의 정당화 또는 정당한 지배에 관한 기준을 제시하고자 한다.


 위에서 살펴보았듯이 홉스의 정치철학은 대등한 주체들의 계약에 의해 수립된 국가적 지배가 계약에 참여하지 않는 제3자인 지배권력을 전제한다는 역설, 곧 지배의 역설을 보여준다. 홉스 이후의 근대 정치철학은 이 문제를 해결하고자 한다. 로크의 정치철학을 지배에 대한 한계를 설정하려는 시도로 볼 수 있다면, 루소와 칸트의 정치철학은 자유의지와 자기지배의 이상을 충족시킬 수 있는 결합 형태에 대한 모색으로 이해될 수 있다. 그들은 민주주의 개념을 자유의지적 주체로서의 개별자들의 결합 형식으로 전환한다.


 이는 루소의 사회계약론과 칸트의 인륜의 형이상학에서 자연상태관보다 사회계약 개념의 논증적 중요성의 커지는 것으로 나타난다. 사회계약론의 논증구조에서 계약이 홉스, 루소, 칸트의 경우처럼 만인과 만인의 계약인가, 아니면 로크의 경우처럼 개인들의 자발적 동의를 의미하는가는 국가정당성 논거에서 중요한 준별성을 가진다.


 칸트는 로크처럼 만인과 만인의 계약을 개별적 동의로 치환함으로써 홉스 식의 절대국가를 방지하려 하는 대신에 만인과 만인의 계약의 상을 수정한다. 여기에서는 이성개념이 중요한 역할을 한다. 홉스처럼 계산능력으로서의 이성개념에서 출발한다면 계약은 전략적 협상이 된다. 반면에 칸트처럼 정언명법적 일반화 능력을 가진 이성적 개인으로부터 출발한다면, 계약은 전략적 협상이 아니라 자연상태의 결점이 보여주는 '공법에의 요청'에 따라 '모든 이의 결합된 의지'를 형성하는 것이 된다.


 루소의 일반의지 개념과 칸트의 '만인의 결합된 의지' 개념에 이르러 근대 정치철학은 정치적 아리스토텔레스주의의 틀 안에서 필연적일 수밖에 없는 민주주의와 공화주의의 충돌, 곧 지배와 참여의 분리 문제를 해소한다. 홉스 정치철학에 고유한 지배의 역설도 결합형식으로서의 민주주의를 통해 해소되는 듯하다. 정치적 아리스토텔레스주의에서 민주주의와 공화주의는 양립할 수 없고 민주공화주의는 역설이었지만, 거꾸로 근대 정치철학의 이상은 민주공화주의이다.

 

 비록 근대 정치철학이 루소와 칸트에 이르러 민주주의 개념을 자유의지적 주체로서의 개별자들의 결합으로 전환했지만, 결합 형식 자체에 대한 해명은 이루어지지 않았고, 홉스에게 나타나는 지배의 역설도 완전히 해소된 것은 아니다. 루소나 칸트는 사회계약에 불참하려는 개인들에게 계약의 참여와 준수를 강제해야 한다고 본다. 만인과 만인의 사회계약에서는 어떠한 예외도 인정되지 않는다. 이는 주권권력의 예외성의 문제를 해결하는 듯하지만 개별적인 인간들에게 일반 의지만인의 결합된 의지는 외적인 것으로 등장할 수도 있음도 망각된다. 루소나 칸트는 치자와 피치자의 동일성, 자기지배의 원리를 집단화하는 공화국의 이념을 통해 지배의 역설을 해결했다고 믿었겠으나 민주주의가 다수 지배의 원리가 아니라 치자와 피치자의 동일성의 원리라고 하더라도 이 원리는 직접적으로 실현되는 것이 아니라 오직 주권권력을 매개로 하여 간접적으로 실현되는 원리일 뿐이라는 점에 대하여 세밀한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다. 지배의 문제로부터 결합의 문제로의 패러다임 전환 자체가 이미 결합 형식에 대한 해명이라는 과제를 해소시키고 있었다.


 이 문제는 오늘날의 민주공화주의에서도 해명되지 못한 채 남아 있다. 민주공화주의에 대한 자유주의적 비판은 입법권을 가진 민주주의적 다수파가 함부로 할 수 없는 헌법적 기본권이나 인권에 호소하며 헌법국가의 옹호로 나타났으며, 좌파적 비판은 자유주의적 헌법국가 또는 근대의 '민주공화주의' 이념 그 자체에 대항하여 다수 지배라는 고전 고대적 의미로 민주주의 개념을 부활시키곤 했다. 결합형식으로서의 민주주의에 관한 탐구는 아직 전개되지 못한 채 남아 있다.



+α 근대: 사적 소유(private 所有)와 군사자원

 

- 본래 사적(private)이라는 말은 그 어원이 말해주고 있듯이 무엇이 박탈된’(privative)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사적 영역에 박탈되어 있는 인간의 본질은 무엇인가? “타인이 보고 들음으로써 생기는 현실성의 박탈, 공동의 사물세계의 중재를 통해 타인과 관계를 맺거나 분리됨으로써 형성되는 타인과의 객관적관계의 박탈, 삶 그 자체보다 더 영속적인 어떤 것을 성취할 수 있는 가능성의 박탈이 그것이다. 고대 폴리스에서 사적영역은 박탈이 아니었다.

- 소유(所有)는 한자 개념이 암시하고 있듯이 장소의 가짐이다. 소유가 마음대로 처분할 수 있는 점유 또는 부와 동일하지 않다는 사실은 고대 정치에 있어서 본질적이다. 그런데 근대의 자본주의 과정에서 소유는 점차 구체적 공간과 장소의 성격을 상실하고 자의적으로 점유, 처분, 양도할 수 있는 동산의 성격으로 변질되었다.

- 봉건제에서는 무력수단의 소유가 곧 생산수단 소유의 기반이 되고 또한 무력이 잉여생산 수취의 직접적 수단이 되었다. 그런데 백년전쟁이 마감되면서 봉건제의 군사적 기반이었던 기사군 양식은 새로운 군사기술과 이에 따른 새 군사자원의 등장, 즉 화기 및 보병군의 등장으로 대체된다. 새롭게 등장한 체제는 증가된 부담의 균등한 배분, 그 부담에 상응하는 정치참여의 권리부여와 부담에 대한 동의형성을 위한 정치적 제도 마련을 보장하는 것이었다. 형평원칙에 입각한 부담의 배분은 지배층의 특권폐지를 바탕으로 하는 부담의 국민화로 그리고 이에 상응하는 정치적 참여의 국민화를 낳았다.

 

 

 

 

참고문헌

 

레오 스트라우스, 정치철학이란 무엇인가, 아카넷, 2002

나종석, 홉스의 정치철학과 고전적인 정치철학의 붕괴, 사회와 철학 제6, 2003

박상섭, 근대국가와 전쟁, 나남신서, 2007

박홍규, 민주주의자 홉스의 리바이어던, 인물과 사상 93, 2006

볼프강 케스팅, 홉스, 전지선 옮김, 인간사랑, 2006

아리스토텔레스, 니코마코스 윤리학, 최명관 옮김, 훈복문화사, 2005

요한네스 힐쉬베르거, 서양철학사 하권: 근세와 현대, 강성위 옮김, 이문출판사, 2007

조지 세이빈`토머스 솔슨, 정치사상사2, 송유보`차남희 옮김, 한길사, 2002

토마스 홉스, 리바이어던, 신재일 엮어옮김, 서해문집, 2007(영문판으로는 http://etext.library.adelaide.edu.au/h/hobbes/thomas/h68l/ 을 이용)

한나 아렌트, 인간의 조건, 이진우`태정호 옮김, 한길사, 1996

A. 바루치, 정치 철학,이진우 옮김, 서광사, 1991

Posted by Economist21

댓글을 달아 주세요

상품의 질 미학(Aesthetic qualities of commodities)은 가능할까



 피에르 부르디외 같은 저명한 사회학자들은 상품미학 비판이론을 발전시켰다. 이들은 주로 미학이 다루고 있는 욕구와 감성을 자본주의 내에서 사회적으로 분석하고 있다. 자본주의 상품생산이 지향하는 것은 교환가치인데, 이런 상품 미학이 인간의 미적 행위를 조직하여 우리들의 정체성 형성에 영향을 미친다. 상품은 사용가치가 아니라 정형화된 기호가치 때문에 구매되고 소비되며, 이 속에서 인간의 욕구는 진정으로 충족되지 않고 오로지 가상적으로 충족되어 결국 우리는 끊임없이 새로운 상품의 소비에 몰두하게 된다.


피에르 부르디외((Pierre Bourdieu, 1930-2002)



 이런 상품미학들은 교환가치에 지배되는 사용가치를 중심으로 두고 사회를 분석하고 있다나는 이렇게 특수한 형태의 사용가치가 아닌 사용가치 그 자체를 분석할 수 있다고 본다. 물론, 자본주의 사회에서 교환가치와 멀리 동떨어진 독립된 사용가치를 생각하는 것은 경제학적으로 큰 의미를 가질 수 없다. 결국 내가 고찰하고자 바는 교환가치와 분리된 사용가치 자체가 아니라 사용가치가 교환가치에 지배되는 양식에 초점을 맞춘 여러 연구와는 다르게 자본주의 사회에서 사용가치 갖는 일반적인 위치이다.


 

□ 사용가치의 미학


 상품은 질과 양의 두 측면에서 고찰할 수 있다. 유용한 물건은 수많은 속성들을 가지고 있으며, 따라서 다양하게 유용할 수 있다. 한 물건의 유용성은 그 물건으로 하여금 사용가치가 되게 한다. 이 유용성은 공중에 떠있는 것이 아니라 상품의 물리적 속성에 의해 주어지고 있으며, 그 상품체(physical body of the commodity)와 별도로 존재할 수 없다. 같은 사용가치를 가진 상품은 같은 비율로 교환될 수 있을 것이나 이 경우에는 아예 교환을 할 이유가 없을 것이다. 교환은 서로 다른 사용가치에서, 즉 질적으로 서로 다른 상품들 사이에서 일어난다. 질적으로 서로 다른 상품들, 예컨데 1개의 시계와 2kg의 쌀이 교환된다. 이렇게 교환가치는 우선 양적 관계, 즉 어떤 종류의 사용가치가 다른 종류의 사용가치와 교환되는 비율로 나타난다.


 그런데 교환이 되기 위해서는 사용가치가 다른 누군가에게 유용해야 할 것이다. 자기 노동의 생산물로써 자기 자신의 욕망을 충족시키는 사람은 사용가치를 만들기는 하지만 상품을 만들지는 않는다. 상품을 생산하기 위해서는, 그는 사용가치를 생산할 뿐 아니라 타인을 위한 사용가치, 즉 사회적 사용가치를 생산하고, 그 생산물을 사용가치로 쓰는 사람에게 교환을 통해 이전해야 한다. 나는 여기에 미학이 개입할 여지가 있다고 본다. 상품의 사용가치가 유용하다고 판단하는데에는 취향 판단, 즉 미적 판단이 개입되기 때문이다.


 누군가에게는 유용한 물건이 어떤 사람에게는 유용하지 못할 수 있다. 바로크 음악을 극도로 싫어하는 사람에게는 바로크 음악의 아름다움에 대해 이론적으로 아무리 설명한다 할지라도 그의 취향은 변하지 않는다. 이제 그에게 바로크 음악이 담긴 CD와 그의 시계를 교환자고 해보자. 그에게 아무리 많은 바로크 음악 CD를 준다고 할 지라도 그는 절대 교환을 하려 하지 않을 것이다. 아무리 싼 가격에, 설사 무료로 그 CD를 준다고 해도 그는 사지 않을 것이다. 이렇게 서로 다른 각 개인들의 취향과 선호는 경제학에서 수요로 나타난다.


 이제 경제학의 공급의 측면에서 사용가치의 미학을 바라보자. 상품을 생산하는 자들은, 그들의 상품이 교환되기 위해서 사회적으로 유용한 상품의 사용가치를 생산해야한다. 상품이 사회적으로 유용할 수 있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하는가. 각기 서로 다른 취향을 가진 개인들이 모인 사회에서 보편적으로 타당한 취향을 전제해야 한다.


 이것은 칸트가 말한 미적 판단의 이중성과도 연결될 수 있겠다. 어떤 사람이 튤립이 아름답다고 했을 때, 그는 자신의 취향판단에 근거해서 튤립이 아름답다고 말하고 있지만 동시에 그는 다른 누군가도 이 튤립이 아름답다고 판단할 근거가 있다. 개별적이고도 특수한 취향판단은 마치 보편성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이런 보편성에 근거해서 우리는 상품을 만들고 있지 않을까? 싸이는 '강남스타일'이란 노래를 만들면서(대중음악의 보편적인 미학적 기준들에 맞게) 이것이 대중들에게 만족을 줄 것이라 예상하고 상품 시장에 내놓았을 수도 있다.




 처음에 언급했던 상품미학 비판이론을 통해 내용을 더 보충하자면 '사용가치의 객관적인 미적 약속'을 통해 교환이 이루어질 수 있다. 교환은 사용가치를 통해서가 아니라 사용가치의 약속을 통해서, 상품을 둘러싼 '아름다운 가상'에 의해 발생한다. 상품을 둘러싼 미적 가상은 어떤 약속, 예를 들자면 사랑, 행복, 자유, 지성 등을 제시하는 것이다.

Posted by Economist21

댓글을 달아 주세요

생각하는 대로 살지 않으면 사는 대로 생각 한다

-스콧 니어링(Scott Nearing) 서전을 읽고


 위인들의 자서전은 늘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한다. 한 시대를 살아간 고인의 가치관과 숨결이 녹아 있는 자서전은 각자 누가 보느냐에 따라, 삶의 어떤 부분을 강조하느냐에 따라 매번 다르게 읽히는 풍요로움을 간직하고 있어 폭풍 하나 흔들지 못하는 우리네 마음에 고요한 파도를 일으킨다. 그런 마음을 어찌 글로 쓸 수 있을까 생각해보면서도, 머리보다는 가슴으로 자유롭게 글을 써볼까 한다.



 “지구가 가진 자원은 모든 사람의 필요를 위해서는 충분하지만 소수의 탐욕을 위해서는 부족하다마하트마 간디의 외침은 늘 자본주의 시대에 살고 있는 우리 폐부를 콕콕 찌른다. 그러나 우리는 종종 그러한 외침을, 혹은 마음 깊은 곳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귀기울이지 않는다. 그것은 고통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사회의 근본적으로 곪아 터진 상처를 외면한 채, 색안경을 쓰고 본질을 보려 하지 않는다. 사회의식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누구나 한번쯤 먹고 사는 문제 때문에 그것들을 부정하려는 시도를 해본다. 혹은 너무나 바삐 살아가는데 매달려 이러한 생각을 깊게 고민해보지 못할 수도 있다.


 “사람은 대중의 생활습관, 도덕기준을 따라야 하는가, 아니면 자신의 규범을 만들어가야 하는가? 자신의 규범에 따라 살고 그것을 지키면서 그에 반대되는 사회에 대항하여 거슬러 나아갈 것인가, 아니면 무저항의 길을 따를 것인가?” 누구나 세상을 변화시키며 살 것인지, 아니면 주어진 현실과 타협하고 살 것인지를 선택해야 한다. 스콧 니어링은 자신의 규범에 따라 세상을 변화하는 데 자신을 바치고 그에 반대하는 사회에 맞서 나아가는 길을 선택한다. 그렇기 때문에 그가 위인인 것이다.


 <스페셜리스트 Specialist>라는 기록영화를 보면, 2차 세계대전 당시 나치수용소의 건설과 대량 학살을 주도했던 루돌프 아이히만은 자신이 명령체계의 한 부분이였고 내려진 명령을 수행했을 뿐이며, 일개 관료로서 내려진 명령에 대해 복종하는 것은 미덕이지 처벌당할 일이 아니라고 강변한다. 이에 대해 판사가 시민적 용기를 가지고 그 명령에 저항하거나 거부할 수는 없었느냐고 하자, 아이히만은 그런 시민적 용기가 관료적으로 조직화될 수 있다면 가능할 것이라고 대답한다. 어쩌면 우리는 모두 마음속에 아이히만이 있는 지도 모르겠다. 생각할 수 없게 주어진 환경 속에서 생각하지 않는 것이 어찌 죄가 되겠는가?


 하지만, 스코트 니어링은 생각하는 대로 살지 않으면 사는 대로 생각 한다라고 말한다. 우리는 진정 사는 대로 생각하지만, 그렇다고 그것이 다는 아니다. 우리는 생각하는 대로 살 수 있다. 한나 아렌트는 사람들이 생각하지 않는 이유가 내가 해야 하는 일이 무엇인가를 자기 자신에게 묻지 않는 데 있다고 본다. 이는 인간이 생각하지 않고 도덕적 질문을 통해 스스로를 성찰하지 않을 때 악은 우리의 일상에 항상 존재하게 되며, 더 나아가 평범한 그 누구라도 그의 일상적인 삶이 언제든 악으로 전환될 가능성이 있다는 의미이다.


 푸코는 다르게 생각할 수 있다면, 다르게 행동할 수 있다고 말한다. 푸코는 칸트를 통해 다르게 생각할 수 있다는 것을 비판적 태도의 성숙으로 이해했고, 비판적 태도를 가진 이는 다르게 행동할 수 있을 것이라 믿었다. 기존의 질서가 부여하는 방식과 다르게 생각할 수 있는 성숙한 자아의 다른 행동이 세상을 바꾸는 잠재적인 힘이 될 수 있을 것이란 의미다.


 우리의 삶이 아무리 각박하다 할지라도 우리는 결코 사는 대로 생각해서는 안 된다. 미국의 관료들과 심지어 믿었던 동료들마저 자신을 핍박해도 자극적인 소비의 욕망과 도시를 뒤로 한 채 자립농을 하며 자신의 의지를 끝까지 관철시켰던 스콧 니어링의 거칠며 여유롭고 풍요로운 삶에서 과연 우리는 무엇을 생각할 수 있을까? 우리는 무엇을 해야만 하는가?

Posted by Economist21

댓글을 달아 주세요

인간이란 무엇인가? (1)

 『성경시편詩篇을 보면 너 스스로를 생각하는 너, 인간이란 도대체 무엇인가라고 묻고 있다. 이에 대한 답은 아주 다양할 수 있다. 수업시간에서도 이에 대한 다양한 의견들이 나왔었다. 그러나 우리가 인간이란 무엇인가라고 묻는다는 것은 인간에 대한 본질에 대한 질문이며, 이는 단순히 인간의 다양한 성격들을 나열하는 일만은 아닐 것이다. 칸트는 인간의 이성이 알 수 있는 것은 진리가 어딘가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뿐이다.”라고 말한 바 있는데, 현재처럼 다양한 인식론이 대두되고 있는 상황에서 우리가 인간의 본질을 규명하고자 하는 시도는 생각보다 훨씬 복잡하며, 그 해답을 구하지 못할 수 있는 일이 될 수 있다.

 그러나 누군가 인간이란 무엇인가에 대해서 우리는 알 수 없습니다. 그런데 당신은 왜 그것을 알려고 하나요?” 묻는다면, 나는 우리는 끊임없이 인간다움을 생각하며, 그에 대한 질문은 세계를 어떻게 바라보며, 이 세계를 우리가 어떻게 변화시켜야 되는지에 대한 해답을 주기 때문에 가치 있는 질문입니다.”라고 말할 것이다.

 인간이 본래 자유로운 존재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자본주의는 항시 인간의 자유를 어느 정도 제약한다고 생각할 것이고, 그들에겐 자본주의에 나타나는 화폐의 물신성을 어떻게 극복해 나아가야할지가 주요 논의 사항이 되곤 한다. 인간이 현재 성적으로 억압되어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인간이 성적으로 해방되어 있는 사회가 좋은 사회이며, 인간은 원래 그런 존재라는 가치관을 담고 있다.

 따라서, 우리가 인간이 무엇이냐고 묻는 질문은 단순히 우리가 이 현실세계에서 어떤 모습을 지니고, 어떤 성격을 지니고 있느냐에 대해 답을 하는 것을 넘어, 우리가 지향하고 꿈꾸는 바가 무엇이냐를 결정하는 주요한 물음이다.

 우리는 연쇄살인범에 대해 흔히 그는 인간도 아니다.”라는 말을 하기도, 때로는 그와 비슷한 말을 듣기도 한다. 그러나 우리는 진짜로 그를 인간이 아니라고 규정하기 보다는 우리 마음 속 깊이 인간다움에 대해 어느 정도 정의를 내리고 있으며, 살인을 서슴없이 저지르는 살인범은 그런 범주에 속하지 않는다는 것을 말하고 있을 뿐이다.

 이것은 일종의 토톨로지(Tautology)로 우리가 친구들과 함께 대화하며 그는 정말 남자답다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 애초에 그는 남자이지만 우리는 흔히 남자다움을 상정하고 있기 때문에 벌어지는 일이며, 이는 논리학에서 단순히 “A=A라고 말하는 것과는 다른 방식이 아닐 수 없다.

 그렇다면 우리는 진정 인간의 어떤 모습을 인간다움이라 생각하고 느끼는가. 이에 대한 일화를 하나 들도록 하자. 프리모 레비(Primo Levi)는 아우슈비츠에서 살아남은 후, 이탈리아로 돌아와 자신의 수용소 체험을이것이 인간인가라는 제목으로 1947년에 출간했다. 여기서 인간이라면 이런 짓은 절대로 하지 않을 것이다라는 우리의 막연한 믿음이 얼마나 허망한 것임을 알 수 있다.

 이 책에서 대단히 인상적인 대목이 나오는데, 당시 프리모 레비는 강제수용소에서 피콜로라는 동료 죄수와 함께 밥을 나르는 작업을 하고 있었다. 그곳 수용소에서는 영양 섭취가 절대적으로 부족해서 아무리 애를 써도 보통 생활이라면 3달 안에 죽을 수밖에 없는 환경이었고, 게다가 가혹한 강제노동을 매일매일 강요받았으며 자칫 사소한 규칙 하나라도 위반할 경우엔 무시무시한 고문과 처벌이 기다리고 있었다. 동시에 다른 사람의 약점을 고발하거나 어떻게 하면 남을 속여서 그의 물건을 훔칠까, 어떻게 하면 나보다 더 약한 인간을 짓밟아 살아남을까만을 궁리하는 곳이 바로 강제수용소라는 공간이다. 거기서 피콜로는 레비에게 아무 시라도 좋으니 읽어주지 않겠느냐?’고 말한다. 시 낭독을 부탁받았지만 수용소엔 당연히 책 같은 것이 없으므로 기억하고 있던 시를 읊조리는고 있는데, 이때 레비의 뇌리에 단테(Alighieri Dante)신곡에 나오는 오디세우스의 노래가 불현듯 스친다.

 

그리하여 나는 조그만 배 한 척을 얻어

 언제나 나를 따르는 몇몇 친구들과 심연의 대양을 향해 나섰소.

스파냐와 모로코에 이르기까지 피안과 차안을 바라보고

 또 사르디니아 섬과 바다에 씻기고 있는 그밖에 많은 섬들을 보았소.

인간이 더 이상 넘어가서는 안 된다고 경고하는,

헤라클레스가 세워놓은 좁은 입구 표지에 이르러서는

나와 동료들 모두 이미 늙고 어느덧 때는 늦었는데,

오른쪽으로는 세비야가 멀어지고 왼쪽으로는 벌써 세타가 보이지 않게 되었소.

난 이렇게 말했소.

, 온갖 위험을 무릅쓰고 세상의 서쪽 끝에 다다른 형제들이여!

그대들은 태양을 좇아

얼마 남지 않은 짧은 오관을 각성하며

사람 살지 않는 세상을 탐색하려는 마음 버리지 말지어다.

그대들은 자신의 타고난 기원을 기억하라.

그대들은 짐승 같은 삶을 살기 위해서가 아니라 덕과 지식을 구하기 위하여 태어났나니.’

동료들은 나의 이 짧은 연설을 듣고 모두가 서로 불발하며 뱃길을 앞 다투었으니

그들을 진정시키기가 힘들 지경이었소.

 

 요컨대 오디세우스가 지극히 험난했던 이 항해 도상에서 이제 끝인가!”하고 생각했을 때, 우리는 짐승처럼 살아가기 위하여 태어난 것이 아니다. 덕과 지혜를 구하기 위해서 태어났다. 그것이 바로 인간이다. 그렇게 이야기한다. 그 말을 통해 피콜로에게 힘을 내라고 했던 것이다.

 강제수용소의 삶은 우리가 쉽게 느끼기에도 인간다움이 결여되어 있는 삶이다. 혹은, 영화 이퀼리브리엄(Equilibrium, 2002)에서 나타나는 모든 감정이 통제되는 미래도시역시 우리에게는 너무나 인간다움이 결여되어 있는 곳으로 느껴진다. 이는 즉 우리가 인간다움을 생각할 때 그것은 상당히 이상적이며, 강제와 통제로 우리의 덕과 지혜가 제한되거나 살인을 서슴없이 저지르는 비윤리적인 모습, 감성이 억압되지만 이성으로 질서정연한 인간의 모습까지도 그것이 진정 인간답다고 느끼지 못한다는 것이다.


* 2009년에 <철학적 인간학>을 수강하며 작성한 글을 블로그에 맞게 수정한 것입니다.

Posted by Economist21

댓글을 달아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