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크라테스'에 해당되는 글 4건

  1. 2015.10.10 플라톤 향연, 에로스를 사유하다
  2. 2015.10.02 플라톤 향연 (199c~201e)
  3. 2015.09.25 플라톤 향연 (172a~178a)
  4. 2015.09.05 인간이란 무엇인가? (2)

2009년 서양철학사를 수강하며 플라톤 향연에 대해 작성한 발제문을 정리한 것입니다. 



Platon : SYMPOSIUM



 델포이의 아폴론 신전 현관 기둥에 새겨졌다는 너 자신을 알라라는 말로 우리에게 친숙히 다가오는 소크라테스는 평소 스스로 무지를 자처하며, 인간들 가운데 가장 지혜로운 자는 앎에 관한 한 자신은 아무것도 아님을 아는 자라는 철학을 펼쳐나간 인물이다. 그런 그가 향연에서 예외적으로 에로스에 관한 것 외에는 아무것도 모른다, 즉 에로스에 관해서는 안다고 피력한 바 있다(177d). 이것은 과연 모순된 발언일까? 나는 그렇지 않다고 본다.


 『향연에서 소크라테스와 디오티마의 논의를 보면, 에로스는 다른 것, 자신에게 없는 어떤 것과 관계를 맺는 가운데 존재하기 때문에 신이 될 수 없으므로 다이몬에 지나지 않으며, 그것은 인간과 신의 중간적 존재, 불멸과 필멸의 중간적 존재이자 중개자, 매개자의 입장을 취한다. 다른 한편으로 지혜를 추구하는 사람들은 지자도 아니고 무지한 자도 아닌 중간적 존재다. , 자기가 무지하다는 것을 자각하며, 지혜를 추구하고 사랑하는 사람인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예외적으로 에로스에 관해서는 안다고 말한 소크라테스는 결국 평소와 다름없이 자신이 무지하다고 말하고 있는 셈이 된다. 요컨대, 에로스로 표명되는 무지의 자각은 신이 아닌 인간이 완전한 지혜를 얻지 못하지만 끊임없이 추구할 수 있는 가능성을 지닌, 비극과 희극이 동시에 공존한다.


 『향연에서 아리스토파네스의 이야기 역시 이 비극과 희극은 동시에 공존한다. 그는 완전함을 상징하는 원의 형태를 띠고 있던 인간이 대단한 힘과 능력으로 신에게 대들었고, 그로 인해 인간이 신에 의해 반으로 나뉘어졌다고 말한다. 그리고 잃어버린 예전의 전체에 대한 욕망과 노력을 에로스라고 정의한다. 이는 인간이 현 상태는 완전하지 않는 비극적 요소를 지니고 있는 동시에 완전함에 대한 가능성을 제시한다는 희극적 요소(에로스) 역시 존재한다는 점에서 앞의 논의와 비슷한 측면을 지니고 있다. 나는 이러한 점이 소크라테스가 향연이 끝난 새벽에 아리스토파네스에게 희극을 쓸 줄 아는 것과 비극을 쓸 줄 아는 것이 동일한 사람에게 속할 수 있다는 것을 말한(223d) 까닭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소크라테스의 연설을 들은 다른 모든 이들이 그의 연설에 모두 동의하는 모습을 취했을 때 아리스토파네스가 그에 대해 반박하려 했듯이(212c), 둘 사이에는 큰 간극이 있다. 비록 둘 모두 에로스를 욕구로 정의하고 있지만, 아리스토파네스 연설 속에서 이 욕구는 완전함에 대한 회복으로 회귀적인 성격을 지닌 반면, 소크라테스의 연설 속에서는 지속적인 상승의 노력으로 분출한다.


 즉, 아리스토파네스에게 있어 인간 불완전의 결여가 잃어버린 자신의 반쪽이라면 소크라테스에게 있어서는 아름다움이며, 에로스는 그 자체로 아름다운 것을 수직적으로 추구하게 된다. 말하자면 아리스토파네스의 딸꾹질이 고통에서부터 딸꾹질 이전으로의 회복되는 과정을 그린다면, 소크라테스 연설은 자신이 지니지 못한 아름다움, 좋음으로 향하는 과정을 그린다.


 소크라테스는 아리스토파네스를 의식하여, 사랑하는 자는 자신과 같은 것을 찾는 자가 아니며, 자신의 손과 발이 자신에게 해로운 것이라 생각될 때 자신의 것일지라도 잘라내 버리려고 하듯이, 오직 좋음을 추구한다고 말한다(205d-206a). 그런데 아리스토파네스는 좋음과 같은 도덕적 문제들에 대한 언급이 없기에 이에 취약한 약점을 지닌다. 그에게 도덕성의 문제는 인간과 신과의 관계 회복이라는 종교 문제와 연관 짓는 것에서 끝나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소크라테스와 아리스토파네스 에로스에 관한 논의는 사실 성 자체보다 다양한 인간관계의 정신적 특징 혹은 사회의 기능으로 파악하는 데 중점을 두었다는 한계를 지니고 있다고 생각된다. 성해방운동가들이 성적인(sexual) 것과 생식적인(genital) 것을 분류하는 바를 따르자면, 이들은 성적인 것 자체의 중요성보다도 생식적인 부분을 많은 부분에서 언급한 것이다.


 그런 부분에서 가장 소란스럽게 향연에 등장하는 알키비아데스가 이들에 대해 언성을 높일 수 있는 여지가 있다. 실제로 그는 자신을 성적으로 상대하려 하지 않는 소크라테스에게 큰 불만을 토로하고 있다. 하나로부터 둘로 둘에서 다시 모든 아름다운 몸으로, 몸에서 영혼의 아름다움 등으로의 아름다움 자체에 도달하는 소크라테스의 에로스에서는 물론 하나 역시 소홀히 해서는 안 되지만 사랑과도 같이 정열적으로 그 하나에만 전념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이것은 사실 성을 연구하는 현대의 학자들에게는 매우 중요한 문제가 된다. 우리는 소크라테스와 같이 모두를 사랑하고, 모두에게 사랑받는 자에게 알키비아데스처럼 성적 수치심을 느끼기 때문이다. 그것은 자신의 남편이 모든 여자들에게 잘해주지를 않기를 바라는 것과 같다. 그리고 누구나 알키비아데스처럼 이성이 자신의 성적 매력에 이끌려 성 행위를 하기를 원하지, 소크라테스와 같은 사람은 자칫 자기에게 동정을 베푼다는 생각을 하기 쉽다.


 아리스토파네스와 소크라테스의 이야기가 비슷한 구조를 가지면서도 차이를 지녀 플라톤의 철학이 잘 표현된다고 말한다면, 알키비아데스의 이야기는 플라톤의 철학을 풍부하게 만드는 요소라 말할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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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서양철학사를 수강하며 플라톤 향연에 대해 작성한 발제문을 정리한 것입니다. 



Platon : SYMPOSIUM

e peri erotos, ethicus, 199c~201e


 

. 소크라테스와 아가톤의 예비 논의

 

- 소크라테스는 아가톤에게 몇 가지 작은 질문을 하는 것을 허락해줄 것을 요청(199b)

- 아카톤의 동의에 근거하여 설명을 진행 (문답법)

- 문답법 : 소크라테스적인 문답법은 참인 것을 주장함으로써가 아니라 응답자가 알고 있다고 동의하는 것을 가정함으로써 진행하는 것이 특징. 논박(elengkos)은 문답법의 중요한 부분이며 귀류법적인 성격을 지님.

- 소크라테스는 아가톤을 앎에 대한 거짓된 자신감에서 벗어나게 함. 마침내 그는 자신이 말했던 것들에 대해서 전혀 알지 못한다고 고백.(201b)

 

아름답지 않은 에로스

 

1. 관계 개념으로서의 에로스

 

에로스는 특정 대상을 사랑하는 것인지, 아니면 아무것도 아닌 것을 사랑하는 것인가?’에 대해 답해보게나. 내가 묻고자 하는 것은 에로스가 특정의 어머니나 아버지에 대한 사랑인지를 묻는 것이 아니라, 예를 들어 아버지 자체에 대하여 아버지는 특정인의 아버지인가 아니면 그렇지 않은가를 묻는 것이라네. (199c-d)

 

- 플라톤은 어머니나 아버지가 반드시 누군가의 어머니와 아버지이듯이 에로스 역시 언제나 무엇인가에 대한에로스임을 말하고 있다.

- ‘아버지형제라는 말은 언제나 누구의아버지, 또는 누구의형제인 한에서만 의미를 갖는데, 에로스도 바로 그런 의미에서 어떤 것의에로스이다.

- 에로스는 어떤 특정한 에로스가 아니라 에로스인 한에서의 모든 에로스이다. (아버지 자체)

 

2. 욕망으로서의 에로스

 

어떤 것을 욕구하는 다른 모든 사람들은 자신에게 있지 않은 것 즉 자신이 갖고 있지 않은 것을 갈구하는 셈이니, 결국 자신이 갖고 있지 않으나 본인이 필요로 하는 것, 바로 그러한 것들에 대해서만 욕망과 사랑은 존재한다고 할 수 있네. (200e)

 

- ‘어떤 것의 에로스라고 할 때 그 어떤 것은 에로스가 욕망하는 대상으로서의 어떤 것.

- 그런데 아무도 자신이 이미 가지고 있는 것을 욕망하지 않으며 이미 가지고 있는 것을 바란다고 할지라도 그것은 나중에도 계속 가지고 있기를 바라는 것.

- 따라서 어떤 것의 에로스아직 가지고 있지 않은 것(결여하고 있는 것)에 대한 사랑

 

3. 아름다운 것을 결여한 에로스

 

그렇다면 에로스는 자신에게 결여된 것 즉 갖고 있지 않는 것을 사랑하는 게 아니겠는가?”

그렇습니다.”

결국 에로스는 아름다움이 결여되어 있고, 그것을 갖고 있지 않은 셈이 되나?

필연적으로 그렇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되나! 자네는 아름다움이 결여된 그것을 전혀 소유하고 있지 못한 자를 아름답다고 주장하는가?”

절대로 그렇지는 않습니다.”

그렇다면 논의가 이렇게 전개되었는데도 불구하고 자네는 여전히 에로스가 아름답다고 주장할 것인가?”(201b)

 

생각해보기

- 아름다움을 향한 욕망에 사로잡힌 정신 (참고문헌 : 김상봉, 나르시스의 꿈, 한길사, 2002, pp.39-66)

 

에로스는 성적인 욕망, 혹은 이것이 동반된 사랑을 뜻하는 말인데 그것은 인간의 가장 원초적인 욕망과 거기서 뿌리박고 있는 정념으로서의 연애감정을 가리키는 말이었다. 그런데 플라톤은 이 에로스에 대해 상당히 부정적이었다. 그것은 수치와 사려를 알지 못하는 한낱 맹목적인 충동에 지나지 않은 것이어서(571c), 성욕에 사로잡힌 것은 술에 만취된 상태나 미친 상태와 마찬가지로(573c) 무정부적이고 무법적인 상태에 떨어지는 것(515a)이라고 보았다. 루소(J.J.Rosousseau) 역시 이와 비슷하게 묘사한다.

 

만일 이 억제력이 없는 난폭한 격정에 사로잡혀 부끄러움도 조심성도 없이 날마다 자기 피를 흘리더라도 사랑의 쟁탈전을 벌인다면, 인간은 도대체 어떻게 될 것인가? (루소, 최석기 역, 인간불평등기원론/사회계약론(동서문화사, 2007), 59)

 

그런데 우리가 앞서 살펴봤듯이, 에로스는 욕망의 대상에 대한 지향이다. 그리고 플라톤의 견해에 따르면 그 욕망의 대상은 아름다운 것이다. 그렇기에 에로스란 한 갓 육체적 충동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아름다운 사람과 상태를 꿈꾸는 심미적 동경으로 발생하게 된다. 그것은 감성적 충동을 넘어가는 어떤 것, 즉 에로스 속의 어떤 정신적 가치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루소 역시 똑같은 방식으로 에로스의 육체적 계기와 정신적 계기를 구분한다.

 

처음에 연애감정 중에서 정신적인 것과 육체적인 것을 구별하자. 육체적인 것이란 이성끼리 서로 맺어지게 하는 일반적인 욕구이다. 정신적인 것이란 그 욕구를 결정하여 그것을 단 하나의 대상에 고정시키거나 적어도 그 선정된 대상을 위해 한층 고도의 정력을 그 욕망에 쏟는 일이다. (같은 책, 같은 쪽)

 

따라서 에로스를 가리켜 플라톤이 아름다움에 대한 선망이라 규정할 때, 그는 에로스를 자기 속에 정신적 동경을 품은 육체적 욕망으로 이해하는 것이며, 그것의 본질을 의식의 감성적 차원으로부터 지성적 차원으로의 이행 속에서 또는 그 두 지평의 매개 속에서 파악하는 것이기도 하다. 이와 같은 한에서, 에로스는 억압되고 통제되어야 할 야수적 충동이 아니라, 도리어 인간의 영혼을 감성적 직접성으로부터 지성적 깨달음으로 인도하는 도야의 원리이다.

 

. 소크라테스와 디오티마와의 대화에 대한 이야기

 

- 소크라테스는 문답식 논증을 계속하고 싶어 하지 않는다.(201c)

- 소크라테스는 디오티마라는 인물을 소개하고 그녀와의 대화를 전하는 방식으로 논의를 전개

- 디오티마는 소크라테스의 역할을 대신하고, 소크라테스는 아가톤을 대신

- 디오티마는 허구적 인물로 여겨짐, 211a-e에서 내놓는 형상 이론은 플라톤의 것이지 소크라테스의 것은 아니기에 소크라테스가 디오티마로부터 그것을 배웠다는 것은 그럴듯하지 않음.

 

플라톤이 디오티마를 소크라테스의 대역으로 설정한 이유는 무엇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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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서양철학사를 수강하며 플라톤 향연에 대해 작성한 발제문을 정리한 것입니다. 



Platon : SYMPOSIUM

e peri erotos, ethicus, 172a~178a



(도입부의 이야기 전달 관련 인물)

 

아폴로도로스(Apollodoros)

이 대화편에서 동료들에게 향연 이야기를 들려주는 사람. 아테네 팔레론 사람(172a, 파이돈59b)으로 소크라테스를 마음 깊이 경모한 정열적인 제자(173b, 파이돈59a, 크세노폰 소크라테스의 변론(28), 크세노폰 소크라테스의 추억311). 감수성이 예민하고 격정적 성격의 소유자(173 e). 소크라테스의 사형을 눈앞에 두고 통곡했다는 기록도 (파이돈117d) 그러한 성격을 보여준다. 소크라테스 재판시에는, 플라톤, 크리톤과 함께 스승을 위해 30므나의 벌금을 납부하는 보증인이 되기도 하였다(소크라테스의 변론38b).

 

글라우콘(Glaukon)

아폴로도로스의 친구. 플라톤의 외삼촌인 카르미데스의 아버지(222b)도 같은 이름이며, 국가에 나오는 플라톤의 형제도 같은 이름이다. 이 대화편의 언급(172c)만으로는 어느 글라우콘인지 확정하기 어렵고, 3의 인물일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포이닉스(phoinix)

이 대화편에서의 언급(172b) 외에는 알려져 있지 않은 인물.

 

아리스토데모스(Aristodemos)

아테네의 퀴다테나이온 출신 아폴로도로스와 포이닉스에게 향연 이야기를 전해준 사람. 이 대화편에서 그는 작달막하고 늘 맨발로 나다니는 사람으로 소크라테스와 함께 향연 모임에 직접 참석한 것으로 묘사된다. 아폴로도로스와 달리 오래전부터 소크라테스의 제자였으며 그것도 가장 열렬한 추종자 중 한사람이었다(173b).

 

1. (172a~174a)아폴로도로스가 전하는 향연 이야기 [이야기의 전달 과정]

 

전달과정의 복잡성(거리두기172b, 이야기 내용의 중요성173b)

[참고문헌 : 강상진, 플라톤 향연의 틀 이야기독특한 거리두기, 한국서양고전학회, 서양고전학연구15, 2000, pp.25-46]

 

- 향연에 관한 구두전달의 연쇄(172b)는 향연이 이렇듯 여러 입을 거치고 있다는 사실로부터 향연과 거기서 행해진 연설에 상당한 무게를 더해줌

- 오랜 세월이 흐른 후(173a) 계속 인구에 회자되고 있는 일은 그 향연이 실제로 벌어졌던 순간을 넘어서는 의미를 가질 때 보통 일어나기 때문에 중요[H.Reynen, "Der vernittelte Bericht im Platonisehen Symposion." in: Gymnasium 74 (1967), 415.]

- 여러 입을 거치고 있다는 사실은 보고의 정확성에 의문을 제기할 수 있지만 아폴로도로스는 최근 글라우콘에게 한번 향연에 관한 얘기를 했으므로 준비가 되어있음. 소크라테스의 확인(173b)

거리두기(대화, 틀이야기 구성)의 단순히 문학적 의미, 철학적 의미를 생각해보자

아폴로도로스는 에로스와 소크라테스의 에로스와 비교해보고, 왜 아폴로도로스가 이야기의 전달자인지 생각해보자

 

2. (174a~175e)아리스토데모스의 서언 [향연 이야기의 시작 부분]

[참고문헌 : 이강서, 플라톤 철학의 아폴론적 계기와 디오니소스적 계기, 박희영 외 지음, 플라톤 철학과 그 영향, 서광사(2001), pp.39~64]

 

디오니소스와 향연

- 일반적으로 향연이 진행되는 동안 손님들에게 음식은 제공되지 않음. 향연에 앞서 식사를 하지만 특정한 정화 행위를 통해 향연과 분명히 나누어짐(175e~176a)

- 포도주를 마시는 일은 향연에서만 이루어지며 이는 명백히 종교적인 성격의 것으로 포도주의 신 디오니소스와 연관

- 향연에서 에로스를 두고 행해진 연설들은 일종의 연설 경연, 연설 시합의 형태로 이루어짐. 부르크하르트(J. Burckhardt)는 그리스 사람들을 경쟁하는 사람들’(agonale Menschen)로 특징짓고, 베르베(H. Berve)그리스인의 경쟁심’(agonale Geist der Griechen)이라고 표현, 니체도 그리스 문화의 원동력을 경쟁심’(agonaler Geist)에서 찾음[W.Brukert, Greek Religion, 105~107('agon') : 차하순, 정동호 부르크하르트와 니체(서강대 출판부, 1986), 213~218(‘그리스인의 삶 속에 있던 경쟁자적 성향’]

- 향연의 연설 시합은 또 한가지 점에서 디오니소스와 관계를 맺음(175e)

- 헬라스 사회의 향연에서의 성행위 : 주연의 규칙, 그러나 깨짐

 

디오니소스와 에로스의 연관점은 어디에 있을까 생각해보자

소크라테스가 신발을 신은 이유, 초대받지 않은 아리스토데모스의 향연 참석, 소크라테스의 명상 등의 의미를 찾아보자

 

3. (177a~178a)에릭시마코스의 연설 주제 제안

[참고문헌 : 김인곤, 플라톤 향연, 서울대학교 철학사상연구소,철학사상별책 제5권 제4(2005) ]

 

찬양 연설의 형식

- 찬양 연설은 고대의 모범적인 수사술의 한 형식. 이 연설 형식의 지침은 기원전 300년경의 수사술 논문에 들어 있다. 그리고 향연에서의 찬양은 분명히 이 형식을 따른다. 찬양이 포함해야 할 내용은 이런 것이다. 찬양대상의 기원 또는 혈통(계보), 또는 고귀한 출생(가문). 힘이나 아름다움 같은 좋은 자질. 지혜, 정의, 용기와 같은 덕(뛰어남)과 명성을 얻는 행위. 생활 습관이나 방식. 다른 사람들의 업적과 대조되는 업적들. 그리고 이 연설은 신과 숭배자 간의 관계의 적절한 형태가 호혜 관계, 즉 신을 숭배하고 신으로부터 은혜를 입는 관계임을 전제한다.(Gill, 1999, 20)

 

우리가 보통 알고 있는 소크라테스의 대화법은 주제에 관해서 어떤 적극적인 대답을 내 놓는 대신에 스스로 무지(無知)를 자처하면서 상대방이 가진 의견의 불충분함과 한계를 폭로하고는 것으로 끝난다. 그런데 여기서의 소크라테스는 좀 다르다. 유독 에로스에 관해서(ta erōika)만은 알고 있다고 말한다.(177d) 무엇을 의미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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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이란 무엇인가? (2)

 저번 글에서는 인간이란 무엇인가라고 묻는 질문이 갖는 의미를 다루었다. 인간다움의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에 따라서 세계를 어떻게 바라보고 어떻게 변화시켜야 되는지가 결정되는데, 우리는 인간의 다양한 속성들을 나열하기보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원하고 바람직하다고 생각하는 인간상에 대해 다루기로 하였다.

 예컨대 우리는 살인을 서슴없이 저지르는 사람 역시도 인간이라 정의라 내리고 있으며 현상 세계에 존재하는 인간이기는 하지만, 우리는 흔히 그런 사람은 인간도 아니다라고 언급을 하며 살인의 행위를 인간다움과 부정적 관계에 있는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그런가 하면, 우리는 인간의 감정이 통제되는 미래 도시를 다룬 영화 이퀼리브리엄(Equilibrium, 2002)을 보고, 그 도시가 바람직한 인간과 사회 모습이 아니라고 생각할 수 있다.

 앞으로는 인간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의 의의를 넘어서 그에 대한 필자의 생각을 전개 할 것이다. 사실 필자는 이에 관해서 많은 부분을 에리히 프롬(Erich Fromm, 1900~1980)에 의존하고 있으나, 필자는 단순히 에리히 프롬의 여러 도서들의 내용을 요약하고 설명하기보다는 인간에 대한 그와 같은 사고가 사회 변화에 구체적으로 어떤 영향을 줄 수 있는지에 대해 필자의 생각을 피력할 것이다. 그리고 원문의 내용을 정확히 인용하며 전달하는데 집중하기 보다는 우선 전체적으로 틀을 먼저 그려보는 시간을 가질 것이다.

 그동안 배웠던 서양 철학을 보면 구체와 추상에 관한 형이상학에 대해 많은 부분을 할애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것은 이성이라는 인간의 특이한 능력으로부터 사고 가능한 것일 텐데, 필자가 보기에는 이와 같은 부분이 인간의 여러 특징들을 규정지으며, 사회학에서 다룰 법한 사회의 여러 법칙들과도 관련이 있는 것 같다.

 인간은 구체적인 'a1, a2, a3, a4....'를 통해서 추상적인 ‘A'를 사고 할 수 있는데, 예를 들어 우리가 경험적으로 여러 모습의 까마귀들을 보고 그것을 통틀어 까마귀라고 정의내리는 것이다. 이것은 인간 특유의 이성과 언어에 의해 작용되는 것으로써 반대로 우리는 구체적인 까마귀 사진 한 장을 보더라도 다음에 실제로 까마귀를 보았을 때 우리는 그것을 까마귀라 부를 수 있다물론 까마귀와 비슷한 새를 보고 그것을 까마귀라 부르는 잘못된 판단을 내릴 수 있다. 우리는 더 나아가 까마귀를 더 추상적으로 새, 동물로 규정지을 수 있다 이러한 것들이 단순히 언어에 지나지 않을 수 있지만, 이에 대해 사고를 하는 것은 상당히 복잡한 문제이므로 다음으로 미루겠다. 우리는 구체적인 'a1, a2, a3, a4...'들을 각각 분리시켜 사고하기도 하는데 사실 현실 세계에서는 모든 사물이 변화하는 세계에 있기 때문 개별 'a1, a2, a3, a4들은 각기 서로 다른 것이기도 하므로이기도 하다.

 인간 역시 구체적이고 개별적인 현실의 여러 인간들이 있는데 철수도 있고 영희도 있고, 이러한 사고가 가능하다는 것은 인간이 서로 분리되어 있으며, 그것을 인식할 수 있다는 것을 입증한다. , 이성은 분리되어있는 실재로서의 자기를 인식할 수 있게 한다.

 그래서 우리는 불안감을 느낀다. 뿐만 아니라 현실 세계는 인간의 이성으로 인식하는 질서를 넘어서서 비결정적이고 불확실하며 개방적이다. 이러한 우주에 우리는 던져져 있으며 우리는 계속 낯설음을 느끼고 불안해하며 이성을 이용해 우주의 질서를 파악하고자 한다. 법칙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인간은 불안을 느끼며 법칙이 지배하고 법칙을 아는 자가 세계를 통제, 지배(세계에 대한 적극적 행위)가 가능하다는 신념을 가지고 있다. 신화, 형이상학, 과학으로의 그동안 인류의 학문의 발전을 보았을 때, 그것을 세속화라고 규정짓는 여러 학자들을 보았을 때 우리와 같이 학문을 하고 있는 사람들은 더욱 쉽게 위의 논증을 이해할 수 있다.

 따라서 인간의 절실한 욕구는 이러한 분리상태를 극복하고자 하는 것이다. 이것은 다양하게 이루어지는데, 동물숭배, 인간의 희생 또는 군사적 정복, 사치에의 탐닉, 금욕적인 관념, 강제노동, 예술적 사랑, 신의 사랑, 인간의 사랑, 독제체제, 도취적 합일(마약, 성적 행위), 집단과의 일치에 바탕을 둔 합일 등이 이루어진다. 차이를 제거하고 추상적 동일성을 찾으려는 노력은 학문에서 뿐만 아니라, 우리의 일상생활에서도, 화폐라는 가장 지배적인 추상이 등장하는 자본주의 사회 전체에서도 일어난다.

 인간에 대한 이와 같은 이해는 사회에 어떻게 작용 될까? 인간은 역사가 흘러가면서 노동이 분업화 되고, 군사 공동체가 형성이 되면서 인간은 더욱더 분리되고 그와 동시에 추상적으로 되어버렸다. 현 자본주의 사회를 보면, 구체적 노동과 화폐로 드러나는 추상적 일반 노동이 분리되는 것과 동시에 추상적으로 동일하며노동을 하는 인간 역시 마찬가지이다군사적 물리력을 독점하는 각 국가의 정부의 추상적 힘과 군사력의 기반인 일반 시민들의 구체성의 힘은 대립과 동시에 동일성을 갖추고 있다. 이런 구체와 추상의 아이러니한 관계에 대해 우리는 굳이 존재론적인 질문인 있는 것은 있고, 없는 것은 없다라는 말을 여기서 굳이 언급할 필요까지는 없다나는 뛰어난 철학자 헤겔이 아니므로….―

 현 자본주의 사회만큼은 아니더라도, 노동의 분업화가 어느 정도 이루어지기 시작한 사회에서 그것을 바라보았던 플라톤의 이론들, 그의 수많은 제자들, 분리되어 있는 개인들이 사회를 구성하는 방식을 논하는 사회계약론자들, 원자화된 개인들이 지배적인 사회를 비판하는 자들, 동양사회의 유교 재발견하려는 사람들을 보면서 필자는 위에서 기술한 사고를 정립하고 확신해 갔다.

 그런데 애초에 인간을 분리와 결합, 구체와 추상으로 바라보지 않고 분리만을 강조하는 근대와 현대의 여러 시도들은 나와 전혀 다른 사회를 구상해 왔다. 이기적 개인들의 도덕적 가치를우리가 더 이상 도덕적으로 논할 필요가 없게 하기 위해, 왜냐하면 그것은 현대에 와서는 파악이 힘들다고 외치기 때문에 너무나 힘든 작업일 뿐만 아니라, 도덕자들이 아무리 사회에 덕을 강조해도 군주나 일반 시민들은 그와 다른 행동을 일삼었으므로각자의 이해관계에 맞추는 사회를 그리며 자본주의를 찬양한다. , 분리된 개인의 이기심이 모였을 때 아이러니하게도 사회 전체에는 이타적인 행위의 결과물이 등장한다는 사고방식아담 스미스가 가장 대표적이다이 현 사회에 지배적 영향을 미치고 있는 것이다.

 이제 서양 철학에서 인간의 이성의 능력을 강조하는 것이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는지 자세히물론, 여기서는 자세한 인용은 다음으로 미루고논의해보겠다. 필자가 보기에 서양 철학은 인간의 두 가지 특별한 능력을 중심으로 다루고 있다. 첫째가 생각할 수 있다는 것이고, 둘째는 말할 수 있다는 것이다. 사실 이 두 능력에 의해 인간이 철학할 수 있기 때문이다. 서양 철학에서 플라톤과 칸트가 생각의 힘에, 그리고 아리스토텔레스와 비트겐슈타인이 언어의 힘에 깊은 관심을 기울였다는 사실만 봐도 이 두 가지 능력을 서양 철학에서 중점으로 다루고 있다는 것을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서양 철학에서는 이 양자 간의 관계가 중요해서 언어 이전에 생각이 있느냐, 아니면 생각하기 위해 언어가 먼저 있느냐는 질문이 매우 논쟁적인 주제가 되어 있다. 물론 이 질문에 저마다 달리 답할 수는 있겠지만, 이 두 능력이 서양 철학을 이루어지는 두 가지 단계를 명확하게 보여준다는 것만큼은 분명하다. 우선 생각한다는 것은 궁극적으로 서양 철학이 개인의 자아에서 출발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생각하기 위해 언어가 필요한 건 분명하지만, 아렌트가 말하듯 생각한다는 것 자체가 그 시작에 있어서는 아주 개인적인 활동이기 때문이다. 칸트가 계몽을 세계혁명이 아니라 자아의 성숙으로 이해한 것 역시 다르지 않은 맥락일 것이다. 그리고 서양 철학은 생각을 통해 자신을 성숙하게 하는 데서 그치지 않는다. 말할 수 있다는 것은 자신의 생각을 다른 이들과 나눌 수 있다는 뜻이며, 철학이 공유될 수 있다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문제는 이러한 사고는 결국 개인으로부터 출발하고 있다는 것이다. 아렌트의 The Promise of Politics소크라테스편을 보면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다. “소크라테스가 말하고 있는 것은그리고 아리스토텔레스의 우정에 대한 이론이 더욱 자세하게 설명하고 있는 것은다른 이와 함께 산다는 일이 나와 함께 산다는 것에서 시작한다는 것이다. 소크라테스의 가르침은 바로 단지 자기 자신과 사는 법을 아는 사람만이 다른 이들과 사는 데에도 적합함을 의미한다.” 필자가 보기에는 이러한 사고방식은 그대로 이어져, 플라톤 이후의 서양 철학에서 타자와의 관계개인에서 시작한다.

 그러나 문제는 서양 고대 철학에서는 말하는 능력이 타자와의 관계를 규정짓는데, 타자는 결국 아름다움을 인식한선의 이데아개인에게 있어 타자는 설득당해야 할 대상 뿐이라는 것이다. 플라톤은 인간들의 결합 원리인 에로스를 결핍된 대상에 대한 욕망으로 보는데, 이 때문에 그는 개인의 이기심에 기초해 결합을 설명한다는 비판을 받아 왔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이와 달리 동질성이 입각한 우정을 내세웠지만, 동일하지 않는 대상소크라테스적인 표현을 하자면 자신이 무지하다는 것조차 깨닫지 못한 자들에 대해서는 배타적인 원리일 뿐이다. 따라서 서양 고대 철학에서 타자와의 관계를 말하는 능력에서 찾는 행위는 개인의 생각을 남에게 설득하는 것 이상이 아니며, 이는 이타성에 입각한 원리는 아니다.

 이러한 사실이 개인의 합리성을 강조한 수많은 플라톤의 주석들에서도 발견되는 것은 결코 놀랄만한 일이 아니다. 그것은 사회계약론자들에게서, 공동체주의자들에게서테일러의 진정한 자기애, 의사소통의 합리성을 강조하는 이들에게서 극명히 발견될 뿐만 아니라 심지어 에리히 프롬조차 이를 피해가지는 못한다. 왜냐하면 그는 이타적 사랑을 마조히즘과 구분하고자하며, 만인에 대한 보편적 사랑사해동포적 성격을 지니는을 주장했기 때문이다. 아쉽게도 개인이 보편이 되는 방법은 이성의 능력에 의지하는 길밖에 없는 듯 보인다.

 그러나 에로스는 대상에 대한 지향적inter욕망 플라톤은 향연에서 아버지가 누구의 아버지이듯이, 에로스 역시 의 에로스라고 말한 바 있다이므로 그것은 보편적 관계가 아니라 아주 특수한 관계이다. 왜 우리는 특수한 관계들의 변화와 조화, 생성, 위치변화가 거시적인 사회의 변화를 가져온다는 생각을 하지 못하는가? 우리는 생각을 잘하고, 말하는 능력이 탁월한 자들이 세상을 구상하고, 우리를 구원해주기를 진정 바라는 것인가?

 

 그동안의 논의를 정리해보도록 하겠다. 인간 세계에서는 구체적 현상과 보편적 추상이 나타나는데, 인간은 이성을 통해 이를 인식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 그런데 이러한 이성의 능력은 인간이 서로 각기 다른 존재임을, 불확실하게 보이는 이 세계와 분리되어 있다는 사고를 낳는다. 그래서 인간은 이러한 분리를 다양한 방법을 통해서 극복하고자 하는데, 그동안의 서양철학에서는 이성의 특별한 능력을 통해 인간을 보편으로 끌고 가고자 노력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이성은 결국 개인에서 출발하므로 이기심에 기초하며, 사회의 지배 이데올로기는 이 이기심이 사회를 봤을 때 보편적으로 좋은 결과를 낳는다는 생각으로 발전하기에 이르렀다. 인간에 대한 이러한 이해가 결국 이 사회의 지배적 이데올로기인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우리가 지향해야 하는 인간상을 지배적으로 제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 2009년에 <철학적 인간학>을 수강하며 작성한 글을 블로그에 맞게 수정한 것입니다.


Posted by Economist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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