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서양철학사를 수강하며 작성한 레포트를 정리한 것입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사랑(philia)과 자본주의 경제




목차

 

. 들어가는 말

. 아리스토텔레스의 사랑(philia) - 탁월성(, arete)의 일종으로서의 사랑

. 사랑은 왜 필요한가 - 사랑과 행복 그리고 윤리

. 자본주의 경제의 물상화(reification)와 사랑(philia)

. 맺음말

 

 

. 들어가는 말

 

 많은 이들은 이 글의 제목인 아리스토텔레스의 사랑(philia)과 자본주의 경제를 보고, 철학적 개념인 사랑(philia)을 경제학적으로 바라보는 것에 대해 여러 의혹들을 품을 수 있다. 그러나 경제학이라는 것이 철학적으로 이미 많이 다루어지고 있는 자본주의에 대한 분석이라는 것을 상기한다면, 내가 이 글을 통해 철학적 개념인 아리스토텔레스의 사랑(philia)을 경제학적인 방법으로 다루는 것에 대해 큰 반감을 갖지 않을 수도 있다. 왜냐하면 내가 시도하고자 하는 것은 일반적으로 경제학이라고 받아들여지고 있는 여러 수치들에 대한 고뇌가 아니라 자본주의 경제에 대한 성찰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런 성찰에 있어 단지 아리스토텔레스의 사랑(philia)의 개념을 중점적으로 다루고 있을 뿐이기 때문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사랑(philia)의 개념을 통해 자본주의를 성찰하고자 했던 그동안의 시도들은 아리스토텔레스가 유익함을 이유로 하는 사랑(philia)이 불완전하다고 했던 것에 주로 기초하여 논의를 진행해왔다. , 경제적 이익의 동기로 친분을 쌓고자 노력하는 현대인들을 비판할 수 있는 근거가 되어왔었다.


 이런 협소한 수준을 넘어서는 보통 인격적 사랑의 개념으로 사용되어 현대 자본주의 사회의 인간관을 비판해왔었다. 여기서 사랑(philia), phila는 좁은 의미에서의 우정뿐만이 아니라 보다 넓은 의미에서의 우정으로 파악될 수 있는 정신-인격적 사랑으로 이해되고 있다.[각주:1] 이는 앞의 논지를 발전시킨 것이다. , 자본주의 사회에서 경제적 이익을 바탕으로 하는 인간관계가 지배적인 것을 비판하고 정신-인격적인 관계를 주장하는 것이다.


 나는 이런 방식으로 그동안 시도되어 왔던 것을 여기서 다시 반복하고자 하지 않는다. 그러한 논의들은 분명히 충분한 가치가 있지만, 왜 자본주의 경제에서는 유독 경제적 이익을 이유로 하는 사랑이 지배적인지에 대한 경제 사회구조적인 이해가 결여되어 있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아리스토텔레스의 사랑(philia) 개념을 깊이 있게 다루고 있지 않다. 따라서 나는 이 글을 통해 아리스토텔레스의 사랑(philia) 개념을 중점적으로 살피며, 자본주의 경제 사회에서 인간관계가 왜 그렇게 피상적이며 경제적 이익을 근거로 하여 성립하게 되는지에 대한 분석을 시도할 것이다.


 이 글의 순서는 다음과 같다. 먼저 아리스토텔레스의 사랑(philia)을 분석하면서 아리스토텔레스의 사랑(philia)이 탁월성의 일종으로서의 사랑이며, 그것이 윤리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다는 것을 논할 것이다. 그리고 자본주의 경제에서 윤리적인 삶이 시행되기 어려운 이유, 즉 사랑(philia)이 실현되기 힘든 원인을 물상화(reification)를 가지고 설명할 것이다. 이러한 글의 구조는 단순히 아리스토텔레스의 사랑(philia)을 논하며, 이러한 철학적 개념이 현실에 실현되기를 단순히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자본주의 경제의 문제점들이 극복되어야지만 사랑이 실현될 수 있고 윤리적인 삶을 살 수 있다는 것을 밝히는 데에 있다. , 이 글은 아리스토텔레스의 힘을 빌려 자본주의 경제를 비판하기 위한 시도이다.

 

 

 

. 아리스토텔레스의 사랑(philia) - 탁월성(, arete)의 일종으로서의 사랑

 

 ‘philia’는 주로 우정, 사랑으로 번역되는데, 우리의 어감에는 친구가 될 수 없는 선후배나 부모자식을 포함할 수 있는 관계에 있기 때문에 우리가 일반적으로 인식하는 우정과 다소 차이가 있다. 또 성적인 사랑(eros)과도 다른 의미를 지니고 있기 때문에, 아리스토텔레스에 있어 ‘philia’가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는지 먼저 살펴볼 필요가 있다.

 

 사랑(philia)은 일종의 탁월성(arete)이거나 혹은 탁월성을 수반하는 것이다.(EN 81155a3-4)

 

 아리스토텔레스는 니코마코스 윤리학2권에서 탁월성에 관한 일반적 설명 이후, 개별적 탁월성을 열거하면서 사랑(philia)을 인간관계에서 놀이 이외의 일상적 삶에 공유되는 즐거움과 관련한 중용의 품성상태로 정의하였다.[각주:2] 여기서 인간관계는 부모자식이나 형제지간과 같은 가족 관계부터 시작하여 정치적 공동체에 소속된 동료 시민까지의 범위를 포함하는 넓은 의미의 인간관계이다.


 사랑은 일종의 탁월성이기에 탁월성의 구별과 같은 방법으로, 활동으로서의 사랑과 품성상태로서의 사랑으로 구별된다.[각주:3] 품성상태는 상응하는 활동(들의 반복)에서 생기는데, 이는 올바른 행위의 반복에서 올바른 품성상태가 생긴다.[각주:4] ,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있어 진정한 의미의 사랑은 중용에 따른 올바른 활동에 의해 형성된 품성상태이다.


 이러한 탁월성에 기초한 사랑은 유익이나 즐거움과 같이 상대방에게 우연적으로 속하는 것에 의해 성립한 것이 아니다. 유익이나 즐거움과 달리 상대방 자체의 좋음에 의해 성립한 것이며, 유익이나 즐거움 때문에 생긴 사랑은 더 이상 유익과 즐거움을 주지 못하면 사랑이 멈추는 것[각주:5]과 달리 탁월성이 지속적인 것과 마찬가지로 탁월성에 기초한 사랑은 유지된다. 좋음에 의한 사랑은 더불어 유익과 즐거움을 준다.[각주:6] 따라서 이것이 가장 완전한 사랑이다.

이렇게 아리스토텔레스에 있어 사랑(philia)은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할 수 있는 연애의 감정이나 우정과 다른 개념이다. 그가 가장 좋은 사랑을 탁월성과 관련지어 생각해본 것 역시 우리가 쉽게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다. 더불어 ‘philia’가 인격적인 사랑으로 받아들여지고 있지만, 사실 상대방 그 자체를 전인격적으로 바라보기보다는 상대방의 탁월성에 기초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 전체적 인격 그 자체를 사랑했다기보다는 선함, 고귀함을 사랑한 것처럼 보인다.


 사랑이 탁월성과 결부되어 다소 딱딱하게 보이는 이유는 다음과 같다. 서로 호의를 가지고 있고, 상대방이 잘 되기를 혹은 훌륭하기를 바라며, 또 그런 호의나 바람이 서로에게 알려져 있는, 그런 사람들의 관계가 사랑이다. 그런데 서로가 잘 되기를 바라는 것은 서로가 좋은 사람인 한에서 바란다. 나쁜 사람은 자신들에게 좋아 보이는 것 대신, 실제로는 해가 되지만 즐거운 것을 선택[각주:7]하지만 훌륭한 사람은 자신에게 좋음과 그렇게 보이는 것을 바라며 실제로 행하고 사랑하는 사람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이다. 모든 지성(nous)은 자신에게 최선의 것을 선택하며, 훌륭한 사람은 그 지성의 설득에 복종하기 때문이다.[각주:8] 따라서 사랑에는 탁월성이 결부되었고, 영혼의 지속적인 상태로서의 탁월성은 순간적인 감정과 구별되기에 사랑 역시 감정으로 바라보지 않았기 때문에[각주:9] 우리에게 다소 메마르게 다가올 수 있다.

 

 

 

. 사랑(philia)은 왜 필요한가 - 사랑과 행복 그리고 윤리


 이제 서로를 이용하지 않는 진정한 사랑은 탁월성을 이유로 하는 좋은 사람들 사이에서만 가능하다.[각주:10] 그런데 좋은 사람들은 그들 모두 자기 충족적이기 때문에 상대방을 필요로 하지 않기 때문에 사랑은 불가능하게 된다. 아리스토텔레스 역시 행복을 그것만으로 삶을 선택할 만한 것으로 그리고 아무것도 부족함이 없게끔 만드는 자족적인 목적으로 바라보았기 때문에 사랑과 행복을 연결하는데 있어 난관에 봉착할 수 있다.

 

 행복한 사람이 친구를 필요로 하는지 그렇지 않은지에 관해서도 쟁론이 있다. 어떤 사람들은 지복의 경지에 있으며 자족적인 사람들에게는 친구가 필요하지 않다고 주장한다. 그들은 이미 좋음을 가지고 있으며 자족적인 만큼 그 어떤 것도 추가적으로 필요로 하지 않다. 그런데 친구는 원래자신과는 다른 타인으로서 본인 스스로는 할 수 없는 것을 공급하는 사람이니 말이다. (EN 99, 1169b3-22)

 

 플라톤은 그가 썼던 뤼시스(Lysis)을 보면, 아리스토텔레스가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자족적인 사람들에게는 친구가 필요하지 않다고 주장했던 사람이다. 훌륭한 자끼리는 그들이 비슷한 한에서는 서로에게 아무런 도움이나 해를 줄 수 없고 따라서 서로를 존중할 수 없다. 또 그들이 훌륭한 한에서는자족적이며, 그래서 서로를 전혀 필요로 하지 않으며, 따라서 서로를 존중할 수 없다. 훌륭한 사람들이 공유하는 비슷함과 훌륭함 둘 중 어느 측면에서도 훌륭한 자끼리는 서소를 존중하지 않을 것이고, 따라서 서로를 사랑하는 것이 못 되며, 따라서 친구도 될 수 없다.[각주:11]


 그러나 아리스토텔레스는 뤼시스편에서의 플라톤과 다른 주장을 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행복한 사람이 친구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는 얘기가 맞는 것은 주로 유익이나 즐거움을 이유로 하는 친구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는 점에서라고 말한다.[각주:12] 우연적인 의미에 따른 사랑은 행복의 자족성 요구로부터 배제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사랑의 필요성과 행복의 자족성 사이의 모순처럼 보이는 것을 풀기 위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그런데 사태를 보다 자연적으로 고찰하는 사람들에게 유덕한 사람은 유덕한 친구를 본성상(physei) 선택해야 하는 것으로 보인다. 본성상 좋은 것은 유덕한 사람에게 그 자체 좋으며 즐거운 것이라고 얘기되기 때문이다. 동물에게 있어서 삶은 지각의 능력으로 정의되며, 인간의 경우에는 지각 혹은 사유의 능력으로 정의된다. 그런데 능력은 '그것의 발현으로서의' 활동을 조회점으로 하며 일차적인 것은 활동에서 성립한다. 그래서 삶은 일차적인 의미에서 지각함 혹은 사유함인 것으로 보인다. 산다는 것은 그 자체 좋고 즐거운 것에 속한다. 왜냐하면 정의에 의해 규정되었기 때문이다. 정의에 의해 규정된 것은 좋음의 본성을 가진다. 그런데 본성상 좋은 것은 훌륭한 사람에게도 좋다. 이것이 바로 산다는 것이 모든 사람에게 즐거운 이유이다. [] 그런데 산다는 것 자체가 좋고 즐거운 것이며 모두가 그것을 추구하는 것으로 보인다면, 훌륭하며 신적으로 행복한 사람들도 그 누구보다도 삶을 추구할 것이다. 이들에게 삶은 무엇보다도 우선해서 선택해야 할 것이며 이들의 삶이 가장 신적인 행복으로 충만하기 때문이다.(EN 99, 1170a13-29)

 

 여기서 아리스토텔레스는 친구를 그 자체, 본성상 선택할 만한 것으로 이해하고 있다. 친구는 다른 것을 위한 수단으로, 나의 부족함을 채우기 위해 선택되는 것이 아니다. 유덕한 친구는 그 자체 선택할 만한 것이다. 우리가 우리의 삶을 그 자체 추구하듯이 훌륭한 친구들의 삶 또한 그 자체 추구한다. 좋은 친구들이 존재하지 않으면 행복의 자족성은 유지될 수 없기에 행복은 가장 완전한 사랑을 내재적 구성요소로 요구한다.


 그리고 인간은 폴리스적이며 함께 살게끔 되어 있는데[각주:13] 인간에게 있어서 함께 산다는 것은 동물처럼 같은 공간에 배정받았다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고유 기능인 생각과 말을 나누는 것이기 때문에 이 고유한 인간적인 사회성을 완성시키는 즐거움이 바로 사랑이다. 친구와 함께 지각할 내용은 서로가 존재함을 서로 알고 있는 일이며, 이것이 구체적으로는 함께 살면서 서로의 말과 생각을 나누는 것이라면, 자신의 존재가 무엇보다 선택할 만한 것이듯 친구의 존재 역시 선택할 만한 것이다. 따라서 행복하게 될 사람은 훌륭한 친구를 필요로 하게 될 것이다.[각주:14]


 그러므로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있어 인간은 본성상 폴리스적이며 이런 본성에 따른 탁월성을 이유로 하는 좋은 사람들 간의 사랑은 행복과 관련 될 수 있다. 이렇듯 그는 자신이 가지고 있는 탁월성과 행복에 관한 철학으로 사랑을 고찰하였다. 아리스토텔레스에 있어 사랑에 관한 철학은 그의 고유한 탁월성과 행복에 관한 철학체계와 분리해서 생각할 수 없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체계의 이해를 위해 잠시 아리스토텔레스와 다른 사유체계를 가졌던 순자를 언급해보도록 하자. 순자 역시 아리스토텔레스가 사회공동체는 같은 공간을 배정받았다는 의미를 넘어선다고 바라본 것과 유사하게 사회구성을 바라본다.

 

 사람이 생존하기 위해서는 무리를 짓지 않을 수 없고, 무리가 있으면서 나눔이 없으면 쟁탈이 일어나고, 쟁탈이 생겨나면 어지러워진다.[각주:15]

 

 그러므로 고대의 성왕이 이를 위하여 예의로 절제해서 분별했다.[각주:16]

 

 사람은 사회공동체를 이룰 수 있으나, 소나 말은 그것을 이룰 수 없다. 사람은 어떻게 무리를 이룰 수 있는가? 나누기 때문이다. 나누는 것을 어떻게 실천할 수 있는가? 그것은 의()에 의해서이다.[각주:17]

 

 여기서 의()에 의한 나눔은 예()라고 할 수 있다. 이것은 인간을 지성(nous)으로 동물과 구분하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체계와 마찬가지로 인간과 동물을 구분하는 기준이 된다. ()에 의해 각자 감정을 적절하게 절제해야 하는 이유는 사회구성에 그 원인이 있다. 이렇듯 인간은 사회를 구성하면서 일종의 윤리를 필요로 하게 된다.


 아리스토텔레스가 탁월성과 행복에 관한 철학을 논한 것이 윤리학과 관계가 있듯이 그에 있어 사랑 역시 윤리적인 문제가 아닐까? 그렇다면 탁월성에 따른 사랑을 인간의 사회적 본성과 관련지어 가장 완전한 사랑이라고 언급한 것 역시 탁월성에 기초한 사랑이 가장 윤리적인 사랑이라고 말하기 위한 것이라고 생각해 볼 수 있지 않을까? 나는 그동안 살펴보았던 아리스토텔레스의 사랑을 일종의 윤리적으로 요구되는 인간관계로 규정짓고자 한다. 그렇기 때문에 사랑(philia)은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는 것처럼 상대방을 그 자체로 전인격적으로 대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윤리적 삶을 완성하며 상대방 역시 훌륭해지기를 바라는 것이다. 이제 사랑은 윤리적으로 요구된다.

 

 

 

. 자본주의 경제의 물상화(reification)와 사랑(philia)

 

 오늘날 많은 이들은 원자력의 치명적인 폐해와 환경파괴의 엄청난 결과에 대해, 관료제와 자본주의의 비인간성 등등에 대해 도덕적인 비난을 한다. 그런 의미에서 일종의 윤리적 의미가 함축되어 있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사랑(philia)은 오늘날 사회에 더욱더 요구되어야 할 것으로 보인다. 더불어 현대 아리스토텔레스주의자들이 걱정하듯이, 사회공동체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은 개인들이 만연한 오늘날 사회에서 개인들을 윤리적 관계로 연결하는 데에 아리스토텔레스의 사랑(philia)은 충분히 그 의미를 지닌다.


 현대인들은 현실의 자질구레한 행복과 물질적 쾌락에 만족하며 어떠한 모험도 감행하지 않는 지극히 평범하고 소심한 개인들도 보여진다.[각주:18] 텔레비전과 인터넷, 게임 중독으로 대표되는 오늘날 청소년층의 불안은 사회가 숱한 깨진 유리조각처럼 숱한 개인들로 원자화, 파편화되어있는 것으로부터 발생한다. 이렇게 원자주의가 만연해있는 사회에 아리스토텔레스에 있어 폴리스적 본성이 갖는 의미와 그에 따라 탁월성에 기초한 인간관계인 사랑을 강조하는 것은 매우 뜻 깊은 일이 될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한 발 더 앞서 나가 왜 개인들은 파편화되었으며, 왜 사랑이 실현되지 않고 있는 사회에 살고 있는지 되물을 수 있다. 나는 이러한 물음들을 자본주의 경제의 물상화(reification)와 관련지어 대답해보려고 한다. 그리고 이러한 분석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사랑이 갖는 중요성을 다시금 강조하게 되는 계기가 될 것으로 보인다.


 먼저 물상화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살펴보도록 하자. 물상화는 사람과 사람의 사회적 관계가 물건과 물건의 사회적 관계로 나타나는 것을 뜻한다. 자본주의 경제에 살고 있는 우리들의 사회적 관계는 직접적인 관계가 아니라 상품이라는 사물들의 교환관계로 나타난다. 예컨대 선풍기 생산자와 농부의 관계는 직접적인 관계로 드러나지 않고 선풍기와 농부가 생산하는 쌀의 관계로 등장할 뿐이다. 선풍기 생산자는 밥을 먹으면서 농부가 무더운 더위 속에서 고생하고 있다는 생각을 하지 않는다. 농부 역시 선풍기 생산자가 끼니를 거르지는 않을까 걱정하지 않는 것은 분명하다.


 이러한 사회적 관계는 아리스토텔레스가 살고 있던 폴리스에서 이루어질 수 있는 탁월성에 따른 관계(philia)와는 분명한 차이가 있다. 선풍기 생산자와 농부가 서로 호의를 가지고 있고, 상대방이 훌륭해지기를 바라지 않는 것은 매우 당연해 보인다. 이러한 사회적 관계는 유익을 이유로 하는 관계로 볼 수도 있는데, 그들은 상대방이 얼마나 좋고 훌륭한지에 상관없이 그 사람이 생산한 상품에 대해서만, 즉 외적인 피조물에 의해서만 관계를 맺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문제는 자본주의 경제가 확대될수록 이러한 물상화가 더욱더 심화된다는 점에 있다. 예컨대 교육이 본격적으로 상품화되면서 선생과 학생의 관계는 교육이라는 상품을 두고 생산과 소비하는 사람이 된다. 그들은 선생이 생산하는 교육이라는 상품과 학생이 지불하는 화폐의 관계로 나타날 뿐이다. 이것은 아리스토텔레스가 살던 당시에 스승과 제자 사이에 사랑(philia)이 성립하던 아카데미의 모습과 큰 대조를 이룬다.


 이렇게 인간관계에 있어 물상화가 더욱더 지배적인 힘을 얻게 될 때마다 인간관계에 있어 탁월성을 바탕으로 한 사랑(philia)의 관계는 더욱더 성립하기 어려워지며, 윤리적인 의미에 있어서도 매우 큰 위기를 갖게 된다. 오늘날 자본주의 사회에서 사람 사이에 경제적 관계가 아닌 관계를 만드는 시기는 보통 회사에 들어가기 이전인 학생시절이다. 그러나 교육이 상품화되면서 학교는 단순히 상품을 소비하는 장소로 전락해버렸고, 학생시절마저 친구를 만들기 힘들게 되었다. 교육의 목적은 우리의 노동력이라는 상품을 더욱더 비싸게 만드는데 있기 때문에, 학생들은 친구들과 어울리기 보다는 공부에 열중하며 다른 학생들과 경쟁해야 한다. 우리나라는 특히 학생들이 주로 학원에서 시간을 보내고 있기 때문에 함께 생활하지 못하면서 사랑(philia)의 관계를 맺기 더욱더 힘들다.


 이렇게 사람과 사람의 사회적 관계가 상품들간의 사회적 관계로 나타나는 물상화가 이루어지는 자본주의 경제에서는 인간이 탁월성을 기초로 하는 사랑(philia)의 관계를 맺고 유지하기 매우 힘들다. 인간의 윤리와 관계되어 있는 사랑(philia)이 실현되기 어렵다는 것은, 다시 말해 사람들 사이에 윤리가 실현되기 어렵다는 것과 우리가 윤리적인 삶을 살기 어렵다는 것을 뜻한다. 따라서 우리가 아리스토텔레스의 사랑(philia)의 개념을 분석하고 단순히 그것을 주장하는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자본주의 경제에 존재하는 물상화를 비판하고 자본주의 경제의 문제점들을 짚고 넘어가야 한다. 오늘날 사회에서 여러 윤리적인 문제들이 대두되고 있는 것들은 이런 것들과 기초하여 살펴봐야 하며, 우리가 윤리적인 삶을 생활하고자 한다면 자본주의 경제가 갖고 있는 병폐-예컨대 물상화의 원인이 되고 있는 상품-들을 해결하고자 노력해야 할 것이다.

 

 

 

. 맺음말

 

 지금까지 아리스토텔레스의 사랑(philia)과 자본주의 경제의 물상화(reification) 개념들을 살펴보았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사랑(philia)을 일종의 탁월성으로 바라보면서 유익과 즐거움과 같이 우연적인 것에서 오지 않는 지속적인 사랑을 가장 완전한 사랑으로 바라보았다. 사랑은 인간의 폴리스적인 본성에 의해 요구되는데 이는 사랑을 탁월성에 기초하여 바라본 것과 관련된다. 따라서 아리스토텔레스의 사랑은 윤리적 의미를 지닌다는 것이 이 글의 전반부에 해당된다.


 후반부에서는 자본주의 경제에 물상화를 다루었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가 상품, 사물들의 관계로 나타나면서 아리스토텔레스의 사랑(philia)이 실현되기 힘든 측면들을 설명하였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사랑(philia)은 앞서 본 것과 같이 윤리적인 의미를 지고 있기 때문에 이것이 실현되기 힘들다는 것은 자본주의 경제에서 비윤리적인 일들이 크게 문제시되는 것을 설명하는데 도움이 된다.


 많은 이들이 오늘날 사회의 비윤리성을 지적하면서 아리스토텔레스를 언급하곤 한다. 그러나 정작 왜 오늘날 사회에서 윤리적인 문제가 대두되고 있는지 사회구조에 대한 분석에 소홀히 해왔다. 나는 이런 점들을 극복하고자 아리스토텔레스에 있어 사랑(philia)이 어떤 의미인지 살펴보고 자본주의 경제에서 사랑(philia)이 왜 실현되기 힘든지 분석하였다. 이는 오늘날 자본주의 경제에 살고 있는 우리에게 윤리가 문제시되고 있는 문제를 구조적으로 살핀 것이다. 처음 작업해보는 일이어서 그런지 글이 매우 피상적으로 느껴지고 논지도 많은 부분에서 허술함이 보인다. 다만, 이 글이 오늘날 사회의 윤리 문제에 대해 어느정도 문제제기가 되길 바라며 이 글을 마친다.

 

 

 

참고문헌

 

Aristoteles, Aristotelis Ethica Nicomachea (이창우김재홍강상진 옮김, 니코마코스 윤리학, 이제이북스, 2006)

Charles Taylor, The Malaise of Modernity (송영배 옮김, 불안한 현대 사회, 이학사, 2001)

Karl Marx, Capital (김수행 옮김, 자본론, 비봉출판사, 2006)

Platon, Lysis (강철웅 옮김, 뤼시스, 이제이북스, 2007)

김재홍 외, 아리스토텔레스 니코마코스 윤리학,철학사상별책 제3권 제9, 서울대학교 철학사상연구소, 2004

심상태, 인간 : 신학적 인간학 입문, 서광사, 1989

리쩌허우(李澤厚), 정병석 옮김, 중국고대사상사론, 한길사, 2005

  1. 심상태, 『인간 : 신학적 인간학 입문』, 서광사, 1989, p.221 [본문으로]
  2. 일상적 삶에서 찾아지는 나머지 즐거운 일들에 관련해서, 마땅한 방식으로 즐거운 사람은 사랑이 있는 사람이요, 그 중용은 사랑(philia)이다. 이에 반하여 이런 면에서 지나친 사람은, 만일 아무 목적이 없으면 비굴한 사람이고, 만일 자기 자신의 이익을 추구하고 있으면 아첨꾼이다. 그리고 이 방면에서 모자라서 어떤 상황에서나 불쾌한 사람은 일종의 싸움꾼이요, 심보가 고약한 사람(dyskolos)이다. (EN 2권 1108a26-30) [본문으로]
  3. 탁월성에 관한 논의에서 어떤 사람들은 품성 상태(hexis)에 따라, 또 어떤 사람들은 활동(energeia)에 따라 좋은 사람이라고 이야기되듯, 사랑(philia)의 경우에 있어서도 그러하다. 함께 살면서 서로에게 기쁨을 주며 좋음을 제공하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또 자고 있는 사람들이나 혹은 장소상 서로 떨어져 있는 사람들은 사랑의 활동을 하는 것은 아니지만 친구처럼 활동할 수 있을 그런 품성 상태를 가지는 것이다. (EN 8권 5장 1157b5-10) [본문으로]
  4. 따라서 탁월성의 경우에서도 이와 마찬가지이다. 왜냐하면 다른 사람들과의 거래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행함으로써 우리는 올바른 사람이 되고 또 어떤 사람은 올바르지 못한 사람이 된다. 무서운 상황 안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행함으로써 또 두려워하거나 혹은 배짱 있는 마음을 지니거나 하는 습관을 얻게 됨으로써, 어떤 사람은 용감하게 되고 또 다른 어떤 사람은 비겁한 사람이 되기 때문이다. 욕구나 노여움에 관한 것들의 경우에서도 이와 마찬가지이다. 왜냐하면 그들 자신이 처한 이러한 상황 속에서 이렇게 행동하는가 또는 저렇게 행동하는가에 따라서, 어떤 사람은 절제 있는 사람이 되고 또 온화한 사람이 되기도 하고, 또 다른 어떤 사람은 방종한 사람이 되기도 하고 화를 잘 내는 사람이 되기도 한다. 어떤 사람들은 동일한 상황 속에서 이렇게 행함으로써 다른 사람들은 저렇게 행함으로써 그런 저런 사람이 되는 것이니 한 마디로 말하자면, 품성 상태들은 상응하는 활동(energeia)들에서 생긴다. (EN 2권 1103b14-22) [본문으로]
  5. 따라서 이러한 것들[유익 혹은 쾌락을 이유로 성립하는 사랑]은 우연적인 의미에 따른 사랑이다. 사랑받는 사람이 그 자체인 한에서 사랑을 받는 것이 아니라 어떤 좋음이나 즐거움을 주는 한에서 사랑받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랑은 [사랑을 주고 받는 친구들이] 계속 이전 같지는 않을 때 쉽게 해체된다. 더 이상 즐거움이나 유익을 주지 못하게 될 경우 그들의 사랑 역시 멈추게 된다. 유익한 것은 지속하지 못하고 경우에 따라 다른 것이 유익해지는 것이다. 따라서 그들이 서로 친구였던 그 이유가 사라지고 나면 사랑 역시 해체된다. (EN 8권 3장, 1156a16-24) [본문으로]
  6. 각자는 또 단적으로도 좋은 사람이고 친구에 대해서도 좋은 사람이다. 좋은 사람들은 단적으로도 좋으며 서로에 대해서도 도움을 주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좋은 사람들은 즐거움을 주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단적으로도 즐거우며 서로에게도 즐거움을 주기 때문이다. 좋은 사람들 각각에게 자신의 행위들 또 그와 같은 종류의 행위들은 즐거운 것이며, 좋은 사람들의 행위들은 [이런 점에서] 같거나 유사하다. (EN 8권 3장, 1156b7-17) [본문으로]
  7. EN 9권 1166b9-10 [본문으로]
  8. EN 9권 1169a17-18 [본문으로]
  9. 애호(philesis)는 감정(pathos)이지만 사랑은 품성상태(hexis)인 것처럼 보인다. 애호는 [생물] 못지않게 무생물에 대해서도 성립하지만, 사람들이 호응하는 사랑을 하는 것은 합리적인 선택(prohairesis)과 함께하는 것인데, 합리적 선택은 품성상태로부터 나오기 때문이다. 더 나아가 사랑받는 사람들 자체를 위해서 그들이 잘 되기를 바라는 것은 감정에 따른 것이 아니라 품성상태에 따른 것이다.(EN 8권 1157b28-32) [본문으로]
  10. 가장 완전한 사랑은 좋은 사람들, 또 탁월성에 있어서 유사한 사람들 사이에서 성립하는 사랑이다. (EN 8권 3장, 1156b6-7 [본문으로]
  11. Lysis 214e-215e [본문으로]
  12. ‘그들이 주장하는 바는’ 대중들이 유익한 사람을 친구로 간주한다는 것인가? 다시 없이 행복한 사람(makarios)은 좋음을 가지고 있으니, 그러한 유익한 사람들은 전혀 필요로 하지 않을 것이다. 즐거움을 이유로 찾는 친구들도 전혀 필요하지 않거나 약간만 필요할 터인데 그의 삶은 즐겁고 그 어떤 외적인 즐거움도 필요로 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한 친구들을 필요로 하지 않으니 친구들을 필요로 하지 않아 보인다. (EN 9권 1169b22-28) [본문으로]
  13. EN 9권 9장, 1169b19-20 [본문으로]
  14. 삶은 본성상 좋은 것이고, 좋음을 지각하는 일은 그 자체 즐거운 것이니까. '그렇다면' 산다는 것은 선택되어야 할 것, 특히 누구보다도 좋은 사람들에 의해 선택되어야 할 것이다. 그들에게는 존재가 좋고 즐거우니까. 그들은 그 자체 좋은 것에 대한 지각을 공유하면서, '즉 서로의 존재를 지각하면서' 즐거워한다. 마치 유덕한 사람은 자기 자신에 대해 하듯이 그렇게 또 친구에 대해― 친구는 또 다른 자기 자신이니까― 그러하듯이 말이다. 따라서 각자에게 있어서 자신의 존재가 선택되어야 할 것이듯이 그렇게 친구의 존재도 선택되어야 한다. 혹은 거의 그렇게 선택되어야 한다. 존재는 자신이 좋은 사람임을 지각하기에 선택할 만한 것이었다. 그런데 그러한 지각은 그 자체 즐거운 것이다. 따라서 친구가 존재함을 함께 지각하는 일, '즉 서로가 존재함을 서로 알고 있는 일이' 필요한데 이것은 함께 삶과 서로 말과 생각을 나누는 일에서 성립한다. 인간에게 있어서 함께 산다는 것은 가축의 경우처럼 같은 공간에 배정받았다는 것이 아니라 이러한 것을, '즉 서로 말과 생각을 나누는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이니 말이다. 과연 신적으로 행복한 사람에게도 존재는 본성상 좋고 즐거운 것이라 그 자체 선택해야 할 것이며, 그 다음으로 친구의 존재가 선택해야 할 것이라면, 친구 또한 선택되어야 할 것 중의 하나일 것이다. 신적으로 행복한 사람에게 선택되어야 할 가치는 마땅히 그에게 귀속되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바로 이점에서 부족하게 될 것이다. 따라서 행복하게 될 사람은 유덕한 친구를 필요로 하게 될 것이다. (EN 9권 9장, 1170b1-19) [본문으로]
  15. 『순자』「부국」 [본문으로]
  16. 같은 책, 「영욕」 [본문으로]
  17. 같은 책, 「왕제」 [본문으로]
  18. 안네 마리 파이퍼 지음, 정영도 옮김, 『니체의 ‘짜라투스트라’에 대한 철학적 해석』, [5.종말인 : 삶의 형식으로서의 향락], 이문출판사, 1994, pp.90~95 참조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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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서양철학사를 수강하며 작성한 레포트를 정리한 것입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행복



 인간은 왜 사는가? 아리스토텔레스에 따르면 인간은 행복하기 위해 산다. 니코마코스 윤리학의 출발점인 동시에 전체를 끌어가는 핵심개념이 바로 행복이다. 아리스토텔레스에 따르면, 인간의 모든 의도된 행위는 어떤 목적을 지향하며, 이 목적이 성취되면 이 목적은 다시 더 높은 목적을 위한 수단이 돼 그 위의 목적에 이바지한다. 이렇게 목적과 수단의 지속적인 연쇄관계의 계단을 계속 밟아 올라가면, 더 이상 다른 것의 수단이 아니라 그 자체가 목적인 최종 목적지에 도달한다. 이것이 다름 아닌 인생의 가장 좋은 것(최고선)이자 궁극적인 목적인 행복eudaimonia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다음으로 행복에 대한 통념들을 검토한다. 첫 번째 견해는 행복은 쾌락 혹은 즐거움에서 성립한다는 견해이다. 그러나 이러한 삶이 짐승들에 알맞은 삶이라 욕망의 노예가 될 뿐인 삶이라고 평가한다. 두 번째, 사람들이 행복의 내용으로 생각하는 명예를 중심에 놓는 삶을 아리스토텔레스는 정치적 삶의 유형으로 분류한다. 그러나 아리스토텔레스는 이것 역시 피상적이기에 진정한 행복의 내용이 되기 어렵다고 평가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행복이 우리에게 고유한 것이며 쉽게 박탈될 수 있는 어떤 것이 아니어야 하는데 명예의 경우 명예를 받는 사람이 아니라 주는 사람이 더 결정적이기 때문이라는 지적을 한다. 그 다음 아리스토텔레스는 간단하게 언급하지만, 을 버는 삶을 언급하며 부는 그것 자체가 목적이 아니며 다른 어떤 목적을 위해서만 유용하다는 단순한 이유로 행복의 후보에서 배제된다.


 이런 통념적인 삶이 위에서 논증하듯 진정한 행복의 내용이 되기에 부족하다면, 진정한 행복이 되려면 갖추어야할 조건들은 무엇인가? 아리스토텔레스는 성취가능성, 완전성, 자족성을 논변한다.


1) 행복은 만약 그것이 인간이 추구하는 것이라면, 인간적 행위로 성취할 수 있거나 도달할 수 있는 것이어야 한다.

2) 행복은 항상 바로 자기 자신 때문에 선택될 뿐 자신 아닌 다른 것 때문에 선택되지는 않고 동시에 다른 모든 것들은 바로 이것을 위해 선택되는 단적으로 완전한 목적이다.

3) 행복은 그것만으로 삶을 선택할 만한 것으로 그리고 아무것도 부족함이 없게끔 만드는 자족적인 목적이다.


 행복을 최상의 좋음으로 정의한 후 이렇게 정의된 최상의 좋음으로부터 성취가능성, 완전성, 자족성까지 도출해 낸 후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의 기능으로부터 인간의 행복을 정의한다. 이것은 일반적으로 좋음이 수행해야 할 혹은 수행할 것으로 기대하는 기능에 비추어 정의된다는 사실로부터 도출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이 아니면 잘 할 수 없는 인간의 고유한 기능에서부터 인간의 행복을 정의하려 하는데, 그것은 다른 식물 동물과 구분하는, 이성이라는 인간 고유의 능력이다.


 인간의 기능이 이성과 일치하는 혹은 적어도 이성과 분리되지 않은 영혼의 활동이라는 것을 상정한다면 뛰어난 사람의 기능은 이것들을 잘 그리고 훌륭하게 행하는 것이어서 각각의 기능은 그것의 부류에 고유한 탁월성에 따라서 수행될 때 잘 수행되는 것이다. 이로써 인간의 좋음은 탁월함()에 따르는 영혼의 활동이라는 것이 밝혀진다.


 즉, 좋은 혹은 뛰어난 하프 연주자가 하프를 잘 연주하는 사람이듯이 훌륭한 인간도 인간의 고유한 기능인 이성적 삶을 잘 살아내는 사람이다. 인간 고유의 기능을 그 탁월성에 따라 영혼이 활동해 낼 때 인간은 자신의 고유한 좋음()에 이르는 것이며 행복하다는 것이다.


 인간 고유의 이성적 기능을 행복과 좋음()에 연결시킨 아리스토텔레스의 행복관은 자칫 인간 전체의 다른 기능을 배제할 우려의 여지가 존재한다고 생각한다. 영화 이퀼리브리엄(Equilibrium, 2002)에서 그려지고 있는 모든 감정이 통제되는 미래도시를 우리가 행복한 사회, 인간다운 사회라고 규정짓지 못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따라서 아리스토텔레스의 행복관을 프로크루스테스와 같은 태도로 받아들이는 것은 큰 문제가 있다.




 나는 인간의 고유한 기능과 탁월성에 따라 인간 고유한 좋음과 행복에 도달하는 아리스토텔레스의 행복관을 높게 평가한다. 그러나 나는 오히려 인간의 성적 충동과 소외를 가지고 행복의 내용을 즐겨 바라본다. 나는 인간이 이성으로 인해 분리되어있는 실재로서의 자기를 인식할 수 있기 때문에 불안감과 같은 소외를 느낀다고 보기 때문에 이성의 기능을 탁월하게 발휘하는 것만으로는 행복을 찾을 수 없다고 본다. 여기에서는 오히려 인간의 성적 행위가 이와 같은 불안감과 소외를 극복하고 행복해지는 길을 제시한다. 그것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화폐와도 같은 추상에 대한 에로스가 아니라, 구체적 개별에 대한 에로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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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서양철학사를 수강하며 플라톤 향연에 대해 작성한 발제문을 정리한 것입니다. 



Platon : SYMPOSIUM



 델포이의 아폴론 신전 현관 기둥에 새겨졌다는 너 자신을 알라라는 말로 우리에게 친숙히 다가오는 소크라테스는 평소 스스로 무지를 자처하며, 인간들 가운데 가장 지혜로운 자는 앎에 관한 한 자신은 아무것도 아님을 아는 자라는 철학을 펼쳐나간 인물이다. 그런 그가 향연에서 예외적으로 에로스에 관한 것 외에는 아무것도 모른다, 즉 에로스에 관해서는 안다고 피력한 바 있다(177d). 이것은 과연 모순된 발언일까? 나는 그렇지 않다고 본다.


 『향연에서 소크라테스와 디오티마의 논의를 보면, 에로스는 다른 것, 자신에게 없는 어떤 것과 관계를 맺는 가운데 존재하기 때문에 신이 될 수 없으므로 다이몬에 지나지 않으며, 그것은 인간과 신의 중간적 존재, 불멸과 필멸의 중간적 존재이자 중개자, 매개자의 입장을 취한다. 다른 한편으로 지혜를 추구하는 사람들은 지자도 아니고 무지한 자도 아닌 중간적 존재다. , 자기가 무지하다는 것을 자각하며, 지혜를 추구하고 사랑하는 사람인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예외적으로 에로스에 관해서는 안다고 말한 소크라테스는 결국 평소와 다름없이 자신이 무지하다고 말하고 있는 셈이 된다. 요컨대, 에로스로 표명되는 무지의 자각은 신이 아닌 인간이 완전한 지혜를 얻지 못하지만 끊임없이 추구할 수 있는 가능성을 지닌, 비극과 희극이 동시에 공존한다.


 『향연에서 아리스토파네스의 이야기 역시 이 비극과 희극은 동시에 공존한다. 그는 완전함을 상징하는 원의 형태를 띠고 있던 인간이 대단한 힘과 능력으로 신에게 대들었고, 그로 인해 인간이 신에 의해 반으로 나뉘어졌다고 말한다. 그리고 잃어버린 예전의 전체에 대한 욕망과 노력을 에로스라고 정의한다. 이는 인간이 현 상태는 완전하지 않는 비극적 요소를 지니고 있는 동시에 완전함에 대한 가능성을 제시한다는 희극적 요소(에로스) 역시 존재한다는 점에서 앞의 논의와 비슷한 측면을 지니고 있다. 나는 이러한 점이 소크라테스가 향연이 끝난 새벽에 아리스토파네스에게 희극을 쓸 줄 아는 것과 비극을 쓸 줄 아는 것이 동일한 사람에게 속할 수 있다는 것을 말한(223d) 까닭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소크라테스의 연설을 들은 다른 모든 이들이 그의 연설에 모두 동의하는 모습을 취했을 때 아리스토파네스가 그에 대해 반박하려 했듯이(212c), 둘 사이에는 큰 간극이 있다. 비록 둘 모두 에로스를 욕구로 정의하고 있지만, 아리스토파네스 연설 속에서 이 욕구는 완전함에 대한 회복으로 회귀적인 성격을 지닌 반면, 소크라테스의 연설 속에서는 지속적인 상승의 노력으로 분출한다.


 즉, 아리스토파네스에게 있어 인간 불완전의 결여가 잃어버린 자신의 반쪽이라면 소크라테스에게 있어서는 아름다움이며, 에로스는 그 자체로 아름다운 것을 수직적으로 추구하게 된다. 말하자면 아리스토파네스의 딸꾹질이 고통에서부터 딸꾹질 이전으로의 회복되는 과정을 그린다면, 소크라테스 연설은 자신이 지니지 못한 아름다움, 좋음으로 향하는 과정을 그린다.


 소크라테스는 아리스토파네스를 의식하여, 사랑하는 자는 자신과 같은 것을 찾는 자가 아니며, 자신의 손과 발이 자신에게 해로운 것이라 생각될 때 자신의 것일지라도 잘라내 버리려고 하듯이, 오직 좋음을 추구한다고 말한다(205d-206a). 그런데 아리스토파네스는 좋음과 같은 도덕적 문제들에 대한 언급이 없기에 이에 취약한 약점을 지닌다. 그에게 도덕성의 문제는 인간과 신과의 관계 회복이라는 종교 문제와 연관 짓는 것에서 끝나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소크라테스와 아리스토파네스 에로스에 관한 논의는 사실 성 자체보다 다양한 인간관계의 정신적 특징 혹은 사회의 기능으로 파악하는 데 중점을 두었다는 한계를 지니고 있다고 생각된다. 성해방운동가들이 성적인(sexual) 것과 생식적인(genital) 것을 분류하는 바를 따르자면, 이들은 성적인 것 자체의 중요성보다도 생식적인 부분을 많은 부분에서 언급한 것이다.


 그런 부분에서 가장 소란스럽게 향연에 등장하는 알키비아데스가 이들에 대해 언성을 높일 수 있는 여지가 있다. 실제로 그는 자신을 성적으로 상대하려 하지 않는 소크라테스에게 큰 불만을 토로하고 있다. 하나로부터 둘로 둘에서 다시 모든 아름다운 몸으로, 몸에서 영혼의 아름다움 등으로의 아름다움 자체에 도달하는 소크라테스의 에로스에서는 물론 하나 역시 소홀히 해서는 안 되지만 사랑과도 같이 정열적으로 그 하나에만 전념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이것은 사실 성을 연구하는 현대의 학자들에게는 매우 중요한 문제가 된다. 우리는 소크라테스와 같이 모두를 사랑하고, 모두에게 사랑받는 자에게 알키비아데스처럼 성적 수치심을 느끼기 때문이다. 그것은 자신의 남편이 모든 여자들에게 잘해주지를 않기를 바라는 것과 같다. 그리고 누구나 알키비아데스처럼 이성이 자신의 성적 매력에 이끌려 성 행위를 하기를 원하지, 소크라테스와 같은 사람은 자칫 자기에게 동정을 베푼다는 생각을 하기 쉽다.


 아리스토파네스와 소크라테스의 이야기가 비슷한 구조를 가지면서도 차이를 지녀 플라톤의 철학이 잘 표현된다고 말한다면, 알키비아데스의 이야기는 플라톤의 철학을 풍부하게 만드는 요소라 말할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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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서양철학사를 수강하며 플라톤 향연에 대해 작성한 발제문을 정리한 것입니다. 



Platon : SYMPOSIUM

e peri erotos, ethicus, 172a~178a



(도입부의 이야기 전달 관련 인물)

 

아폴로도로스(Apollodoros)

이 대화편에서 동료들에게 향연 이야기를 들려주는 사람. 아테네 팔레론 사람(172a, 파이돈59b)으로 소크라테스를 마음 깊이 경모한 정열적인 제자(173b, 파이돈59a, 크세노폰 소크라테스의 변론(28), 크세노폰 소크라테스의 추억311). 감수성이 예민하고 격정적 성격의 소유자(173 e). 소크라테스의 사형을 눈앞에 두고 통곡했다는 기록도 (파이돈117d) 그러한 성격을 보여준다. 소크라테스 재판시에는, 플라톤, 크리톤과 함께 스승을 위해 30므나의 벌금을 납부하는 보증인이 되기도 하였다(소크라테스의 변론38b).

 

글라우콘(Glaukon)

아폴로도로스의 친구. 플라톤의 외삼촌인 카르미데스의 아버지(222b)도 같은 이름이며, 국가에 나오는 플라톤의 형제도 같은 이름이다. 이 대화편의 언급(172c)만으로는 어느 글라우콘인지 확정하기 어렵고, 3의 인물일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포이닉스(phoinix)

이 대화편에서의 언급(172b) 외에는 알려져 있지 않은 인물.

 

아리스토데모스(Aristodemos)

아테네의 퀴다테나이온 출신 아폴로도로스와 포이닉스에게 향연 이야기를 전해준 사람. 이 대화편에서 그는 작달막하고 늘 맨발로 나다니는 사람으로 소크라테스와 함께 향연 모임에 직접 참석한 것으로 묘사된다. 아폴로도로스와 달리 오래전부터 소크라테스의 제자였으며 그것도 가장 열렬한 추종자 중 한사람이었다(173b).

 

1. (172a~174a)아폴로도로스가 전하는 향연 이야기 [이야기의 전달 과정]

 

전달과정의 복잡성(거리두기172b, 이야기 내용의 중요성173b)

[참고문헌 : 강상진, 플라톤 향연의 틀 이야기독특한 거리두기, 한국서양고전학회, 서양고전학연구15, 2000, pp.25-46]

 

- 향연에 관한 구두전달의 연쇄(172b)는 향연이 이렇듯 여러 입을 거치고 있다는 사실로부터 향연과 거기서 행해진 연설에 상당한 무게를 더해줌

- 오랜 세월이 흐른 후(173a) 계속 인구에 회자되고 있는 일은 그 향연이 실제로 벌어졌던 순간을 넘어서는 의미를 가질 때 보통 일어나기 때문에 중요[H.Reynen, "Der vernittelte Bericht im Platonisehen Symposion." in: Gymnasium 74 (1967), 415.]

- 여러 입을 거치고 있다는 사실은 보고의 정확성에 의문을 제기할 수 있지만 아폴로도로스는 최근 글라우콘에게 한번 향연에 관한 얘기를 했으므로 준비가 되어있음. 소크라테스의 확인(173b)

거리두기(대화, 틀이야기 구성)의 단순히 문학적 의미, 철학적 의미를 생각해보자

아폴로도로스는 에로스와 소크라테스의 에로스와 비교해보고, 왜 아폴로도로스가 이야기의 전달자인지 생각해보자

 

2. (174a~175e)아리스토데모스의 서언 [향연 이야기의 시작 부분]

[참고문헌 : 이강서, 플라톤 철학의 아폴론적 계기와 디오니소스적 계기, 박희영 외 지음, 플라톤 철학과 그 영향, 서광사(2001), pp.39~64]

 

디오니소스와 향연

- 일반적으로 향연이 진행되는 동안 손님들에게 음식은 제공되지 않음. 향연에 앞서 식사를 하지만 특정한 정화 행위를 통해 향연과 분명히 나누어짐(175e~176a)

- 포도주를 마시는 일은 향연에서만 이루어지며 이는 명백히 종교적인 성격의 것으로 포도주의 신 디오니소스와 연관

- 향연에서 에로스를 두고 행해진 연설들은 일종의 연설 경연, 연설 시합의 형태로 이루어짐. 부르크하르트(J. Burckhardt)는 그리스 사람들을 경쟁하는 사람들’(agonale Menschen)로 특징짓고, 베르베(H. Berve)그리스인의 경쟁심’(agonale Geist der Griechen)이라고 표현, 니체도 그리스 문화의 원동력을 경쟁심’(agonaler Geist)에서 찾음[W.Brukert, Greek Religion, 105~107('agon') : 차하순, 정동호 부르크하르트와 니체(서강대 출판부, 1986), 213~218(‘그리스인의 삶 속에 있던 경쟁자적 성향’]

- 향연의 연설 시합은 또 한가지 점에서 디오니소스와 관계를 맺음(175e)

- 헬라스 사회의 향연에서의 성행위 : 주연의 규칙, 그러나 깨짐

 

디오니소스와 에로스의 연관점은 어디에 있을까 생각해보자

소크라테스가 신발을 신은 이유, 초대받지 않은 아리스토데모스의 향연 참석, 소크라테스의 명상 등의 의미를 찾아보자

 

3. (177a~178a)에릭시마코스의 연설 주제 제안

[참고문헌 : 김인곤, 플라톤 향연, 서울대학교 철학사상연구소,철학사상별책 제5권 제4(2005) ]

 

찬양 연설의 형식

- 찬양 연설은 고대의 모범적인 수사술의 한 형식. 이 연설 형식의 지침은 기원전 300년경의 수사술 논문에 들어 있다. 그리고 향연에서의 찬양은 분명히 이 형식을 따른다. 찬양이 포함해야 할 내용은 이런 것이다. 찬양대상의 기원 또는 혈통(계보), 또는 고귀한 출생(가문). 힘이나 아름다움 같은 좋은 자질. 지혜, 정의, 용기와 같은 덕(뛰어남)과 명성을 얻는 행위. 생활 습관이나 방식. 다른 사람들의 업적과 대조되는 업적들. 그리고 이 연설은 신과 숭배자 간의 관계의 적절한 형태가 호혜 관계, 즉 신을 숭배하고 신으로부터 은혜를 입는 관계임을 전제한다.(Gill, 1999, 20)

 

우리가 보통 알고 있는 소크라테스의 대화법은 주제에 관해서 어떤 적극적인 대답을 내 놓는 대신에 스스로 무지(無知)를 자처하면서 상대방이 가진 의견의 불충분함과 한계를 폭로하고는 것으로 끝난다. 그런데 여기서의 소크라테스는 좀 다르다. 유독 에로스에 관해서(ta erōika)만은 알고 있다고 말한다.(177d) 무엇을 의미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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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서양정치사상사를 수강하면서 작성한 글입니다.


 

Thomas Hobbes의 정치사상


 

I. ‘방법론적 개인주의에 의한 정치적 아리스토텔레스주의의 전복

 

 사회계약론으로 통칭되는 근대 정치철학은 근대 이전의 정치를 지배한 아리스토텔레스주의를 전복한다. 양자의 관계가 계승과 변형의 관계가 아니라 전복의 관계인 것은 근대 정치철학이 아리스토텔레스주의의 근본명제에 대한 부정으로부터 출발하기 때문이다.


 아리스토텔레스정치학의 출발점은 인간은 본성상으로 정치적 동물”(정치학, 1253 a 2)이라는 주장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정치적 공동체의 필연성을 인간 본성으로부터 끌어낸다. 정치공동체가 인간의 본성적인 욕구 속에 그 기초를 가지고 있으며(정치학, 1253 a 28), 정치공동체에 대한 참여는 삶의 목적으로 파악된다.

 중세의 사회정치철학 체계를 수립한 아퀴나스도 아리스토텔레스를 수용한다. 정치적 공동체를 형성하고자 하는 욕구는 인간의 본유 관념으로 파악된다(신학대전 Summa theologica, IIa-IIae, quaest. 124, art. 4, ad 3; Ia-IIae, quaest. 92, art. 1). “정치적 동물테제의 핵심은 정치공동체의 개인에 대한 존재론적 우위이다. 정치적 아리스토텔레스주의의 틀 안에서 개인은 정치적 공동체로부터 독립적으로 파악하지 않는다. 정치적 공동체에의 참여 없이는 개인의 인륜적 완성은 이루어질 수 없기에 정치공동체는 개인에 대하여 인륜적인 우위를 가진다.


 하지만 정치적 아리스토텔레스주의의 핵심은 오늘날 다양한 공동체주의자들에 의하여 주장되는 공동체의 인륜적 우위보다 한 걸음 더 나아간다. 즉 정치공동체에의 참여는 인간의 고유한 목적이기에, 정치공동체는 개인들에 대하여 존재론적인 우선성까지 획득한다. 정치적 공동체는 본성상 개인보다 선차적’(정치학, 1253 a 25)이다.

 

 근대 정치철학은 정치적 아리스토텔레스주의의 근본명제인 정치적 동물테제를 전복한다. 정치공동체는 개인에 대하여 존재론적 우위를 가지지 않는다. “정치적 동물테제의 전복의 결과는 방법론적 개인주의이다. 근대 정치철학은 개인으로부터 출발하며, 정치공동체는 개인들이 만든 것에 불과하다.


 정치공동체는 홉스가 주장하듯 제작된 것이거나 로크, 루소와 칸트가 말하듯이 자유의지를 가진 개인들의 결합에 지나지 않는다. 근대 정치철학의 공통특징을 방법론적 개인주의라고 규정하는 것은 중요한 의의를 가진다. 그것은 근대 정치철학이 개인에서 출발하지만 논증 목표는 개인의 우위에 머무르지는 않음을 암시한다. 근대 정치철학은 개인들로부터 출발하여 개인들의 결합으로서의 정치공동체를 논증하는 체계이다. 이는 자연상태, 사회계약, 정치공동체의 세 단계 논증구조를 가진 사회계약론으로 나타난다.


 자연상태는 사회계약 이전의 상태로서 개인들이 정치공동체 없이 존재하는 상황이다. 이처럼 자연상태를 전제한다는 것 자체를 정치적 동물테제의 전복으로 볼 수 있다. 그런데 근대 정치철학은 자연상태의 정당성에 대한 논증이 아니라 자연상태에 대한 극복의 필연성의 논증이라는 점이 더욱 중요하다. 근대 정치철학은 자연상태를 극복하고 사회계약을 통하여 국가를 수립해야 할 필연성을 논증한다. 이는 근대 정치철학이 국가의 정당성에 관한 논변이며, 지배의 정당성에 관한 논변임을 뜻한다. 근대 정치철학은 정당한 지배의 기준을 제시하고자 한다. 바로 이 점은 근대 정치철학에 의한 아리스토텔레스주의의 전복이 정치철학 체계의 출발범주의 문제만이 아니라 보다 심층적으로 논증목표와 관련된 것임을 뜻한다.

 


II. 지배의 정당화 논변으로서의 사회계약론

 

정치적 아리스토텔레스주의의 틀 안에서 지배나 강제에 대한 논변은 불가능

- ‘생성과 존재의 구분’ : 모든 생성은 오직 존재를 위한 생성’ (형이상학 IX, 8, 1050 a 4-9)

- 인륜적으로 좋은 삶은 폴리스의 존재근거’, 폴리스의 발생근거인 단순한 생존보다 우위

- 폴리스는 개인의 내적 목적’, 공동체에 참여하는 것은 강제가 아니라 인간적인 목적의 실현

 

17-18세기의 근대 정치철학: 사회계약론의 형태를 통해 지배에 대한 정당화 논변 제시

- 지배에 대한 정당화 논변을 제시한다는 것은 동시에 이와 같은 정당화의 기준을 충족시키지 못하는 부정당한 지배에 대한 저항 논거를 제시

- 홉스는 지배의 문제를 정치철학의 중심 문제로 끌어올린 최초의 근대 정치철학자

- 아리스토텔레스의 정치철학이 최고의 선과 관련된다면, 홉스의 정치철학은 '만인과 만인의 전쟁이라는 최악'을 막을 수 있는 평화의 수단을 구상

- 지배나 강제에 대한 논변을 불가능하게 만드는 아리스토텔레스 목적론의 체계 전복은 기하학적 방법’(mos geometricus)의 도입을 통해 수행 : 발생론적이며 인과론적 방법, ‘사유실험

- 홉스에 의한 전복구조

 

아리스토텔레스

홉스

국가공동체의 위상

그 자체로 인간의 목적이다

수단이다(목적-수단관계의 전도)

인간관

협동의 인간학(사회적 본성)

갈등의 인간학(만인과 만인의 투쟁)

폴리스vs개인

개인에 대한 폴리스의 우위

개인이 출발범주(방법론적 개인주의)

이성개념

이성능력과 이성적 판단 내용은 구분되지 않으며 통일된다 (phronesis)

이성은 전략적 판단을 위해 필요한 계산능력 (techne)

- 자연상태, 사회계약, 사회계약을 통해 수립된 국가라는 세 가지 단계의 논증구조 정치공동체의 성격과 상은 전적으로 자연상태에 관한 서술에 의해 결정

- 홉스와 달리 로크의 자연상태는 평화상태와 전쟁상태의 요소를 복합적으로 가지고 있어 자연상태를 극복한 정치상태인 국가는 제한적인 주권권력만을 가진다. 따라서 홉스의 사회계약론이 절대국가로 귀결되는 반면에 로크의 사회계약론이 생명, 자유, 재산을 보호하는 헌법국가로 귀결

- 로크는 목적론 체계에 대한 전복을 본유관념론에 대한 경험론적 부정으로부터 시작(이성능력을 특정한 판단내용과 구분했지만 그가 이성을 홉스처럼 이기적 타산능력으로 환원한 것은 아니다)

- 홉스 이후의 사회계약론은 로크처럼 홉스의 패러다임을 그대로 따르면서 자연상태관을 바꾸거나, 루소나 칸트처럼 사회계약론의 논증구조에서 자연상태관이 차지하는 중요성을 감소시키고 사회계약의 논증적 역할을 증대시키는 전환을 시도

 


III. 지배의 역설

 

1) 강제력 없이는 사회적 협력체제가 있을 수 없다

- 자연권의 영구적인 상호포기가 평화상태를 수립하는 것 같지만 전쟁의 종식과 평화상태는 질적으로 다른 상태. 평화상태를 위해서는 생산, 분배, 교류의 협력이 필요. 홉스는 그와 같은 협력의 규칙, 곧 정의는 국가권력을 전제한다고 주장

- "정의롭다 또는 부정의하다라고 말할 수 있기 위해서는 계약을 어겼을 때 기대되는 이익보다 처벌의 두려움이 더 크게 작용하여 사람들로 하여금 계약을 지킬 수 있도록 만드는 강제력이 먼저 있어야 한다. 그러한 권력은 국가의 수립 이전에는 있을 수 없다."

- 이 역설은 이기적 개인들이 합리적 선택의 결과(교섭/타협)로 계약이 성립한다는 변명으로 해소한다. 그러나 비록 자연상태로부터 국가상태로의 이행이 가장 합리적인 선택임을 재구성할 수 있다 할지라도 리바이어던의 제작이 합리적 선택일 수 있는지의 문제는 여전히 남는다.


2) 절대권력자는 왜 만인에게 포함되지 않는가?

- 계약의 내용은 만인이 만인에 대해 만인과 만물에 대한 권리(1의 자연법)을 포기한다는 내용이다. 무한축적의 포기이며 자기통제의 권리를 포기하는 것이다. 이것은 만인대 만인의 계약이다.

- 그런데 권리를 포기하지 않는 단 한명의 늑대가 있다. ‘성 안을 어슬렁 거리는 늑대가 결국 주권자가 된다. 그런데 만약 계약에 참여하지 않은 늑대가 한 마리가 아니라면 어찌 되는가?

- 주권자는 자신의 권리를 포기 안한 제3자이며 만인에 속하지 않는다. ‘만인이라면 모두가 하는 계약이어야 하는데 주권자만이 이 계약에 참여하지 않는다. 모두가 자연권을 포기한 상태에서 오로지 그 사람만이 자연상태이다.

- 홉스는 주권자가 왜 계약에 참여하지 않는지, 어디서 온 건지 설명하지 않는다.


 

IV. 지배와 민주주의

 

 먼저 민주주의 개념에 대한 긍정적인 평가는 철저히 근대적인 특징이라는 점부터 살펴볼 필요가 있다. 고대의 민주주의 개념은 인민(Demos)의 지배(Kratia)를 뜻하며 때로 폭도들의 수탈과 같은 부정적인 맥락에서 사용되었다.


 예컨대 아리스토텔레스는 다수 인민의 참여를 전제한다는 점에서 민주정을 비록 참주정이나 과두정보다 나은 정체로 보지만 공동의 영역인 폴리스를 다수의 오이코스로 타락시키는 정체로 보았으며, 폴리스와 오이코스의 구분이 유지되는 군주정이나 귀족정보다도 덜 건전한 정체로 파악한다.


 정치적 아리스토텔레스주의에서 가장 건전한 정체는 혼합정이며, 이는 폴리스와 오이코스의 엄격한 공화주의적 구분을 유지하면서도 군주와 귀족뿐만 아니라 인민도 참여할 수 있다는 점에서 가장 많은 참여를 보장하기 때문에 가장 우월한 정체로 파악된다.


 정체에 대한 가치 판단에서 제1기준은 폴리스와 오이코스의 구분이다. 양자의 구분을 유지하는 군주정이나 귀족정이 겉보기에 더 많은 인민의 참여를 보장하는 민주정보다 우월한 이유는 바로 이러한 제1기준 때문이다. 두 번째 기준은 인민의 참여라고 할 수 있는데, 이는 제1기준과 독립적인 준거로 이해되지 않았다. 근본적으로, 아리스토텔레스는 참여와 지배의 문제를 엄격히 구분한다. 모든 참여는 제1기준의 충족을 전제하며, 모든 지배는 제1기준의 위반, 즉 폴리스를 찬탈하여 오이코스로 만드는 행위로 이해되었다.


 이와 같은 참여와 지배의 대립은 - 앞서 밝혔듯이 - 아리스토텔레스주의의 틀 안에서 정당한 지배에 관한 논변이 등장할 수 없었던 이유이기도 하다. 고전 고대적 어법에서 인민 지배로서의 민주주의 개념은 사적 이해관계를 벗어난 참여라는 공화주의적 이상과 충돌하며, 그러한 한에서 민주주의 개념은 공화국의 이념에 비하여 부정적인 문맥을 가진다.

 

 민주주의 개념에 대한 긍정적인 가치 부여는 '지배 형식'으로부터 '결합 형식'으로 민주주의 개념의 전환에 의하여 이루어질 수 있었다. 홉스 이후 근대 정치철학은 아리스토텔레스주의가 지배의 문제를 도외시했다고 보고 지배의 정당화 또는 정당한 지배에 관한 기준을 제시하고자 한다.


 위에서 살펴보았듯이 홉스의 정치철학은 대등한 주체들의 계약에 의해 수립된 국가적 지배가 계약에 참여하지 않는 제3자인 지배권력을 전제한다는 역설, 곧 지배의 역설을 보여준다. 홉스 이후의 근대 정치철학은 이 문제를 해결하고자 한다. 로크의 정치철학을 지배에 대한 한계를 설정하려는 시도로 볼 수 있다면, 루소와 칸트의 정치철학은 자유의지와 자기지배의 이상을 충족시킬 수 있는 결합 형태에 대한 모색으로 이해될 수 있다. 그들은 민주주의 개념을 자유의지적 주체로서의 개별자들의 결합 형식으로 전환한다.


 이는 루소의 사회계약론과 칸트의 인륜의 형이상학에서 자연상태관보다 사회계약 개념의 논증적 중요성의 커지는 것으로 나타난다. 사회계약론의 논증구조에서 계약이 홉스, 루소, 칸트의 경우처럼 만인과 만인의 계약인가, 아니면 로크의 경우처럼 개인들의 자발적 동의를 의미하는가는 국가정당성 논거에서 중요한 준별성을 가진다.


 칸트는 로크처럼 만인과 만인의 계약을 개별적 동의로 치환함으로써 홉스 식의 절대국가를 방지하려 하는 대신에 만인과 만인의 계약의 상을 수정한다. 여기에서는 이성개념이 중요한 역할을 한다. 홉스처럼 계산능력으로서의 이성개념에서 출발한다면 계약은 전략적 협상이 된다. 반면에 칸트처럼 정언명법적 일반화 능력을 가진 이성적 개인으로부터 출발한다면, 계약은 전략적 협상이 아니라 자연상태의 결점이 보여주는 '공법에의 요청'에 따라 '모든 이의 결합된 의지'를 형성하는 것이 된다.


 루소의 일반의지 개념과 칸트의 '만인의 결합된 의지' 개념에 이르러 근대 정치철학은 정치적 아리스토텔레스주의의 틀 안에서 필연적일 수밖에 없는 민주주의와 공화주의의 충돌, 곧 지배와 참여의 분리 문제를 해소한다. 홉스 정치철학에 고유한 지배의 역설도 결합형식으로서의 민주주의를 통해 해소되는 듯하다. 정치적 아리스토텔레스주의에서 민주주의와 공화주의는 양립할 수 없고 민주공화주의는 역설이었지만, 거꾸로 근대 정치철학의 이상은 민주공화주의이다.

 

 비록 근대 정치철학이 루소와 칸트에 이르러 민주주의 개념을 자유의지적 주체로서의 개별자들의 결합으로 전환했지만, 결합 형식 자체에 대한 해명은 이루어지지 않았고, 홉스에게 나타나는 지배의 역설도 완전히 해소된 것은 아니다. 루소나 칸트는 사회계약에 불참하려는 개인들에게 계약의 참여와 준수를 강제해야 한다고 본다. 만인과 만인의 사회계약에서는 어떠한 예외도 인정되지 않는다. 이는 주권권력의 예외성의 문제를 해결하는 듯하지만 개별적인 인간들에게 일반 의지만인의 결합된 의지는 외적인 것으로 등장할 수도 있음도 망각된다. 루소나 칸트는 치자와 피치자의 동일성, 자기지배의 원리를 집단화하는 공화국의 이념을 통해 지배의 역설을 해결했다고 믿었겠으나 민주주의가 다수 지배의 원리가 아니라 치자와 피치자의 동일성의 원리라고 하더라도 이 원리는 직접적으로 실현되는 것이 아니라 오직 주권권력을 매개로 하여 간접적으로 실현되는 원리일 뿐이라는 점에 대하여 세밀한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다. 지배의 문제로부터 결합의 문제로의 패러다임 전환 자체가 이미 결합 형식에 대한 해명이라는 과제를 해소시키고 있었다.


 이 문제는 오늘날의 민주공화주의에서도 해명되지 못한 채 남아 있다. 민주공화주의에 대한 자유주의적 비판은 입법권을 가진 민주주의적 다수파가 함부로 할 수 없는 헌법적 기본권이나 인권에 호소하며 헌법국가의 옹호로 나타났으며, 좌파적 비판은 자유주의적 헌법국가 또는 근대의 '민주공화주의' 이념 그 자체에 대항하여 다수 지배라는 고전 고대적 의미로 민주주의 개념을 부활시키곤 했다. 결합형식으로서의 민주주의에 관한 탐구는 아직 전개되지 못한 채 남아 있다.



+α 근대: 사적 소유(private 所有)와 군사자원

 

- 본래 사적(private)이라는 말은 그 어원이 말해주고 있듯이 무엇이 박탈된’(privative)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사적 영역에 박탈되어 있는 인간의 본질은 무엇인가? “타인이 보고 들음으로써 생기는 현실성의 박탈, 공동의 사물세계의 중재를 통해 타인과 관계를 맺거나 분리됨으로써 형성되는 타인과의 객관적관계의 박탈, 삶 그 자체보다 더 영속적인 어떤 것을 성취할 수 있는 가능성의 박탈이 그것이다. 고대 폴리스에서 사적영역은 박탈이 아니었다.

- 소유(所有)는 한자 개념이 암시하고 있듯이 장소의 가짐이다. 소유가 마음대로 처분할 수 있는 점유 또는 부와 동일하지 않다는 사실은 고대 정치에 있어서 본질적이다. 그런데 근대의 자본주의 과정에서 소유는 점차 구체적 공간과 장소의 성격을 상실하고 자의적으로 점유, 처분, 양도할 수 있는 동산의 성격으로 변질되었다.

- 봉건제에서는 무력수단의 소유가 곧 생산수단 소유의 기반이 되고 또한 무력이 잉여생산 수취의 직접적 수단이 되었다. 그런데 백년전쟁이 마감되면서 봉건제의 군사적 기반이었던 기사군 양식은 새로운 군사기술과 이에 따른 새 군사자원의 등장, 즉 화기 및 보병군의 등장으로 대체된다. 새롭게 등장한 체제는 증가된 부담의 균등한 배분, 그 부담에 상응하는 정치참여의 권리부여와 부담에 대한 동의형성을 위한 정치적 제도 마련을 보장하는 것이었다. 형평원칙에 입각한 부담의 배분은 지배층의 특권폐지를 바탕으로 하는 부담의 국민화로 그리고 이에 상응하는 정치적 참여의 국민화를 낳았다.

 

 

 

 

참고문헌

 

레오 스트라우스, 정치철학이란 무엇인가, 아카넷, 2002

나종석, 홉스의 정치철학과 고전적인 정치철학의 붕괴, 사회와 철학 제6, 2003

박상섭, 근대국가와 전쟁, 나남신서, 2007

박홍규, 민주주의자 홉스의 리바이어던, 인물과 사상 93, 2006

볼프강 케스팅, 홉스, 전지선 옮김, 인간사랑, 2006

아리스토텔레스, 니코마코스 윤리학, 최명관 옮김, 훈복문화사, 2005

요한네스 힐쉬베르거, 서양철학사 하권: 근세와 현대, 강성위 옮김, 이문출판사, 2007

조지 세이빈`토머스 솔슨, 정치사상사2, 송유보`차남희 옮김, 한길사, 2002

토마스 홉스, 리바이어던, 신재일 엮어옮김, 서해문집, 2007(영문판으로는 http://etext.library.adelaide.edu.au/h/hobbes/thomas/h68l/ 을 이용)

한나 아렌트, 인간의 조건, 이진우`태정호 옮김, 한길사, 1996

A. 바루치, 정치 철학,이진우 옮김, 서광사, 1991

Posted by Economist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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