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서양철학사를 수강하며 작성한 레포트를 정리한 것입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행복



 인간은 왜 사는가? 아리스토텔레스에 따르면 인간은 행복하기 위해 산다. 니코마코스 윤리학의 출발점인 동시에 전체를 끌어가는 핵심개념이 바로 행복이다. 아리스토텔레스에 따르면, 인간의 모든 의도된 행위는 어떤 목적을 지향하며, 이 목적이 성취되면 이 목적은 다시 더 높은 목적을 위한 수단이 돼 그 위의 목적에 이바지한다. 이렇게 목적과 수단의 지속적인 연쇄관계의 계단을 계속 밟아 올라가면, 더 이상 다른 것의 수단이 아니라 그 자체가 목적인 최종 목적지에 도달한다. 이것이 다름 아닌 인생의 가장 좋은 것(최고선)이자 궁극적인 목적인 행복eudaimonia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다음으로 행복에 대한 통념들을 검토한다. 첫 번째 견해는 행복은 쾌락 혹은 즐거움에서 성립한다는 견해이다. 그러나 이러한 삶이 짐승들에 알맞은 삶이라 욕망의 노예가 될 뿐인 삶이라고 평가한다. 두 번째, 사람들이 행복의 내용으로 생각하는 명예를 중심에 놓는 삶을 아리스토텔레스는 정치적 삶의 유형으로 분류한다. 그러나 아리스토텔레스는 이것 역시 피상적이기에 진정한 행복의 내용이 되기 어렵다고 평가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행복이 우리에게 고유한 것이며 쉽게 박탈될 수 있는 어떤 것이 아니어야 하는데 명예의 경우 명예를 받는 사람이 아니라 주는 사람이 더 결정적이기 때문이라는 지적을 한다. 그 다음 아리스토텔레스는 간단하게 언급하지만, 을 버는 삶을 언급하며 부는 그것 자체가 목적이 아니며 다른 어떤 목적을 위해서만 유용하다는 단순한 이유로 행복의 후보에서 배제된다.


 이런 통념적인 삶이 위에서 논증하듯 진정한 행복의 내용이 되기에 부족하다면, 진정한 행복이 되려면 갖추어야할 조건들은 무엇인가? 아리스토텔레스는 성취가능성, 완전성, 자족성을 논변한다.


1) 행복은 만약 그것이 인간이 추구하는 것이라면, 인간적 행위로 성취할 수 있거나 도달할 수 있는 것이어야 한다.

2) 행복은 항상 바로 자기 자신 때문에 선택될 뿐 자신 아닌 다른 것 때문에 선택되지는 않고 동시에 다른 모든 것들은 바로 이것을 위해 선택되는 단적으로 완전한 목적이다.

3) 행복은 그것만으로 삶을 선택할 만한 것으로 그리고 아무것도 부족함이 없게끔 만드는 자족적인 목적이다.


 행복을 최상의 좋음으로 정의한 후 이렇게 정의된 최상의 좋음으로부터 성취가능성, 완전성, 자족성까지 도출해 낸 후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의 기능으로부터 인간의 행복을 정의한다. 이것은 일반적으로 좋음이 수행해야 할 혹은 수행할 것으로 기대하는 기능에 비추어 정의된다는 사실로부터 도출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이 아니면 잘 할 수 없는 인간의 고유한 기능에서부터 인간의 행복을 정의하려 하는데, 그것은 다른 식물 동물과 구분하는, 이성이라는 인간 고유의 능력이다.


 인간의 기능이 이성과 일치하는 혹은 적어도 이성과 분리되지 않은 영혼의 활동이라는 것을 상정한다면 뛰어난 사람의 기능은 이것들을 잘 그리고 훌륭하게 행하는 것이어서 각각의 기능은 그것의 부류에 고유한 탁월성에 따라서 수행될 때 잘 수행되는 것이다. 이로써 인간의 좋음은 탁월함()에 따르는 영혼의 활동이라는 것이 밝혀진다.


 즉, 좋은 혹은 뛰어난 하프 연주자가 하프를 잘 연주하는 사람이듯이 훌륭한 인간도 인간의 고유한 기능인 이성적 삶을 잘 살아내는 사람이다. 인간 고유의 기능을 그 탁월성에 따라 영혼이 활동해 낼 때 인간은 자신의 고유한 좋음()에 이르는 것이며 행복하다는 것이다.


 인간 고유의 이성적 기능을 행복과 좋음()에 연결시킨 아리스토텔레스의 행복관은 자칫 인간 전체의 다른 기능을 배제할 우려의 여지가 존재한다고 생각한다. 영화 이퀼리브리엄(Equilibrium, 2002)에서 그려지고 있는 모든 감정이 통제되는 미래도시를 우리가 행복한 사회, 인간다운 사회라고 규정짓지 못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따라서 아리스토텔레스의 행복관을 프로크루스테스와 같은 태도로 받아들이는 것은 큰 문제가 있다.




 나는 인간의 고유한 기능과 탁월성에 따라 인간 고유한 좋음과 행복에 도달하는 아리스토텔레스의 행복관을 높게 평가한다. 그러나 나는 오히려 인간의 성적 충동과 소외를 가지고 행복의 내용을 즐겨 바라본다. 나는 인간이 이성으로 인해 분리되어있는 실재로서의 자기를 인식할 수 있기 때문에 불안감과 같은 소외를 느낀다고 보기 때문에 이성의 기능을 탁월하게 발휘하는 것만으로는 행복을 찾을 수 없다고 본다. 여기에서는 오히려 인간의 성적 행위가 이와 같은 불안감과 소외를 극복하고 행복해지는 길을 제시한다. 그것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화폐와도 같은 추상에 대한 에로스가 아니라, 구체적 개별에 대한 에로스이다.

Posted by Economist21

댓글을 달아 주세요

2009년 서양철학사를 수강하며 플라톤 향연에 대해 작성한 발제문을 정리한 것입니다. 



Platon : SYMPOSIUM



 델포이의 아폴론 신전 현관 기둥에 새겨졌다는 너 자신을 알라라는 말로 우리에게 친숙히 다가오는 소크라테스는 평소 스스로 무지를 자처하며, 인간들 가운데 가장 지혜로운 자는 앎에 관한 한 자신은 아무것도 아님을 아는 자라는 철학을 펼쳐나간 인물이다. 그런 그가 향연에서 예외적으로 에로스에 관한 것 외에는 아무것도 모른다, 즉 에로스에 관해서는 안다고 피력한 바 있다(177d). 이것은 과연 모순된 발언일까? 나는 그렇지 않다고 본다.


 『향연에서 소크라테스와 디오티마의 논의를 보면, 에로스는 다른 것, 자신에게 없는 어떤 것과 관계를 맺는 가운데 존재하기 때문에 신이 될 수 없으므로 다이몬에 지나지 않으며, 그것은 인간과 신의 중간적 존재, 불멸과 필멸의 중간적 존재이자 중개자, 매개자의 입장을 취한다. 다른 한편으로 지혜를 추구하는 사람들은 지자도 아니고 무지한 자도 아닌 중간적 존재다. , 자기가 무지하다는 것을 자각하며, 지혜를 추구하고 사랑하는 사람인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예외적으로 에로스에 관해서는 안다고 말한 소크라테스는 결국 평소와 다름없이 자신이 무지하다고 말하고 있는 셈이 된다. 요컨대, 에로스로 표명되는 무지의 자각은 신이 아닌 인간이 완전한 지혜를 얻지 못하지만 끊임없이 추구할 수 있는 가능성을 지닌, 비극과 희극이 동시에 공존한다.


 『향연에서 아리스토파네스의 이야기 역시 이 비극과 희극은 동시에 공존한다. 그는 완전함을 상징하는 원의 형태를 띠고 있던 인간이 대단한 힘과 능력으로 신에게 대들었고, 그로 인해 인간이 신에 의해 반으로 나뉘어졌다고 말한다. 그리고 잃어버린 예전의 전체에 대한 욕망과 노력을 에로스라고 정의한다. 이는 인간이 현 상태는 완전하지 않는 비극적 요소를 지니고 있는 동시에 완전함에 대한 가능성을 제시한다는 희극적 요소(에로스) 역시 존재한다는 점에서 앞의 논의와 비슷한 측면을 지니고 있다. 나는 이러한 점이 소크라테스가 향연이 끝난 새벽에 아리스토파네스에게 희극을 쓸 줄 아는 것과 비극을 쓸 줄 아는 것이 동일한 사람에게 속할 수 있다는 것을 말한(223d) 까닭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소크라테스의 연설을 들은 다른 모든 이들이 그의 연설에 모두 동의하는 모습을 취했을 때 아리스토파네스가 그에 대해 반박하려 했듯이(212c), 둘 사이에는 큰 간극이 있다. 비록 둘 모두 에로스를 욕구로 정의하고 있지만, 아리스토파네스 연설 속에서 이 욕구는 완전함에 대한 회복으로 회귀적인 성격을 지닌 반면, 소크라테스의 연설 속에서는 지속적인 상승의 노력으로 분출한다.


 즉, 아리스토파네스에게 있어 인간 불완전의 결여가 잃어버린 자신의 반쪽이라면 소크라테스에게 있어서는 아름다움이며, 에로스는 그 자체로 아름다운 것을 수직적으로 추구하게 된다. 말하자면 아리스토파네스의 딸꾹질이 고통에서부터 딸꾹질 이전으로의 회복되는 과정을 그린다면, 소크라테스 연설은 자신이 지니지 못한 아름다움, 좋음으로 향하는 과정을 그린다.


 소크라테스는 아리스토파네스를 의식하여, 사랑하는 자는 자신과 같은 것을 찾는 자가 아니며, 자신의 손과 발이 자신에게 해로운 것이라 생각될 때 자신의 것일지라도 잘라내 버리려고 하듯이, 오직 좋음을 추구한다고 말한다(205d-206a). 그런데 아리스토파네스는 좋음과 같은 도덕적 문제들에 대한 언급이 없기에 이에 취약한 약점을 지닌다. 그에게 도덕성의 문제는 인간과 신과의 관계 회복이라는 종교 문제와 연관 짓는 것에서 끝나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소크라테스와 아리스토파네스 에로스에 관한 논의는 사실 성 자체보다 다양한 인간관계의 정신적 특징 혹은 사회의 기능으로 파악하는 데 중점을 두었다는 한계를 지니고 있다고 생각된다. 성해방운동가들이 성적인(sexual) 것과 생식적인(genital) 것을 분류하는 바를 따르자면, 이들은 성적인 것 자체의 중요성보다도 생식적인 부분을 많은 부분에서 언급한 것이다.


 그런 부분에서 가장 소란스럽게 향연에 등장하는 알키비아데스가 이들에 대해 언성을 높일 수 있는 여지가 있다. 실제로 그는 자신을 성적으로 상대하려 하지 않는 소크라테스에게 큰 불만을 토로하고 있다. 하나로부터 둘로 둘에서 다시 모든 아름다운 몸으로, 몸에서 영혼의 아름다움 등으로의 아름다움 자체에 도달하는 소크라테스의 에로스에서는 물론 하나 역시 소홀히 해서는 안 되지만 사랑과도 같이 정열적으로 그 하나에만 전념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이것은 사실 성을 연구하는 현대의 학자들에게는 매우 중요한 문제가 된다. 우리는 소크라테스와 같이 모두를 사랑하고, 모두에게 사랑받는 자에게 알키비아데스처럼 성적 수치심을 느끼기 때문이다. 그것은 자신의 남편이 모든 여자들에게 잘해주지를 않기를 바라는 것과 같다. 그리고 누구나 알키비아데스처럼 이성이 자신의 성적 매력에 이끌려 성 행위를 하기를 원하지, 소크라테스와 같은 사람은 자칫 자기에게 동정을 베푼다는 생각을 하기 쉽다.


 아리스토파네스와 소크라테스의 이야기가 비슷한 구조를 가지면서도 차이를 지녀 플라톤의 철학이 잘 표현된다고 말한다면, 알키비아데스의 이야기는 플라톤의 철학을 풍부하게 만드는 요소라 말할 수 있지 않을까?

Posted by Economist21

댓글을 달아 주세요

2009년 서양철학사를 수강하며 플라톤 향연에 대해 작성한 발제문을 정리한 것입니다. 



Platon : SYMPOSIUM

e peri erotos, ethicus, 199c~201e


 

. 소크라테스와 아가톤의 예비 논의

 

- 소크라테스는 아가톤에게 몇 가지 작은 질문을 하는 것을 허락해줄 것을 요청(199b)

- 아카톤의 동의에 근거하여 설명을 진행 (문답법)

- 문답법 : 소크라테스적인 문답법은 참인 것을 주장함으로써가 아니라 응답자가 알고 있다고 동의하는 것을 가정함으로써 진행하는 것이 특징. 논박(elengkos)은 문답법의 중요한 부분이며 귀류법적인 성격을 지님.

- 소크라테스는 아가톤을 앎에 대한 거짓된 자신감에서 벗어나게 함. 마침내 그는 자신이 말했던 것들에 대해서 전혀 알지 못한다고 고백.(201b)

 

아름답지 않은 에로스

 

1. 관계 개념으로서의 에로스

 

에로스는 특정 대상을 사랑하는 것인지, 아니면 아무것도 아닌 것을 사랑하는 것인가?’에 대해 답해보게나. 내가 묻고자 하는 것은 에로스가 특정의 어머니나 아버지에 대한 사랑인지를 묻는 것이 아니라, 예를 들어 아버지 자체에 대하여 아버지는 특정인의 아버지인가 아니면 그렇지 않은가를 묻는 것이라네. (199c-d)

 

- 플라톤은 어머니나 아버지가 반드시 누군가의 어머니와 아버지이듯이 에로스 역시 언제나 무엇인가에 대한에로스임을 말하고 있다.

- ‘아버지형제라는 말은 언제나 누구의아버지, 또는 누구의형제인 한에서만 의미를 갖는데, 에로스도 바로 그런 의미에서 어떤 것의에로스이다.

- 에로스는 어떤 특정한 에로스가 아니라 에로스인 한에서의 모든 에로스이다. (아버지 자체)

 

2. 욕망으로서의 에로스

 

어떤 것을 욕구하는 다른 모든 사람들은 자신에게 있지 않은 것 즉 자신이 갖고 있지 않은 것을 갈구하는 셈이니, 결국 자신이 갖고 있지 않으나 본인이 필요로 하는 것, 바로 그러한 것들에 대해서만 욕망과 사랑은 존재한다고 할 수 있네. (200e)

 

- ‘어떤 것의 에로스라고 할 때 그 어떤 것은 에로스가 욕망하는 대상으로서의 어떤 것.

- 그런데 아무도 자신이 이미 가지고 있는 것을 욕망하지 않으며 이미 가지고 있는 것을 바란다고 할지라도 그것은 나중에도 계속 가지고 있기를 바라는 것.

- 따라서 어떤 것의 에로스아직 가지고 있지 않은 것(결여하고 있는 것)에 대한 사랑

 

3. 아름다운 것을 결여한 에로스

 

그렇다면 에로스는 자신에게 결여된 것 즉 갖고 있지 않는 것을 사랑하는 게 아니겠는가?”

그렇습니다.”

결국 에로스는 아름다움이 결여되어 있고, 그것을 갖고 있지 않은 셈이 되나?

필연적으로 그렇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되나! 자네는 아름다움이 결여된 그것을 전혀 소유하고 있지 못한 자를 아름답다고 주장하는가?”

절대로 그렇지는 않습니다.”

그렇다면 논의가 이렇게 전개되었는데도 불구하고 자네는 여전히 에로스가 아름답다고 주장할 것인가?”(201b)

 

생각해보기

- 아름다움을 향한 욕망에 사로잡힌 정신 (참고문헌 : 김상봉, 나르시스의 꿈, 한길사, 2002, pp.39-66)

 

에로스는 성적인 욕망, 혹은 이것이 동반된 사랑을 뜻하는 말인데 그것은 인간의 가장 원초적인 욕망과 거기서 뿌리박고 있는 정념으로서의 연애감정을 가리키는 말이었다. 그런데 플라톤은 이 에로스에 대해 상당히 부정적이었다. 그것은 수치와 사려를 알지 못하는 한낱 맹목적인 충동에 지나지 않은 것이어서(571c), 성욕에 사로잡힌 것은 술에 만취된 상태나 미친 상태와 마찬가지로(573c) 무정부적이고 무법적인 상태에 떨어지는 것(515a)이라고 보았다. 루소(J.J.Rosousseau) 역시 이와 비슷하게 묘사한다.

 

만일 이 억제력이 없는 난폭한 격정에 사로잡혀 부끄러움도 조심성도 없이 날마다 자기 피를 흘리더라도 사랑의 쟁탈전을 벌인다면, 인간은 도대체 어떻게 될 것인가? (루소, 최석기 역, 인간불평등기원론/사회계약론(동서문화사, 2007), 59)

 

그런데 우리가 앞서 살펴봤듯이, 에로스는 욕망의 대상에 대한 지향이다. 그리고 플라톤의 견해에 따르면 그 욕망의 대상은 아름다운 것이다. 그렇기에 에로스란 한 갓 육체적 충동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아름다운 사람과 상태를 꿈꾸는 심미적 동경으로 발생하게 된다. 그것은 감성적 충동을 넘어가는 어떤 것, 즉 에로스 속의 어떤 정신적 가치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루소 역시 똑같은 방식으로 에로스의 육체적 계기와 정신적 계기를 구분한다.

 

처음에 연애감정 중에서 정신적인 것과 육체적인 것을 구별하자. 육체적인 것이란 이성끼리 서로 맺어지게 하는 일반적인 욕구이다. 정신적인 것이란 그 욕구를 결정하여 그것을 단 하나의 대상에 고정시키거나 적어도 그 선정된 대상을 위해 한층 고도의 정력을 그 욕망에 쏟는 일이다. (같은 책, 같은 쪽)

 

따라서 에로스를 가리켜 플라톤이 아름다움에 대한 선망이라 규정할 때, 그는 에로스를 자기 속에 정신적 동경을 품은 육체적 욕망으로 이해하는 것이며, 그것의 본질을 의식의 감성적 차원으로부터 지성적 차원으로의 이행 속에서 또는 그 두 지평의 매개 속에서 파악하는 것이기도 하다. 이와 같은 한에서, 에로스는 억압되고 통제되어야 할 야수적 충동이 아니라, 도리어 인간의 영혼을 감성적 직접성으로부터 지성적 깨달음으로 인도하는 도야의 원리이다.

 

. 소크라테스와 디오티마와의 대화에 대한 이야기

 

- 소크라테스는 문답식 논증을 계속하고 싶어 하지 않는다.(201c)

- 소크라테스는 디오티마라는 인물을 소개하고 그녀와의 대화를 전하는 방식으로 논의를 전개

- 디오티마는 소크라테스의 역할을 대신하고, 소크라테스는 아가톤을 대신

- 디오티마는 허구적 인물로 여겨짐, 211a-e에서 내놓는 형상 이론은 플라톤의 것이지 소크라테스의 것은 아니기에 소크라테스가 디오티마로부터 그것을 배웠다는 것은 그럴듯하지 않음.

 

플라톤이 디오티마를 소크라테스의 대역으로 설정한 이유는 무엇일까?

 

'사유의 즐거움' 카테고리의 다른 글

아리스토텔레스의 행복  (0) 2015.10.11
플라톤 향연, 에로스를 사유하다  (0) 2015.10.10
플라톤 향연 (199c~201e)  (0) 2015.10.02
플라톤 향연 (172a~178a)  (0) 2015.09.25
Thomas Hobbes의 정치사상  (0) 2015.09.22
영화 마하 2.6의 실패요인  (0) 2015.09.13
Posted by Economist21

댓글을 달아 주세요

2009년 서양철학사를 수강하며 플라톤 향연에 대해 작성한 발제문을 정리한 것입니다. 



Platon : SYMPOSIUM

e peri erotos, ethicus, 172a~178a



(도입부의 이야기 전달 관련 인물)

 

아폴로도로스(Apollodoros)

이 대화편에서 동료들에게 향연 이야기를 들려주는 사람. 아테네 팔레론 사람(172a, 파이돈59b)으로 소크라테스를 마음 깊이 경모한 정열적인 제자(173b, 파이돈59a, 크세노폰 소크라테스의 변론(28), 크세노폰 소크라테스의 추억311). 감수성이 예민하고 격정적 성격의 소유자(173 e). 소크라테스의 사형을 눈앞에 두고 통곡했다는 기록도 (파이돈117d) 그러한 성격을 보여준다. 소크라테스 재판시에는, 플라톤, 크리톤과 함께 스승을 위해 30므나의 벌금을 납부하는 보증인이 되기도 하였다(소크라테스의 변론38b).

 

글라우콘(Glaukon)

아폴로도로스의 친구. 플라톤의 외삼촌인 카르미데스의 아버지(222b)도 같은 이름이며, 국가에 나오는 플라톤의 형제도 같은 이름이다. 이 대화편의 언급(172c)만으로는 어느 글라우콘인지 확정하기 어렵고, 3의 인물일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포이닉스(phoinix)

이 대화편에서의 언급(172b) 외에는 알려져 있지 않은 인물.

 

아리스토데모스(Aristodemos)

아테네의 퀴다테나이온 출신 아폴로도로스와 포이닉스에게 향연 이야기를 전해준 사람. 이 대화편에서 그는 작달막하고 늘 맨발로 나다니는 사람으로 소크라테스와 함께 향연 모임에 직접 참석한 것으로 묘사된다. 아폴로도로스와 달리 오래전부터 소크라테스의 제자였으며 그것도 가장 열렬한 추종자 중 한사람이었다(173b).

 

1. (172a~174a)아폴로도로스가 전하는 향연 이야기 [이야기의 전달 과정]

 

전달과정의 복잡성(거리두기172b, 이야기 내용의 중요성173b)

[참고문헌 : 강상진, 플라톤 향연의 틀 이야기독특한 거리두기, 한국서양고전학회, 서양고전학연구15, 2000, pp.25-46]

 

- 향연에 관한 구두전달의 연쇄(172b)는 향연이 이렇듯 여러 입을 거치고 있다는 사실로부터 향연과 거기서 행해진 연설에 상당한 무게를 더해줌

- 오랜 세월이 흐른 후(173a) 계속 인구에 회자되고 있는 일은 그 향연이 실제로 벌어졌던 순간을 넘어서는 의미를 가질 때 보통 일어나기 때문에 중요[H.Reynen, "Der vernittelte Bericht im Platonisehen Symposion." in: Gymnasium 74 (1967), 415.]

- 여러 입을 거치고 있다는 사실은 보고의 정확성에 의문을 제기할 수 있지만 아폴로도로스는 최근 글라우콘에게 한번 향연에 관한 얘기를 했으므로 준비가 되어있음. 소크라테스의 확인(173b)

거리두기(대화, 틀이야기 구성)의 단순히 문학적 의미, 철학적 의미를 생각해보자

아폴로도로스는 에로스와 소크라테스의 에로스와 비교해보고, 왜 아폴로도로스가 이야기의 전달자인지 생각해보자

 

2. (174a~175e)아리스토데모스의 서언 [향연 이야기의 시작 부분]

[참고문헌 : 이강서, 플라톤 철학의 아폴론적 계기와 디오니소스적 계기, 박희영 외 지음, 플라톤 철학과 그 영향, 서광사(2001), pp.39~64]

 

디오니소스와 향연

- 일반적으로 향연이 진행되는 동안 손님들에게 음식은 제공되지 않음. 향연에 앞서 식사를 하지만 특정한 정화 행위를 통해 향연과 분명히 나누어짐(175e~176a)

- 포도주를 마시는 일은 향연에서만 이루어지며 이는 명백히 종교적인 성격의 것으로 포도주의 신 디오니소스와 연관

- 향연에서 에로스를 두고 행해진 연설들은 일종의 연설 경연, 연설 시합의 형태로 이루어짐. 부르크하르트(J. Burckhardt)는 그리스 사람들을 경쟁하는 사람들’(agonale Menschen)로 특징짓고, 베르베(H. Berve)그리스인의 경쟁심’(agonale Geist der Griechen)이라고 표현, 니체도 그리스 문화의 원동력을 경쟁심’(agonaler Geist)에서 찾음[W.Brukert, Greek Religion, 105~107('agon') : 차하순, 정동호 부르크하르트와 니체(서강대 출판부, 1986), 213~218(‘그리스인의 삶 속에 있던 경쟁자적 성향’]

- 향연의 연설 시합은 또 한가지 점에서 디오니소스와 관계를 맺음(175e)

- 헬라스 사회의 향연에서의 성행위 : 주연의 규칙, 그러나 깨짐

 

디오니소스와 에로스의 연관점은 어디에 있을까 생각해보자

소크라테스가 신발을 신은 이유, 초대받지 않은 아리스토데모스의 향연 참석, 소크라테스의 명상 등의 의미를 찾아보자

 

3. (177a~178a)에릭시마코스의 연설 주제 제안

[참고문헌 : 김인곤, 플라톤 향연, 서울대학교 철학사상연구소,철학사상별책 제5권 제4(2005) ]

 

찬양 연설의 형식

- 찬양 연설은 고대의 모범적인 수사술의 한 형식. 이 연설 형식의 지침은 기원전 300년경의 수사술 논문에 들어 있다. 그리고 향연에서의 찬양은 분명히 이 형식을 따른다. 찬양이 포함해야 할 내용은 이런 것이다. 찬양대상의 기원 또는 혈통(계보), 또는 고귀한 출생(가문). 힘이나 아름다움 같은 좋은 자질. 지혜, 정의, 용기와 같은 덕(뛰어남)과 명성을 얻는 행위. 생활 습관이나 방식. 다른 사람들의 업적과 대조되는 업적들. 그리고 이 연설은 신과 숭배자 간의 관계의 적절한 형태가 호혜 관계, 즉 신을 숭배하고 신으로부터 은혜를 입는 관계임을 전제한다.(Gill, 1999, 20)

 

우리가 보통 알고 있는 소크라테스의 대화법은 주제에 관해서 어떤 적극적인 대답을 내 놓는 대신에 스스로 무지(無知)를 자처하면서 상대방이 가진 의견의 불충분함과 한계를 폭로하고는 것으로 끝난다. 그런데 여기서의 소크라테스는 좀 다르다. 유독 에로스에 관해서(ta erōika)만은 알고 있다고 말한다.(177d) 무엇을 의미하는가?

Posted by Economist21

댓글을 달아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