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이란 무엇인가? (1)
『성경』시편詩篇을 보면 “너 스스로를 생각하는 너, 인간이란 도대체 무엇인가”라고 묻고 있다. 이에 대한 답은 아주 다양할 수 있다. 수업시간에서도 이에 대한 다양한 의견들이 나왔었다. 그러나 우리가 ‘인간이란 무엇인가’라고 묻는다는 것은 ‘인간’에 대한 본질에 대한 질문이며, 이는 단순히 인간의 다양한 성격들을 나열하는 일만은 아닐 것이다. 칸트는 “인간의 이성이 알 수 있는 것은 진리가 어딘가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뿐이다.”라고 말한 바 있는데, 현재처럼 다양한 인식론이 대두되고 있는 상황에서 우리가 ‘인간’의 본질을 규명하고자 하는 시도는 생각보다 훨씬 복잡하며, 그 해답을 구하지 못할 수 있는 일이 될 수 있다.
그러나 누군가 “인간이란 무엇인가에 대해서 우리는 알 수 없습니다. 그런데 당신은 왜 그것을 알려고 하나요?” 묻는다면, 나는 “우리는 끊임없이 ‘인간다움’을 생각하며, 그에 대한 질문은 세계를 어떻게 바라보며, 이 세계를 우리가 어떻게 변화시켜야 되는지에 대한 해답을 주기 때문에 가치 있는 질문입니다.”라고 말할 것이다.
인간이 본래 자유로운 존재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자본주의는 항시 인간의 자유를 어느 정도 제약한다고 생각할 것이고, 그들에겐 자본주의에 나타나는 화폐의 물신성을 어떻게 극복해 나아가야할지가 주요 논의 사항이 되곤 한다. 인간이 현재 성적으로 억압되어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인간이 성적으로 해방되어 있는 사회가 좋은 사회이며, 인간은 원래 그런 존재라는 가치관을 담고 있다.
따라서, 우리가 “인간이 무엇이냐”고 묻는 질문은 단순히 우리가 이 현실세계에서 어떤 모습을 지니고, 어떤 성격을 지니고 있느냐에 대해 답을 하는 것을 넘어, 우리가 지향하고 꿈꾸는 바가 무엇이냐를 결정하는 주요한 물음이다.
우리는 연쇄살인범에 대해 흔히 “그는 인간도 아니다.”라는 말을 하기도, 때로는 그와 비슷한 말을 듣기도 한다. 그러나 우리는 진짜로 그를 인간이 아니라고 규정하기 보다는 우리 마음 속 깊이 ‘인간다움’에 대해 어느 정도 정의를 내리고 있으며, 살인을 서슴없이 저지르는 살인범은 그런 범주에 속하지 않는다는 것을 말하고 있을 뿐이다.
이것은 일종의 토톨로지(Tautology)로 우리가 친구들과 함께 대화하며 “그는 정말 남자답다”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 애초에 그는 ‘남자’이지만 우리는 흔히 ‘남자다움’을 상정하고 있기 때문에 벌어지는 일이며, 이는 논리학에서 단순히 “A=A다”라고 말하는 것과는 다른 방식이 아닐 수 없다.
그렇다면 우리는 진정 인간의 어떤 모습을 ‘인간다움’이라 생각하고 느끼는가. 이에 대한 일화를 하나 들도록 하자. 프리모 레비(Primo Levi)는 아우슈비츠에서 살아남은 후, 이탈리아로 돌아와 자신의 수용소 체험을『이것이 인간인가』라는 제목으로 1947년에 출간했다. 여기서 “인간이라면 이런 짓은 절대로 하지 않을 것이다”라는 우리의 막연한 믿음이 얼마나 허망한 것임을 알 수 있다.
이 책에서 대단히 인상적인 대목이 나오는데, 당시 프리모 레비는 강제수용소에서 피콜로라는 동료 죄수와 함께 밥을 나르는 작업을 하고 있었다. 그곳 수용소에서는 영양 섭취가 절대적으로 부족해서 아무리 애를 써도 보통 생활이라면 3달 안에 죽을 수밖에 없는 환경이었고, 게다가 가혹한 강제노동을 매일매일 강요받았으며 자칫 사소한 규칙 하나라도 위반할 경우엔 무시무시한 고문과 처벌이 기다리고 있었다. 동시에 다른 사람의 약점을 고발하거나 어떻게 하면 남을 속여서 그의 물건을 훔칠까, 어떻게 하면 나보다 더 약한 인간을 짓밟아 살아남을까만을 궁리하는 곳이 바로 강제수용소라는 공간이다. 거기서 피콜로는 레비에게 ‘아무 시라도 좋으니 읽어주지 않겠느냐?’고 말한다. 시 낭독을 부탁받았지만 수용소엔 당연히 책 같은 것이 없으므로 기억하고 있던 시를 읊조리는고 있는데, 이때 레비의 뇌리에 단테(Alighieri Dante)의 『신곡』에 나오는 ‘오디세우스의 노래’가 불현듯 스친다.
그리하여 나는 조그만 배 한 척을 얻어
언제나 나를 따르는 몇몇 친구들과 심연의 대양을 향해 나섰소.
스파냐와 모로코에 이르기까지 피안과 차안을 바라보고
또 사르디니아 섬과 바다에 씻기고 있는 그밖에 많은 섬들을 보았소.
인간이 더 이상 넘어가서는 안 된다고 경고하는,
헤라클레스가 세워놓은 좁은 입구 표지에 이르러서는
나와 동료들 모두 이미 늙고 어느덧 때는 늦었는데,
오른쪽으로는 세비야가 멀어지고 왼쪽으로는 벌써 세타가 보이지 않게 되었소.
난 이렇게 말했소.
‘아, 온갖 위험을 무릅쓰고 세상의 서쪽 끝에 다다른 형제들이여!
그대들은 태양을 좇아
얼마 남지 않은 짧은 오관을 각성하며,
사람 살지 않는 세상을 탐색하려는 마음 버리지 말지어다.
그대들은 자신의 타고난 기원을 기억하라.
그대들은 짐승 같은 삶을 살기 위해서가 아니라 덕과 지식을 구하기 위하여 태어났나니.’
동료들은 나의 이 짧은 연설을 듣고 모두가 서로 불발하며 뱃길을 앞 다투었으니,
그들을 진정시키기가 힘들 지경이었소.
요컨대 오디세우스가 지극히 험난했던 이 항해 도상에서 “이제 끝인가!”하고 생각했을 때, 우리는 짐승처럼 살아가기 위하여 태어난 것이 아니다. 덕과 지혜를 구하기 위해서 태어났다. 그것이 바로 인간이다. 그렇게 이야기한다. 그 말을 통해 피콜로에게 힘을 내라고 했던 것이다.
강제수용소의 삶은 우리가 쉽게 느끼기에도 “인간다움”이 결여되어 있는 삶이다. 혹은, 영화 이퀼리브리엄(Equilibrium, 2002)에서 나타나는 ‘모든 감정이 통제되는 미래도시’ 역시 우리에게는 너무나 ‘인간다움’이 결여되어 있는 곳으로 느껴진다. 이는 즉 우리가 ‘인간다움’을 생각할 때 그것은 상당히 이상적이며, 강제와 통제로 우리의 덕과 지혜가 제한되거나 살인을 서슴없이 저지르는 비윤리적인 모습, 감성이 억압되지만 이성으로 질서정연한 인간의 모습까지도 그것이 진정 인간답다고 느끼지 못한다는 것이다.
* 2009년에 <철학적 인간학>을 수강하며 작성한 글을 블로그에 맞게 수정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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