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외교사 연표


유럽에 있어서 민족주의와 세력균형

독일·이태리 민족국가 탄생과 영국에 의한 세력균형

유럽의 세력균형 변화와 극동에서의 세력균형

 


1789 프랑스 대혁명


1792 프랑스와 오스트리아, 프로이센 전쟁


1796-1815 나폴레옹 전쟁


1814 빈회의


1815 신성동맹 형




1853-56 크림전쟁


1870 독일, 이태리 통일


1873 비스마르크, 프랑스 고립. 독일-오스트리아-러시아 3제협상


1877-78 러시아 터키와의 전쟁 승리. 그러나 베를린 회의를 통해 러시아 발칸반도 진출 좌절


1879 독일-오스트리아 양국동맹


1882 3국동맹


1894 프랑스-러시아 동맹 체결 (비스마르크가 주도한 러시아, 프랑스 분리 노력이 실패)

 



1894 중일전쟁


1898 미서전쟁


1904-05 러일전쟁


1905 을사조약


1910 한일합병조약


 프랑스혁명 전쟁은 왕조간의 전쟁이 아니라 전쟁의 형태를 취한 국제 규모에 있어서의 계급투쟁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 프랑스혁명은 신권왕국의 입장에 선 부르봉왕조의 통치를 인민주권론의 이름으로 부인한 것이다. 여기에 대응하여 처음으로 전유럽적 규모의 세력균형이 적극적으로 시도되었다. 이후 나폴레옹을 몰락시킨 러시아에 대한 공포로 전환된 가운데 빈회의 이후 정통주의와 세력균형을 지도원리로 하는 복고의 시대로 돌아간다


 그러나 각국의 피지배계급은 이미 프랑스혁명의 자유, 평등선언 뒤 절대주의적 정치체제가 타도되는 것을 목격하였고, 혁명전쟁 및 나폴레옹 전쟁을 통해서 프랑스의 세력 하에 놓인 지역에 혁명의 성과가 이식, 도입되는 것을 보았다. 이렇게 치열한 전유럽적 세력균형과 민족의식이 발달하는 역사 속에서 빈회의 후 각국의 피지배계급, 피지배민족 간에는 정치적 자유운동, 민족적 해방운동이 발전되어 국제정치의 중요한 축으로 역할하게 된다.

 독일, 이태리 2대 민족국가의 탄생으로 유럽국제정치의 진전은 빈체제를 완전히 붕괴시키고 이것은 빈회의 이후 세계정치에 있어서 영국의 우월적 지위를 더욱더 확고하게 하였다. 그것은 영국에 의한 세력균형과 영국해군에 의한 것으로 영국 산업자본의 세계적 우월에 뒷받침되고 있었다. 그러나 이 시대 영국에 의한 평화를 위협하는 것으로 러시아제국이 있었다.


 비스마르크가 제국재상에 있을 때와 지위를 떠난 후 유럽 국제정치에 거대한 변화가 생기게 되는 과정은 그의 세계정치에의 영향을 보여준다. 우선 독일 내 빌헬름 2세의 세계정책에 의한 강력한 제국주의정책과 이것이 영국을 자극함으로 3국협상 성립에 이르는 것으로 나타난 국제정치의 불안정성이 그것이다. 3국협상 성립에 의해 유럽 제국주의 대국은 양분되어 대립하게 된다. ‘영광스러운 고립으로 위대한 균형자로서 역할해 온 영국이 반독 3국협상에 속하게 됨으로서 이제 유럽 제국주의 각국 간의 세력균형은 전혀 우연에 맡겨지게 된 것이다.

 제국주의 시대는 비유럽에 있어서는 극동에 있어서 미·의 등장으로 진전한다. 미국은 1823년 먼로주의 선언으로 유럽의 세력균형으로부터 아메리카 대륙에 있어서 자국의 안전을 보장받으려 했다. 미서전쟁 후 동아시아 영토로 진출하면서 극동국가로 등장한다. 그후 만주 및 한국을 둘러싼 러일전쟁은 일본과 러시아 양국 사이의 전쟁일 뿐 아니라 전쟁의 진행 및 수습에 서양제국주의 각국이 관여하여 러일전쟁과 세계정치와의 연관을 갖게 하였다. 특히 미국은 화평주선을 함으로써 러·일 양국간에 세력균형을 수립케 하였다. 더 나아가 러·일전쟁과 세계정치와의 연관은 패전 후 러시아 제국주의가 팽창의 방향을 극동에서 발칸반도로 전환해 제국주의적 대립을 격화하게 한 것으로도 나타났다.


 세계 각국에 자본주의 성장은 제국주의 시대를 가져오며 세계정치의 중심점은 다원화되기에 이르렀다. 유럽대국들, 다음에 미·일이라는 비유럽국가가 세계정치에 등장하면서 그와 함께 영국에 의한 세력균형, 영국에 의한 평화시대와 다르게 세계정치의 중심점은 현저하게 다원화된 것이다.


 교린질서의 붕괴와 이후 제국주의 세계정치 질서 속에 강제 편입된 한국은 씻을 수 없는 과거를 지니게 되었다.

 

Posted by Economist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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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서양철학사를 수강하며 작성한 레포트를 정리한 것입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사랑(philia)과 자본주의 경제




목차

 

. 들어가는 말

. 아리스토텔레스의 사랑(philia) - 탁월성(, arete)의 일종으로서의 사랑

. 사랑은 왜 필요한가 - 사랑과 행복 그리고 윤리

. 자본주의 경제의 물상화(reification)와 사랑(philia)

. 맺음말

 

 

. 들어가는 말

 

 많은 이들은 이 글의 제목인 아리스토텔레스의 사랑(philia)과 자본주의 경제를 보고, 철학적 개념인 사랑(philia)을 경제학적으로 바라보는 것에 대해 여러 의혹들을 품을 수 있다. 그러나 경제학이라는 것이 철학적으로 이미 많이 다루어지고 있는 자본주의에 대한 분석이라는 것을 상기한다면, 내가 이 글을 통해 철학적 개념인 아리스토텔레스의 사랑(philia)을 경제학적인 방법으로 다루는 것에 대해 큰 반감을 갖지 않을 수도 있다. 왜냐하면 내가 시도하고자 하는 것은 일반적으로 경제학이라고 받아들여지고 있는 여러 수치들에 대한 고뇌가 아니라 자본주의 경제에 대한 성찰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런 성찰에 있어 단지 아리스토텔레스의 사랑(philia)의 개념을 중점적으로 다루고 있을 뿐이기 때문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사랑(philia)의 개념을 통해 자본주의를 성찰하고자 했던 그동안의 시도들은 아리스토텔레스가 유익함을 이유로 하는 사랑(philia)이 불완전하다고 했던 것에 주로 기초하여 논의를 진행해왔다. , 경제적 이익의 동기로 친분을 쌓고자 노력하는 현대인들을 비판할 수 있는 근거가 되어왔었다.


 이런 협소한 수준을 넘어서는 보통 인격적 사랑의 개념으로 사용되어 현대 자본주의 사회의 인간관을 비판해왔었다. 여기서 사랑(philia), phila는 좁은 의미에서의 우정뿐만이 아니라 보다 넓은 의미에서의 우정으로 파악될 수 있는 정신-인격적 사랑으로 이해되고 있다.[각주:1] 이는 앞의 논지를 발전시킨 것이다. , 자본주의 사회에서 경제적 이익을 바탕으로 하는 인간관계가 지배적인 것을 비판하고 정신-인격적인 관계를 주장하는 것이다.


 나는 이런 방식으로 그동안 시도되어 왔던 것을 여기서 다시 반복하고자 하지 않는다. 그러한 논의들은 분명히 충분한 가치가 있지만, 왜 자본주의 경제에서는 유독 경제적 이익을 이유로 하는 사랑이 지배적인지에 대한 경제 사회구조적인 이해가 결여되어 있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아리스토텔레스의 사랑(philia) 개념을 깊이 있게 다루고 있지 않다. 따라서 나는 이 글을 통해 아리스토텔레스의 사랑(philia) 개념을 중점적으로 살피며, 자본주의 경제 사회에서 인간관계가 왜 그렇게 피상적이며 경제적 이익을 근거로 하여 성립하게 되는지에 대한 분석을 시도할 것이다.


 이 글의 순서는 다음과 같다. 먼저 아리스토텔레스의 사랑(philia)을 분석하면서 아리스토텔레스의 사랑(philia)이 탁월성의 일종으로서의 사랑이며, 그것이 윤리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다는 것을 논할 것이다. 그리고 자본주의 경제에서 윤리적인 삶이 시행되기 어려운 이유, 즉 사랑(philia)이 실현되기 힘든 원인을 물상화(reification)를 가지고 설명할 것이다. 이러한 글의 구조는 단순히 아리스토텔레스의 사랑(philia)을 논하며, 이러한 철학적 개념이 현실에 실현되기를 단순히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자본주의 경제의 문제점들이 극복되어야지만 사랑이 실현될 수 있고 윤리적인 삶을 살 수 있다는 것을 밝히는 데에 있다. , 이 글은 아리스토텔레스의 힘을 빌려 자본주의 경제를 비판하기 위한 시도이다.

 

 

 

. 아리스토텔레스의 사랑(philia) - 탁월성(, arete)의 일종으로서의 사랑

 

 ‘philia’는 주로 우정, 사랑으로 번역되는데, 우리의 어감에는 친구가 될 수 없는 선후배나 부모자식을 포함할 수 있는 관계에 있기 때문에 우리가 일반적으로 인식하는 우정과 다소 차이가 있다. 또 성적인 사랑(eros)과도 다른 의미를 지니고 있기 때문에, 아리스토텔레스에 있어 ‘philia’가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는지 먼저 살펴볼 필요가 있다.

 

 사랑(philia)은 일종의 탁월성(arete)이거나 혹은 탁월성을 수반하는 것이다.(EN 81155a3-4)

 

 아리스토텔레스는 니코마코스 윤리학2권에서 탁월성에 관한 일반적 설명 이후, 개별적 탁월성을 열거하면서 사랑(philia)을 인간관계에서 놀이 이외의 일상적 삶에 공유되는 즐거움과 관련한 중용의 품성상태로 정의하였다.[각주:2] 여기서 인간관계는 부모자식이나 형제지간과 같은 가족 관계부터 시작하여 정치적 공동체에 소속된 동료 시민까지의 범위를 포함하는 넓은 의미의 인간관계이다.


 사랑은 일종의 탁월성이기에 탁월성의 구별과 같은 방법으로, 활동으로서의 사랑과 품성상태로서의 사랑으로 구별된다.[각주:3] 품성상태는 상응하는 활동(들의 반복)에서 생기는데, 이는 올바른 행위의 반복에서 올바른 품성상태가 생긴다.[각주:4] ,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있어 진정한 의미의 사랑은 중용에 따른 올바른 활동에 의해 형성된 품성상태이다.


 이러한 탁월성에 기초한 사랑은 유익이나 즐거움과 같이 상대방에게 우연적으로 속하는 것에 의해 성립한 것이 아니다. 유익이나 즐거움과 달리 상대방 자체의 좋음에 의해 성립한 것이며, 유익이나 즐거움 때문에 생긴 사랑은 더 이상 유익과 즐거움을 주지 못하면 사랑이 멈추는 것[각주:5]과 달리 탁월성이 지속적인 것과 마찬가지로 탁월성에 기초한 사랑은 유지된다. 좋음에 의한 사랑은 더불어 유익과 즐거움을 준다.[각주:6] 따라서 이것이 가장 완전한 사랑이다.

이렇게 아리스토텔레스에 있어 사랑(philia)은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할 수 있는 연애의 감정이나 우정과 다른 개념이다. 그가 가장 좋은 사랑을 탁월성과 관련지어 생각해본 것 역시 우리가 쉽게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다. 더불어 ‘philia’가 인격적인 사랑으로 받아들여지고 있지만, 사실 상대방 그 자체를 전인격적으로 바라보기보다는 상대방의 탁월성에 기초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 전체적 인격 그 자체를 사랑했다기보다는 선함, 고귀함을 사랑한 것처럼 보인다.


 사랑이 탁월성과 결부되어 다소 딱딱하게 보이는 이유는 다음과 같다. 서로 호의를 가지고 있고, 상대방이 잘 되기를 혹은 훌륭하기를 바라며, 또 그런 호의나 바람이 서로에게 알려져 있는, 그런 사람들의 관계가 사랑이다. 그런데 서로가 잘 되기를 바라는 것은 서로가 좋은 사람인 한에서 바란다. 나쁜 사람은 자신들에게 좋아 보이는 것 대신, 실제로는 해가 되지만 즐거운 것을 선택[각주:7]하지만 훌륭한 사람은 자신에게 좋음과 그렇게 보이는 것을 바라며 실제로 행하고 사랑하는 사람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이다. 모든 지성(nous)은 자신에게 최선의 것을 선택하며, 훌륭한 사람은 그 지성의 설득에 복종하기 때문이다.[각주:8] 따라서 사랑에는 탁월성이 결부되었고, 영혼의 지속적인 상태로서의 탁월성은 순간적인 감정과 구별되기에 사랑 역시 감정으로 바라보지 않았기 때문에[각주:9] 우리에게 다소 메마르게 다가올 수 있다.

 

 

 

. 사랑(philia)은 왜 필요한가 - 사랑과 행복 그리고 윤리


 이제 서로를 이용하지 않는 진정한 사랑은 탁월성을 이유로 하는 좋은 사람들 사이에서만 가능하다.[각주:10] 그런데 좋은 사람들은 그들 모두 자기 충족적이기 때문에 상대방을 필요로 하지 않기 때문에 사랑은 불가능하게 된다. 아리스토텔레스 역시 행복을 그것만으로 삶을 선택할 만한 것으로 그리고 아무것도 부족함이 없게끔 만드는 자족적인 목적으로 바라보았기 때문에 사랑과 행복을 연결하는데 있어 난관에 봉착할 수 있다.

 

 행복한 사람이 친구를 필요로 하는지 그렇지 않은지에 관해서도 쟁론이 있다. 어떤 사람들은 지복의 경지에 있으며 자족적인 사람들에게는 친구가 필요하지 않다고 주장한다. 그들은 이미 좋음을 가지고 있으며 자족적인 만큼 그 어떤 것도 추가적으로 필요로 하지 않다. 그런데 친구는 원래자신과는 다른 타인으로서 본인 스스로는 할 수 없는 것을 공급하는 사람이니 말이다. (EN 99, 1169b3-22)

 

 플라톤은 그가 썼던 뤼시스(Lysis)을 보면, 아리스토텔레스가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자족적인 사람들에게는 친구가 필요하지 않다고 주장했던 사람이다. 훌륭한 자끼리는 그들이 비슷한 한에서는 서로에게 아무런 도움이나 해를 줄 수 없고 따라서 서로를 존중할 수 없다. 또 그들이 훌륭한 한에서는자족적이며, 그래서 서로를 전혀 필요로 하지 않으며, 따라서 서로를 존중할 수 없다. 훌륭한 사람들이 공유하는 비슷함과 훌륭함 둘 중 어느 측면에서도 훌륭한 자끼리는 서소를 존중하지 않을 것이고, 따라서 서로를 사랑하는 것이 못 되며, 따라서 친구도 될 수 없다.[각주:11]


 그러나 아리스토텔레스는 뤼시스편에서의 플라톤과 다른 주장을 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행복한 사람이 친구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는 얘기가 맞는 것은 주로 유익이나 즐거움을 이유로 하는 친구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는 점에서라고 말한다.[각주:12] 우연적인 의미에 따른 사랑은 행복의 자족성 요구로부터 배제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사랑의 필요성과 행복의 자족성 사이의 모순처럼 보이는 것을 풀기 위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그런데 사태를 보다 자연적으로 고찰하는 사람들에게 유덕한 사람은 유덕한 친구를 본성상(physei) 선택해야 하는 것으로 보인다. 본성상 좋은 것은 유덕한 사람에게 그 자체 좋으며 즐거운 것이라고 얘기되기 때문이다. 동물에게 있어서 삶은 지각의 능력으로 정의되며, 인간의 경우에는 지각 혹은 사유의 능력으로 정의된다. 그런데 능력은 '그것의 발현으로서의' 활동을 조회점으로 하며 일차적인 것은 활동에서 성립한다. 그래서 삶은 일차적인 의미에서 지각함 혹은 사유함인 것으로 보인다. 산다는 것은 그 자체 좋고 즐거운 것에 속한다. 왜냐하면 정의에 의해 규정되었기 때문이다. 정의에 의해 규정된 것은 좋음의 본성을 가진다. 그런데 본성상 좋은 것은 훌륭한 사람에게도 좋다. 이것이 바로 산다는 것이 모든 사람에게 즐거운 이유이다. [] 그런데 산다는 것 자체가 좋고 즐거운 것이며 모두가 그것을 추구하는 것으로 보인다면, 훌륭하며 신적으로 행복한 사람들도 그 누구보다도 삶을 추구할 것이다. 이들에게 삶은 무엇보다도 우선해서 선택해야 할 것이며 이들의 삶이 가장 신적인 행복으로 충만하기 때문이다.(EN 99, 1170a13-29)

 

 여기서 아리스토텔레스는 친구를 그 자체, 본성상 선택할 만한 것으로 이해하고 있다. 친구는 다른 것을 위한 수단으로, 나의 부족함을 채우기 위해 선택되는 것이 아니다. 유덕한 친구는 그 자체 선택할 만한 것이다. 우리가 우리의 삶을 그 자체 추구하듯이 훌륭한 친구들의 삶 또한 그 자체 추구한다. 좋은 친구들이 존재하지 않으면 행복의 자족성은 유지될 수 없기에 행복은 가장 완전한 사랑을 내재적 구성요소로 요구한다.


 그리고 인간은 폴리스적이며 함께 살게끔 되어 있는데[각주:13] 인간에게 있어서 함께 산다는 것은 동물처럼 같은 공간에 배정받았다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고유 기능인 생각과 말을 나누는 것이기 때문에 이 고유한 인간적인 사회성을 완성시키는 즐거움이 바로 사랑이다. 친구와 함께 지각할 내용은 서로가 존재함을 서로 알고 있는 일이며, 이것이 구체적으로는 함께 살면서 서로의 말과 생각을 나누는 것이라면, 자신의 존재가 무엇보다 선택할 만한 것이듯 친구의 존재 역시 선택할 만한 것이다. 따라서 행복하게 될 사람은 훌륭한 친구를 필요로 하게 될 것이다.[각주:14]


 그러므로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있어 인간은 본성상 폴리스적이며 이런 본성에 따른 탁월성을 이유로 하는 좋은 사람들 간의 사랑은 행복과 관련 될 수 있다. 이렇듯 그는 자신이 가지고 있는 탁월성과 행복에 관한 철학으로 사랑을 고찰하였다. 아리스토텔레스에 있어 사랑에 관한 철학은 그의 고유한 탁월성과 행복에 관한 철학체계와 분리해서 생각할 수 없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체계의 이해를 위해 잠시 아리스토텔레스와 다른 사유체계를 가졌던 순자를 언급해보도록 하자. 순자 역시 아리스토텔레스가 사회공동체는 같은 공간을 배정받았다는 의미를 넘어선다고 바라본 것과 유사하게 사회구성을 바라본다.

 

 사람이 생존하기 위해서는 무리를 짓지 않을 수 없고, 무리가 있으면서 나눔이 없으면 쟁탈이 일어나고, 쟁탈이 생겨나면 어지러워진다.[각주:15]

 

 그러므로 고대의 성왕이 이를 위하여 예의로 절제해서 분별했다.[각주:16]

 

 사람은 사회공동체를 이룰 수 있으나, 소나 말은 그것을 이룰 수 없다. 사람은 어떻게 무리를 이룰 수 있는가? 나누기 때문이다. 나누는 것을 어떻게 실천할 수 있는가? 그것은 의()에 의해서이다.[각주:17]

 

 여기서 의()에 의한 나눔은 예()라고 할 수 있다. 이것은 인간을 지성(nous)으로 동물과 구분하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체계와 마찬가지로 인간과 동물을 구분하는 기준이 된다. ()에 의해 각자 감정을 적절하게 절제해야 하는 이유는 사회구성에 그 원인이 있다. 이렇듯 인간은 사회를 구성하면서 일종의 윤리를 필요로 하게 된다.


 아리스토텔레스가 탁월성과 행복에 관한 철학을 논한 것이 윤리학과 관계가 있듯이 그에 있어 사랑 역시 윤리적인 문제가 아닐까? 그렇다면 탁월성에 따른 사랑을 인간의 사회적 본성과 관련지어 가장 완전한 사랑이라고 언급한 것 역시 탁월성에 기초한 사랑이 가장 윤리적인 사랑이라고 말하기 위한 것이라고 생각해 볼 수 있지 않을까? 나는 그동안 살펴보았던 아리스토텔레스의 사랑을 일종의 윤리적으로 요구되는 인간관계로 규정짓고자 한다. 그렇기 때문에 사랑(philia)은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는 것처럼 상대방을 그 자체로 전인격적으로 대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윤리적 삶을 완성하며 상대방 역시 훌륭해지기를 바라는 것이다. 이제 사랑은 윤리적으로 요구된다.

 

 

 

. 자본주의 경제의 물상화(reification)와 사랑(philia)

 

 오늘날 많은 이들은 원자력의 치명적인 폐해와 환경파괴의 엄청난 결과에 대해, 관료제와 자본주의의 비인간성 등등에 대해 도덕적인 비난을 한다. 그런 의미에서 일종의 윤리적 의미가 함축되어 있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사랑(philia)은 오늘날 사회에 더욱더 요구되어야 할 것으로 보인다. 더불어 현대 아리스토텔레스주의자들이 걱정하듯이, 사회공동체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은 개인들이 만연한 오늘날 사회에서 개인들을 윤리적 관계로 연결하는 데에 아리스토텔레스의 사랑(philia)은 충분히 그 의미를 지닌다.


 현대인들은 현실의 자질구레한 행복과 물질적 쾌락에 만족하며 어떠한 모험도 감행하지 않는 지극히 평범하고 소심한 개인들도 보여진다.[각주:18] 텔레비전과 인터넷, 게임 중독으로 대표되는 오늘날 청소년층의 불안은 사회가 숱한 깨진 유리조각처럼 숱한 개인들로 원자화, 파편화되어있는 것으로부터 발생한다. 이렇게 원자주의가 만연해있는 사회에 아리스토텔레스에 있어 폴리스적 본성이 갖는 의미와 그에 따라 탁월성에 기초한 인간관계인 사랑을 강조하는 것은 매우 뜻 깊은 일이 될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한 발 더 앞서 나가 왜 개인들은 파편화되었으며, 왜 사랑이 실현되지 않고 있는 사회에 살고 있는지 되물을 수 있다. 나는 이러한 물음들을 자본주의 경제의 물상화(reification)와 관련지어 대답해보려고 한다. 그리고 이러한 분석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사랑이 갖는 중요성을 다시금 강조하게 되는 계기가 될 것으로 보인다.


 먼저 물상화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살펴보도록 하자. 물상화는 사람과 사람의 사회적 관계가 물건과 물건의 사회적 관계로 나타나는 것을 뜻한다. 자본주의 경제에 살고 있는 우리들의 사회적 관계는 직접적인 관계가 아니라 상품이라는 사물들의 교환관계로 나타난다. 예컨대 선풍기 생산자와 농부의 관계는 직접적인 관계로 드러나지 않고 선풍기와 농부가 생산하는 쌀의 관계로 등장할 뿐이다. 선풍기 생산자는 밥을 먹으면서 농부가 무더운 더위 속에서 고생하고 있다는 생각을 하지 않는다. 농부 역시 선풍기 생산자가 끼니를 거르지는 않을까 걱정하지 않는 것은 분명하다.


 이러한 사회적 관계는 아리스토텔레스가 살고 있던 폴리스에서 이루어질 수 있는 탁월성에 따른 관계(philia)와는 분명한 차이가 있다. 선풍기 생산자와 농부가 서로 호의를 가지고 있고, 상대방이 훌륭해지기를 바라지 않는 것은 매우 당연해 보인다. 이러한 사회적 관계는 유익을 이유로 하는 관계로 볼 수도 있는데, 그들은 상대방이 얼마나 좋고 훌륭한지에 상관없이 그 사람이 생산한 상품에 대해서만, 즉 외적인 피조물에 의해서만 관계를 맺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문제는 자본주의 경제가 확대될수록 이러한 물상화가 더욱더 심화된다는 점에 있다. 예컨대 교육이 본격적으로 상품화되면서 선생과 학생의 관계는 교육이라는 상품을 두고 생산과 소비하는 사람이 된다. 그들은 선생이 생산하는 교육이라는 상품과 학생이 지불하는 화폐의 관계로 나타날 뿐이다. 이것은 아리스토텔레스가 살던 당시에 스승과 제자 사이에 사랑(philia)이 성립하던 아카데미의 모습과 큰 대조를 이룬다.


 이렇게 인간관계에 있어 물상화가 더욱더 지배적인 힘을 얻게 될 때마다 인간관계에 있어 탁월성을 바탕으로 한 사랑(philia)의 관계는 더욱더 성립하기 어려워지며, 윤리적인 의미에 있어서도 매우 큰 위기를 갖게 된다. 오늘날 자본주의 사회에서 사람 사이에 경제적 관계가 아닌 관계를 만드는 시기는 보통 회사에 들어가기 이전인 학생시절이다. 그러나 교육이 상품화되면서 학교는 단순히 상품을 소비하는 장소로 전락해버렸고, 학생시절마저 친구를 만들기 힘들게 되었다. 교육의 목적은 우리의 노동력이라는 상품을 더욱더 비싸게 만드는데 있기 때문에, 학생들은 친구들과 어울리기 보다는 공부에 열중하며 다른 학생들과 경쟁해야 한다. 우리나라는 특히 학생들이 주로 학원에서 시간을 보내고 있기 때문에 함께 생활하지 못하면서 사랑(philia)의 관계를 맺기 더욱더 힘들다.


 이렇게 사람과 사람의 사회적 관계가 상품들간의 사회적 관계로 나타나는 물상화가 이루어지는 자본주의 경제에서는 인간이 탁월성을 기초로 하는 사랑(philia)의 관계를 맺고 유지하기 매우 힘들다. 인간의 윤리와 관계되어 있는 사랑(philia)이 실현되기 어렵다는 것은, 다시 말해 사람들 사이에 윤리가 실현되기 어렵다는 것과 우리가 윤리적인 삶을 살기 어렵다는 것을 뜻한다. 따라서 우리가 아리스토텔레스의 사랑(philia)의 개념을 분석하고 단순히 그것을 주장하는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자본주의 경제에 존재하는 물상화를 비판하고 자본주의 경제의 문제점들을 짚고 넘어가야 한다. 오늘날 사회에서 여러 윤리적인 문제들이 대두되고 있는 것들은 이런 것들과 기초하여 살펴봐야 하며, 우리가 윤리적인 삶을 생활하고자 한다면 자본주의 경제가 갖고 있는 병폐-예컨대 물상화의 원인이 되고 있는 상품-들을 해결하고자 노력해야 할 것이다.

 

 

 

. 맺음말

 

 지금까지 아리스토텔레스의 사랑(philia)과 자본주의 경제의 물상화(reification) 개념들을 살펴보았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사랑(philia)을 일종의 탁월성으로 바라보면서 유익과 즐거움과 같이 우연적인 것에서 오지 않는 지속적인 사랑을 가장 완전한 사랑으로 바라보았다. 사랑은 인간의 폴리스적인 본성에 의해 요구되는데 이는 사랑을 탁월성에 기초하여 바라본 것과 관련된다. 따라서 아리스토텔레스의 사랑은 윤리적 의미를 지닌다는 것이 이 글의 전반부에 해당된다.


 후반부에서는 자본주의 경제에 물상화를 다루었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가 상품, 사물들의 관계로 나타나면서 아리스토텔레스의 사랑(philia)이 실현되기 힘든 측면들을 설명하였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사랑(philia)은 앞서 본 것과 같이 윤리적인 의미를 지고 있기 때문에 이것이 실현되기 힘들다는 것은 자본주의 경제에서 비윤리적인 일들이 크게 문제시되는 것을 설명하는데 도움이 된다.


 많은 이들이 오늘날 사회의 비윤리성을 지적하면서 아리스토텔레스를 언급하곤 한다. 그러나 정작 왜 오늘날 사회에서 윤리적인 문제가 대두되고 있는지 사회구조에 대한 분석에 소홀히 해왔다. 나는 이런 점들을 극복하고자 아리스토텔레스에 있어 사랑(philia)이 어떤 의미인지 살펴보고 자본주의 경제에서 사랑(philia)이 왜 실현되기 힘든지 분석하였다. 이는 오늘날 자본주의 경제에 살고 있는 우리에게 윤리가 문제시되고 있는 문제를 구조적으로 살핀 것이다. 처음 작업해보는 일이어서 그런지 글이 매우 피상적으로 느껴지고 논지도 많은 부분에서 허술함이 보인다. 다만, 이 글이 오늘날 사회의 윤리 문제에 대해 어느정도 문제제기가 되길 바라며 이 글을 마친다.

 

 

 

참고문헌

 

Aristoteles, Aristotelis Ethica Nicomachea (이창우김재홍강상진 옮김, 니코마코스 윤리학, 이제이북스, 2006)

Charles Taylor, The Malaise of Modernity (송영배 옮김, 불안한 현대 사회, 이학사, 2001)

Karl Marx, Capital (김수행 옮김, 자본론, 비봉출판사, 2006)

Platon, Lysis (강철웅 옮김, 뤼시스, 이제이북스, 2007)

김재홍 외, 아리스토텔레스 니코마코스 윤리학,철학사상별책 제3권 제9, 서울대학교 철학사상연구소, 2004

심상태, 인간 : 신학적 인간학 입문, 서광사, 1989

리쩌허우(李澤厚), 정병석 옮김, 중국고대사상사론, 한길사, 2005

  1. 심상태, 『인간 : 신학적 인간학 입문』, 서광사, 1989, p.221 [본문으로]
  2. 일상적 삶에서 찾아지는 나머지 즐거운 일들에 관련해서, 마땅한 방식으로 즐거운 사람은 사랑이 있는 사람이요, 그 중용은 사랑(philia)이다. 이에 반하여 이런 면에서 지나친 사람은, 만일 아무 목적이 없으면 비굴한 사람이고, 만일 자기 자신의 이익을 추구하고 있으면 아첨꾼이다. 그리고 이 방면에서 모자라서 어떤 상황에서나 불쾌한 사람은 일종의 싸움꾼이요, 심보가 고약한 사람(dyskolos)이다. (EN 2권 1108a26-30) [본문으로]
  3. 탁월성에 관한 논의에서 어떤 사람들은 품성 상태(hexis)에 따라, 또 어떤 사람들은 활동(energeia)에 따라 좋은 사람이라고 이야기되듯, 사랑(philia)의 경우에 있어서도 그러하다. 함께 살면서 서로에게 기쁨을 주며 좋음을 제공하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또 자고 있는 사람들이나 혹은 장소상 서로 떨어져 있는 사람들은 사랑의 활동을 하는 것은 아니지만 친구처럼 활동할 수 있을 그런 품성 상태를 가지는 것이다. (EN 8권 5장 1157b5-10) [본문으로]
  4. 따라서 탁월성의 경우에서도 이와 마찬가지이다. 왜냐하면 다른 사람들과의 거래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행함으로써 우리는 올바른 사람이 되고 또 어떤 사람은 올바르지 못한 사람이 된다. 무서운 상황 안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행함으로써 또 두려워하거나 혹은 배짱 있는 마음을 지니거나 하는 습관을 얻게 됨으로써, 어떤 사람은 용감하게 되고 또 다른 어떤 사람은 비겁한 사람이 되기 때문이다. 욕구나 노여움에 관한 것들의 경우에서도 이와 마찬가지이다. 왜냐하면 그들 자신이 처한 이러한 상황 속에서 이렇게 행동하는가 또는 저렇게 행동하는가에 따라서, 어떤 사람은 절제 있는 사람이 되고 또 온화한 사람이 되기도 하고, 또 다른 어떤 사람은 방종한 사람이 되기도 하고 화를 잘 내는 사람이 되기도 한다. 어떤 사람들은 동일한 상황 속에서 이렇게 행함으로써 다른 사람들은 저렇게 행함으로써 그런 저런 사람이 되는 것이니 한 마디로 말하자면, 품성 상태들은 상응하는 활동(energeia)들에서 생긴다. (EN 2권 1103b14-22) [본문으로]
  5. 따라서 이러한 것들[유익 혹은 쾌락을 이유로 성립하는 사랑]은 우연적인 의미에 따른 사랑이다. 사랑받는 사람이 그 자체인 한에서 사랑을 받는 것이 아니라 어떤 좋음이나 즐거움을 주는 한에서 사랑받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랑은 [사랑을 주고 받는 친구들이] 계속 이전 같지는 않을 때 쉽게 해체된다. 더 이상 즐거움이나 유익을 주지 못하게 될 경우 그들의 사랑 역시 멈추게 된다. 유익한 것은 지속하지 못하고 경우에 따라 다른 것이 유익해지는 것이다. 따라서 그들이 서로 친구였던 그 이유가 사라지고 나면 사랑 역시 해체된다. (EN 8권 3장, 1156a16-24) [본문으로]
  6. 각자는 또 단적으로도 좋은 사람이고 친구에 대해서도 좋은 사람이다. 좋은 사람들은 단적으로도 좋으며 서로에 대해서도 도움을 주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좋은 사람들은 즐거움을 주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단적으로도 즐거우며 서로에게도 즐거움을 주기 때문이다. 좋은 사람들 각각에게 자신의 행위들 또 그와 같은 종류의 행위들은 즐거운 것이며, 좋은 사람들의 행위들은 [이런 점에서] 같거나 유사하다. (EN 8권 3장, 1156b7-17) [본문으로]
  7. EN 9권 1166b9-10 [본문으로]
  8. EN 9권 1169a17-18 [본문으로]
  9. 애호(philesis)는 감정(pathos)이지만 사랑은 품성상태(hexis)인 것처럼 보인다. 애호는 [생물] 못지않게 무생물에 대해서도 성립하지만, 사람들이 호응하는 사랑을 하는 것은 합리적인 선택(prohairesis)과 함께하는 것인데, 합리적 선택은 품성상태로부터 나오기 때문이다. 더 나아가 사랑받는 사람들 자체를 위해서 그들이 잘 되기를 바라는 것은 감정에 따른 것이 아니라 품성상태에 따른 것이다.(EN 8권 1157b28-32) [본문으로]
  10. 가장 완전한 사랑은 좋은 사람들, 또 탁월성에 있어서 유사한 사람들 사이에서 성립하는 사랑이다. (EN 8권 3장, 1156b6-7 [본문으로]
  11. Lysis 214e-215e [본문으로]
  12. ‘그들이 주장하는 바는’ 대중들이 유익한 사람을 친구로 간주한다는 것인가? 다시 없이 행복한 사람(makarios)은 좋음을 가지고 있으니, 그러한 유익한 사람들은 전혀 필요로 하지 않을 것이다. 즐거움을 이유로 찾는 친구들도 전혀 필요하지 않거나 약간만 필요할 터인데 그의 삶은 즐겁고 그 어떤 외적인 즐거움도 필요로 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한 친구들을 필요로 하지 않으니 친구들을 필요로 하지 않아 보인다. (EN 9권 1169b22-28) [본문으로]
  13. EN 9권 9장, 1169b19-20 [본문으로]
  14. 삶은 본성상 좋은 것이고, 좋음을 지각하는 일은 그 자체 즐거운 것이니까. '그렇다면' 산다는 것은 선택되어야 할 것, 특히 누구보다도 좋은 사람들에 의해 선택되어야 할 것이다. 그들에게는 존재가 좋고 즐거우니까. 그들은 그 자체 좋은 것에 대한 지각을 공유하면서, '즉 서로의 존재를 지각하면서' 즐거워한다. 마치 유덕한 사람은 자기 자신에 대해 하듯이 그렇게 또 친구에 대해― 친구는 또 다른 자기 자신이니까― 그러하듯이 말이다. 따라서 각자에게 있어서 자신의 존재가 선택되어야 할 것이듯이 그렇게 친구의 존재도 선택되어야 한다. 혹은 거의 그렇게 선택되어야 한다. 존재는 자신이 좋은 사람임을 지각하기에 선택할 만한 것이었다. 그런데 그러한 지각은 그 자체 즐거운 것이다. 따라서 친구가 존재함을 함께 지각하는 일, '즉 서로가 존재함을 서로 알고 있는 일이' 필요한데 이것은 함께 삶과 서로 말과 생각을 나누는 일에서 성립한다. 인간에게 있어서 함께 산다는 것은 가축의 경우처럼 같은 공간에 배정받았다는 것이 아니라 이러한 것을, '즉 서로 말과 생각을 나누는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이니 말이다. 과연 신적으로 행복한 사람에게도 존재는 본성상 좋고 즐거운 것이라 그 자체 선택해야 할 것이며, 그 다음으로 친구의 존재가 선택해야 할 것이라면, 친구 또한 선택되어야 할 것 중의 하나일 것이다. 신적으로 행복한 사람에게 선택되어야 할 가치는 마땅히 그에게 귀속되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바로 이점에서 부족하게 될 것이다. 따라서 행복하게 될 사람은 유덕한 친구를 필요로 하게 될 것이다. (EN 9권 9장, 1170b1-19) [본문으로]
  15. 『순자』「부국」 [본문으로]
  16. 같은 책, 「영욕」 [본문으로]
  17. 같은 책, 「왕제」 [본문으로]
  18. 안네 마리 파이퍼 지음, 정영도 옮김, 『니체의 ‘짜라투스트라’에 대한 철학적 해석』, [5.종말인 : 삶의 형식으로서의 향락], 이문출판사, 1994, pp.90~95 참조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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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서양철학사를 수강하며 작성한 레포트를 정리한 것입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행복



 인간은 왜 사는가? 아리스토텔레스에 따르면 인간은 행복하기 위해 산다. 니코마코스 윤리학의 출발점인 동시에 전체를 끌어가는 핵심개념이 바로 행복이다. 아리스토텔레스에 따르면, 인간의 모든 의도된 행위는 어떤 목적을 지향하며, 이 목적이 성취되면 이 목적은 다시 더 높은 목적을 위한 수단이 돼 그 위의 목적에 이바지한다. 이렇게 목적과 수단의 지속적인 연쇄관계의 계단을 계속 밟아 올라가면, 더 이상 다른 것의 수단이 아니라 그 자체가 목적인 최종 목적지에 도달한다. 이것이 다름 아닌 인생의 가장 좋은 것(최고선)이자 궁극적인 목적인 행복eudaimonia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다음으로 행복에 대한 통념들을 검토한다. 첫 번째 견해는 행복은 쾌락 혹은 즐거움에서 성립한다는 견해이다. 그러나 이러한 삶이 짐승들에 알맞은 삶이라 욕망의 노예가 될 뿐인 삶이라고 평가한다. 두 번째, 사람들이 행복의 내용으로 생각하는 명예를 중심에 놓는 삶을 아리스토텔레스는 정치적 삶의 유형으로 분류한다. 그러나 아리스토텔레스는 이것 역시 피상적이기에 진정한 행복의 내용이 되기 어렵다고 평가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행복이 우리에게 고유한 것이며 쉽게 박탈될 수 있는 어떤 것이 아니어야 하는데 명예의 경우 명예를 받는 사람이 아니라 주는 사람이 더 결정적이기 때문이라는 지적을 한다. 그 다음 아리스토텔레스는 간단하게 언급하지만, 을 버는 삶을 언급하며 부는 그것 자체가 목적이 아니며 다른 어떤 목적을 위해서만 유용하다는 단순한 이유로 행복의 후보에서 배제된다.


 이런 통념적인 삶이 위에서 논증하듯 진정한 행복의 내용이 되기에 부족하다면, 진정한 행복이 되려면 갖추어야할 조건들은 무엇인가? 아리스토텔레스는 성취가능성, 완전성, 자족성을 논변한다.


1) 행복은 만약 그것이 인간이 추구하는 것이라면, 인간적 행위로 성취할 수 있거나 도달할 수 있는 것이어야 한다.

2) 행복은 항상 바로 자기 자신 때문에 선택될 뿐 자신 아닌 다른 것 때문에 선택되지는 않고 동시에 다른 모든 것들은 바로 이것을 위해 선택되는 단적으로 완전한 목적이다.

3) 행복은 그것만으로 삶을 선택할 만한 것으로 그리고 아무것도 부족함이 없게끔 만드는 자족적인 목적이다.


 행복을 최상의 좋음으로 정의한 후 이렇게 정의된 최상의 좋음으로부터 성취가능성, 완전성, 자족성까지 도출해 낸 후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의 기능으로부터 인간의 행복을 정의한다. 이것은 일반적으로 좋음이 수행해야 할 혹은 수행할 것으로 기대하는 기능에 비추어 정의된다는 사실로부터 도출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이 아니면 잘 할 수 없는 인간의 고유한 기능에서부터 인간의 행복을 정의하려 하는데, 그것은 다른 식물 동물과 구분하는, 이성이라는 인간 고유의 능력이다.


 인간의 기능이 이성과 일치하는 혹은 적어도 이성과 분리되지 않은 영혼의 활동이라는 것을 상정한다면 뛰어난 사람의 기능은 이것들을 잘 그리고 훌륭하게 행하는 것이어서 각각의 기능은 그것의 부류에 고유한 탁월성에 따라서 수행될 때 잘 수행되는 것이다. 이로써 인간의 좋음은 탁월함()에 따르는 영혼의 활동이라는 것이 밝혀진다.


 즉, 좋은 혹은 뛰어난 하프 연주자가 하프를 잘 연주하는 사람이듯이 훌륭한 인간도 인간의 고유한 기능인 이성적 삶을 잘 살아내는 사람이다. 인간 고유의 기능을 그 탁월성에 따라 영혼이 활동해 낼 때 인간은 자신의 고유한 좋음()에 이르는 것이며 행복하다는 것이다.


 인간 고유의 이성적 기능을 행복과 좋음()에 연결시킨 아리스토텔레스의 행복관은 자칫 인간 전체의 다른 기능을 배제할 우려의 여지가 존재한다고 생각한다. 영화 이퀼리브리엄(Equilibrium, 2002)에서 그려지고 있는 모든 감정이 통제되는 미래도시를 우리가 행복한 사회, 인간다운 사회라고 규정짓지 못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따라서 아리스토텔레스의 행복관을 프로크루스테스와 같은 태도로 받아들이는 것은 큰 문제가 있다.




 나는 인간의 고유한 기능과 탁월성에 따라 인간 고유한 좋음과 행복에 도달하는 아리스토텔레스의 행복관을 높게 평가한다. 그러나 나는 오히려 인간의 성적 충동과 소외를 가지고 행복의 내용을 즐겨 바라본다. 나는 인간이 이성으로 인해 분리되어있는 실재로서의 자기를 인식할 수 있기 때문에 불안감과 같은 소외를 느낀다고 보기 때문에 이성의 기능을 탁월하게 발휘하는 것만으로는 행복을 찾을 수 없다고 본다. 여기에서는 오히려 인간의 성적 행위가 이와 같은 불안감과 소외를 극복하고 행복해지는 길을 제시한다. 그것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화폐와도 같은 추상에 대한 에로스가 아니라, 구체적 개별에 대한 에로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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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경제학사를 수강하며 정리한 글입니다. 인용이 많기 때문에 학습에만 활용해주시기 바랍니다.

중상주의에 관한 자료를 인터넷에서 쉽게 찾기 어려우므로 제 글이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길 바랍니다.



중상주의


 

1. 서론 : 중상주의와 중농주의 개괄


 고대와 중세의 경제사상이 압도적으로 당위적이고 규범적이라면, 근대의 경제학 이론은 경제현상에 대한 서술적 설명을 위주로 한다. 고대와 중세의 경제사상은 인간의 경제활동이 어떠해야 하는지 혹은 국가경제는 어떤 방향으로 가야 하는지를 주로 논의했다. 이에 비해 근대의 경제학은 국가경제가 어떻게 움직이는지 혹은 인간이 경제현실 속에서 실제로 어떻게 행동하는지를 논의했다. 이 같은 의미에서 경제사상이 경제학으로 바뀌는 과도기에 등장한 사조가 중상주의와 중농주의이다.[각주:1]


 그런데 경제적 사상의 이런 변화는 그 당시 역사적이고 경제적인 상황과 무관하게 변한 지성의 역사가 아니다. “인간이 역사를 만든다. 그러나 그들이 자기 마음대로, 즉 자신이 선택한 상황하에서 만드는 것이 아니라 주어진, 물려받은 역사적 조건하에서 그러하다.”[각주:2]는 맑스의 유명한 구절을 생각해 볼 때, 고대와 중세의 당위적이고 규범적인 경제사상에서 점차 경제현실을 설명하려는 중상주의와 중농주의의 시도는 당시의 역사적인 배경과 함께 이해되어야 한다.


 고대와 중세는 오늘날 경제학이 당연시 여기고 있는 화폐를 통한 상품경제가 발달하지 못하였다. 더불어 화폐는 단순히 재화의 교환수단으로서 역할을 하고 있었지, 오늘날 같이 자본의 역할을 하여 잉여가치, 이자를 얻는 수단으로 쓰이지 않았다. 그렇기 때문에 그 당시의 경제사상은 교환수단으로서의 화폐를 당위적이고 규범적으로 상정한다. 예를 들어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에서 흔히 덕으로 번역되고 있는 aretē(아레테)가 대게 기능과 관련되어 있는 말인 것을 생각해 볼 때[각주:3], 화폐의 훌륭한 상태(aretē)는 교환수단의 기능·목적을 온전히 발하고 있을 때이고, 그것을 넘어 부를 창출하는 행위는 부덕한 것이다.


 당시의 경제사상에서 단순히 돈을 벌기 위한 목적의 교환은 자연스럽지 않았다. 왜냐하면 재화가 그 본래의 목적에 사용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일단 어떤 사람이 올바른 방식으로 사는 데 충분한 부를 취했다면 그는 더 이상의 부를 축적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이렇게 고대 세계에서는 자급자족과 고립적인 교환이 지배적이었기 때문에, 점차 발달하는 상업에서 부를 축적하거나 다른 사람에게 돈을 빌려주어 돈을 버는 고리대금업자에 대한 시선은 탐탁지 않았다.[각주:4]


 고대와 중세에 화폐나 상업의 정의와 도덕이 경제적 문제에 관한 토론을 지배한 이유는 살펴보았듯이, 당시의 역사적이고 경제적인 상황과 연관이 있다. 물론, 이는 당시 지배계급의 사상이 반영되어 있을 것이다.[각주:5] 그렇다면, 중상주의와 중농주의가 점차 경제현실을 설명하려는 시도에는 어떤 역사적인 배경이 있는가, 즉 그 둘이 등장하던 시기에는 어떤 역사적이고 경제적인 상황과 어떤 지배계급의 이익이 어떻게 반영되었고 당시의 경제 현실을 어떻게 설명하려 했는지 알아볼 필요가 있다.


 우선, 중상주의와 중농주의는 봉건경제에서 점차 자본주의 경제의 생산양식으로 확대되고 있던 시기에 등장했다.[각주:6] 생산관계가 점차 자본주의적으로 변하는 시기였으나 생산력의 발전을 억압하는 봉건적인 생산관계가 유럽에 남아 있었다. 당시는 주코프가 표현한대로 봉건제가 이때까지 경제적으로 살아남아서 생산력 발전에 장애가 되어 있었다.”[각주:7] 그리고 상품경제가 오늘날 자본주의와 같이 전반적으로 경제를 지배하고 있지는 않았고 점차 확대되고 있는 시기였다.


 이런 이유로 당시 자본주의는 수축, 불황, 또는 위기의 시기였다. 홉스봄은 이를 유럽 경제가 17세기에 전반적 위기를 겪었으며 그것은 봉건경제로부터 자본주의 경제로 넘어가는 전반적 이행의 마지막 국면이었다.”[각주:8]라고 표현한 바 있다. 그런데 중상주의와 중농주의는 이런 위기에 대응해서 등장했다. 거칠게 표현하면 중상주의는 상업을 통해, 중농주의는 농업을 통해 위기를 극복하고자 했다. 그들은 지배계급의 이익을 반영하고 있었으므로 생산관계의 변화가 아닌 상업과 농업과 관련된 국가 정책을 통해 위기를 모면하려 했다. 이에 따라 상업과 농업을 통해 경제현상을 설명하는 시도가 나타난 것이다.


 “정치적으로든 문화적으로든 17세기는 세계경제의 성장률 저하에 발맞추어 형태와 구조의 안정화를 꾀한 시대였다. 이러한 시기를 거치지 않고서는 이후의 질적 도약이 가능하지 않았을 것이다. 이렇게 보면 17세기는 위기가 아니라 없어서는 안 될 속도 조정의 시대였던 셈이며 재앙의 시대가 아니라 자본주의 체제에서 가장 큰 혜택을 본 사람들의 이익을 증대시키는 데에 본질적인 계기였음을 알 수 있다.”[각주:9] 시어도어 래브(Rabb, Theordore K.)는 그의 저서 The Struggle for Stability in Early Modern Europe을 통해서 1610년에서 1660년 사이에 베이컨, 데카르트, 스피노자, 홉스 등에 의해서 구성된 지적 체계를 다름 아닌 위기에 대한 대응으로 안정화를 꾀하려 한 것이라 주장한다. 점차 근대적인 사고를 통해 경제현상을 바라보려 한 중상주의와 중농주의는 이런 지적체계와 결부되어 있을 것이다.


 두 번째로 지배계급은 상품경제의 확대와 상업의 발달로 인해 상업, 유통에서 잉여가치를 획득하려는 움직임과 자본주의적인 생산양식이 확대됨에 따라 자연(토지)으로부터 인간의 노동을 통해 생산하는 농업에서 잉여가치를 얻으려는 행동을 보인다. 이를 위해서는 상업과 농업에서 잉여가치가 어떻게 발생하는지에 대한 설명이 필요하다. 이에 대한 경제적인 설명이 바로 중상주의와 중농주의가 시도했던 것이다. 결국, 자본주의 경제가 점차 확대됨에 따라 변하는 잉여가치의 획득 방법에 대응해서 그들은 경제적인 현상을 이해하려 했다. 이는 자본주의 생산양식이 점차 지배적으로 변하고 있던 중상주의와 중농주의 이후 시기의 경제학과 태생적으로 차이를 보일 수밖에 없어 보인다.


 고대와 중세와 달리 교환가치를 통해 잉여를 획득하는 일이 점차 늘어나면서, 그 이전의 경멸적인 태도에서 벗어나 이에 대한 당위성을 옹호하는 사상적인 움직임과 철학적인 시도가 점차 사회에 지배적으로 나타난다.[각주:10] 프로테스탄트 정신과 더불어 부의 추구가 점점 당연시된다. “이자란 부자들이 가난한 사람들로부터 빼앗는 것이 될 때에는 분명히 비난의 대상이 될 수 있다. 그러나 돈을 빌린 사람이 대부를 받아 돈을 번 경우에는 사정이 달라진다. 그러면 단순한 형평의 논리로서 빌린 사람이 돈을 벌 수 있게 빌려 준 자와 소득을 나누어야 하고, 돈을 떼일지도 모를 위험을 감수한 것에 대해서도 보상을 할 수 있는 것이었다.”[각주:11] 부를 추구하는 것은 점차 당연시되었으므로 경제에 관해 도덕적인 논의를 펼치는 것에서 경제현상을 설명하려는 움직임은 원동력을 얻게 된다.


 물론, 중상주의와 중농주의가 도덕에서 완전히 벗어나서 경제현상을 설명하려 했다고 과장되게 해석해서는 안 된다. 경제현상을 바라보는 그들의 시야와 그로부터 상업과 농업을 강조하는 주장 밑바닥에는 그들의 도덕이 이미 전제되어 있다. 예컨대 중상주의는 상업을 통해 정치적 질서가 안정될 것이라 보았다. 몽테스키외(Montesquieu)의 다음과 같은 말을 그들도 느끼고 있었을까. “정복의 정신과 상업의 정신은 국가 안에서 상호배타적이다.” “상업의 자연적인 효과는 평화로 이끄는 것이다.”[각주:12] 이런 도덕적인 기반은 이후 고전경제학으로 더욱 선명하게 확장되었다.


 우리는 개괄적으로 중상주의와 중농주의를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에 대해 살펴보았다. 이제부터는 앞서 강조한 관점을 통해 중상주의와 중농주의를 보다 상세히 다루어 보고자 한다.


 

2. 중상주의


 중상주의(mercantilism)란 용어는 중농주의자인 미라보 후작 빅토르 리케티(Victor Riqueti, 1715~1789)1763년 저서인 농업철학(Philosophie Rurale)에서 “system mercantile”이란 말로 처음 등장했다. 이 용어는 다른 중농주의자들 역시 사용했는데 당시 프랑스에서 이는 국내의 상인과 제조업자들을 보호하기 위한 국가의 경제정책 개입을 기술하기 위해 쓰였다. 이 체계는 흔히 콜베르주의(colbertism)로 알려져 있는 것이었다. “장 밥티스트 콜베르(Jean-Baptiste Colbert, 1619~1683)는 루이 14세가 등극하고 있던 17세기 프랑스의 재무총감(오늘날의 재무장관)으로서 국가의 강력한 지도와 통제 아래 프랑스의 공업생산량을 늘리고 무역을 발전시킨 인물이다. 이는 다시 말하자면, 외국으로부터 엄청난 금은을 끌어 모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국가의 힘이란 곧 자국이 보유하고 있는 금은에 따라 결정된다는 것이 국왕과 콜베르의 신념이자 정책이었던 것이다.”[각주:13]


 그러나 중상주의란 용어를 대중화시킨 사람은 애덤 스미스이다. 그는 1776국부론(Wealth of nations)에서 자유를 제한하는 일련의 정책을 비판하면서, 그러한 정책에 중상주의(‘mercantile system’ 또는 ‘system of commerce’)라는 이름을 붙였다. 그리고 이는 부와 금은을 혼동하고 있는 대중적인 어리석은 행동으로 이루어졌다고 했다.


 “역사적으로 명망 있는 당시의 절대 권력자들은 서로 경쟁이라도 하듯이 통제적인 경제정책과 무역정책을 실시했다. 예를 들면, 영국 절대주의의 최대 전성기를 구가한 엘리자베스 1(16세기), 근세 영국 발전의 기초를 닦은 군사독재 정치가 크롬웰(공화국 호국경, 17세기), 프랑스의 태양왕이라 불리는 루이 14(17~18세기), 프로이센왕국의 프리드리히 대왕(18세기) 등은 모두 중상주의적인 정책을 추진했던 인물이다.


 엘리자베스 1세가 재위하고 있던 영국에서는 특히 금은을 중시하여, 외국과의 무역이나 식민지 지배를 통해 금은을 거둬들이고, 이것을 국내에 비축해 두기 위해 무역을 통제했다. 이런 식의 극단적인 정책은 별도로 중금주의라고 불리기도 하는데, 중상주의 초기 단계에서 많이 나타나고 있다.


 이에 관한 일화가 있는데, 한번은 은을 가득 실은 스페인 함선이 태풍을 피해 영국의 항구로 피난했던 적이 있었다. 이때 엘리자베스 1세는 이것을 불법입국이라 하여, 배 안에 실려 있던 은을 모조리 압수했다. 당시만 해도 항해 중인 선박이 태풍을 피해 가까운 외국의 항구로 긴급 피난하는 것은 불법입국이 아니라는 관례가 국제적으로 이미 인정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조치를 취했던 것이다. 결국 이 사건으로 말미암아 스페인과 영국은 해상에서 교전을 벌이게 되는데, 여기서 영국 함대는 스페인의 무적함대를 격파시키고 만다.”[각주:14]


 종합해보면 중상주의는 국가의 부는 곧 자국이 보유하고 있는 금은에 따라 결정된다고 여기고, 외국과의 무역을 통제해서 외국으로 빠져나가는 금은(수입) 보다 들어오는(수출) 금은(net inflow of bullion)을 많게 하려 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이렇게 국가의 부를 추구하는 중상주의는 크게 두 가지 물음에 답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첫째는 왜 중상주의는 개인의 부가 아닌 국가의 부를 추구했냐는 것이다. , 국가 단위에서 경제현상을 분석하려는 이유에 답하는 것이다. 이는 국가를 둘러싼 지배계급의 이해관계와 연관되어 있다. 둘째는 왜 부를 금은과 관련지어 생각했냐는 것이다. 이는 금은의 가치를 최고로 평가하는 중금주의와 부를 생산하는 측면이 아닌 유통의 측면에서 얻을 수 있다고 바라본 중상주의의 특징과 관련되어 있다.


 

2.1 절대왕정, 국민국가의 탄생과 지배계급의 이해관계


 중세 후기인 15세기까지의 유럽사회에서 농업생산성과 무역량은 비록 정체된 것은 아니지만 그 성장속도는 새로운 영토정복에 의해 얻어지는 수확에 비교할 때 여전히 대단히 느렸다. 새로운 영토정복을 가져올 수 있는 전쟁은 당시 봉건제하에서의 지배계급에게 주어진 여러 가지 수단 중에서 아마도 가장 합리적이고 신속한 단일의 잉여수취의 확대양식이었다.”[각주:15] 그렇기 때문에 당시에 전쟁은 끊이지 않았고, 이에 따라 전쟁의 비용을 충당할 금전과 군사력 확보는 잉여수취를 위한 기반이었다. (이렇게 당시에 지배계급이 잉여를 수취하기 위해 전쟁을 일으키는 것은 당연시되었기 때문에 중상주의 역시 다른 국가에 적대적인 무역정책을 펼칠 수 있었다.)


 중세국가에서 군사력의 동원은 봉신으로서 왕에게 군사복무 의무를 지니는 봉건귀족들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봉건귀족들의 군사복무는 기본적으로 토지보유 관계를 매개로 하는 의무 관념과 사회적 유대를 바탕으로 하였다. 그런데 이런 봉건적 군사체제에 12세기 중반 이후 점차 금전적 지급을 통해 얻어지는 병력이 동원되었다. 이와 더불어 봉건귀족들의 중기마병보다 보병군이 전술에 중요해지고, 양궁부대, 화포, 돈을 받고 고용된 용병군이 전쟁에 차지하는 비중이 늘면서 이에 따라 군왕들은 화폐자원을 더욱 늘리기 위하여 많은 노력을 기울여야 했다. 그것은 통치가 관료제화되고 상비군을 보유하는 국민국가가 등장하면서 더 크게 부각되었다.


 많은 화폐자원을 필요로 했던 군왕에게 재원을 제공한 세력은 주로 상인이었다. 샤를르 7(Charles )는 당시의 프랑스의 유력한 상인, 자크 쾨르(Jacques Coeur)로부터 재정적인 도움을 받아 상비군을 확보할 수 있었다. 이러한 사실은 단순히 우연적인 개인적 관계에서 비롯되었다기보다 군주의 독점적·물리적 강제력에 의해 보장되는 사회적 안정을 바랐던 당시의 중간계급의 정치적 의지를 보여주는 단적인 예로 지적될 수 있는 것이다.[각주:16]


 절대왕정, 국민국가가 탄생하는 배경에는 이렇게 군주와 상인세력의 이해관계가 서로 얽혀 있었다. 중상주의가 국가의 상업적 이익에 관심을 둔 이유를 여기서 알 수 있다. 후세의 경제 이론가들이 대부분 학자나 철학자인 데 반해 중상주의자들은 스스로가 상인이거나 정부 관료였다. 이에 따라 중상주의는 절대국가의 이념에 맞게 국부를 추구한 것으로 모습을 드러낸다. 로버트 에켈런드(Robert B. Ekelund)는 중상주의가 상인과 정부의 지대 추구(rent-seeking)[각주:17]를 위해 가장 효율적인 경제 이론을 개발한 것이라고 말한다. , 당시 상인의 막대한 이윤은 외국 경쟁자를 배제하고 국내 시장을 독점하고 노동 계급을 가난에 방치함으로써 유지되었다는 것이다. 또한 정부의 수익은 높은 관세와 상인이 지불하는 막대한 자금에 의존하고 있었다.[각주:18]


 “중상주의는 그 당시의 이기적인 상인과 제조업자의 특성을 표현하고 있으며, 그들에 의해 대표되는 자본주의적 발전의 시기봉건적 농업사회가 산업사회로 전환하여 가고, 그에 따라 세계시장에서 국민들 사이에 산업전(産業戰)이 전개되는 그 당시에는 자본의 급속한 발전을 이른바 자연발생적 방법에 의해서가 아니라 강제수단에 의해 달성해야 한다는 것이 중요하였다에 속하는 것이다.


 국민적 자본이 점차로 완만하게 산업자본으로 전환되는가, 아니면 보호관세를 통해 주로 토지소유자·중소농민·수공업자에게 부과되는 조세에 의해, 독립적인 직접적 생산자에 대한 수탈의 촉진에 의해, 자본의 축적과 집중의 강제적인 촉진에 의해, 요컨대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의 조건들을 가속도로 형성하는 것에 의해 위의 전환이 시간적으로 단축되는가는 매우 현저한 차이를 낳는다. 이것은 또한 국민의 자연적 생산력을 자본주의적으로 산업상에 이용하는 것에도 큰 차이를 낳는다. 그러므로 중상주의의 국민주의적 성격(national character)은 그 대변인이 입으로만 떠드는 단순한 슬로건만은 아니다. 중상주의자들은 국부와 국가재정에만 관심을 가진다는 구실 하에서 실제로는 자본가계급의 이익과 치부 일반이 국가의 최종목적이라고 단언하고 낡은 교권국가(supernatural state)에 반대해 부르주아 사회를 선언하고 있다. 그러나 동시에 그들은 자본과 자본가계급의 이익의 증대, 자본주의적 생산의 발전이 근대사회에서는 국민의 위력과 우위의 토대가 되었다는 것을 의식하고 있다.”[각주:19]

 


2.2 교환(유통)에서 잉여가치 설명: 물신숭배로서의 중금주의에서 좀 더 발달한 중상주의로


 “자본주의 사회의 이전 단계들에서는 상업이 산업을 지배하였다.”[각주:20]상업은 상품과 화폐의 단순한 유통에 필요한 조건들 이외에 다른 어떤 조건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유통하는 생산물이 어떤 생산양식(원시공동체, 노예제 생산, 소농민적 소부르주아적 생산, 자본주의적 생산)에서 생산 되는, 이것으로 말미암아 그 생산물의 상품으로서의 성격은 조금도 변경되지 않는다.”[각주:21]


 상품경제가 점차 확대되고, 상업이 발달됨에 따라 교환가치로서의 화폐가 갖는 영향력은 날로 커져갔다. 단순한 상품유통의 형태 C-M-C로부터 화폐가 가치척도와 유통수단으로서뿐만 아니라 상품의 절대적 형태 따라서 부의 절대적 형태(퇴장화폐)로서 생기고, 그리하여 화폐의 유지와 증대가 목적 그 자체로 된다. “화폐는 어떤 상품으로도 직접 전환될 수 있기 때문에 물질적 부의 일반적인 대표라는 점에서 질적으로나 형태상으로 아무런 제약도 받지 않는다.”[각주:22] 그렇기 때문에 양적으로 제한된 금은을 시시포스(Sisyphus)의 노동과 같이 끊임없이 축적하려는 열띤 모습이 중상주의에도 나타난다. 어쩌면 이런 중금주의는 당시 경제에서 필연적으로 발생할 수밖에 없는 화폐에 대한 물신숭배(fetishism)[각주:23]일수도 있다. 헥셔(Hechscher)에 따르면 중상주의에서 화폐를 사랑하고 재화를 두려워하는 것은 그 당시 물물경제에서 화폐(금과 은)경제로의 이행을 표현하고 있다.[각주:24]


 “자본주의 시대의 인류는 이미 몇 세기 동안 잉여가치를 생산하여 왔으며, 또 점차로 잉여가치의 발생에 대한 사고를 전개시켜 왔다. 최초의 견해는 잉여가치가 상업활동으로부터 직접적으로 생기며, 잉여가치는 생산물가치에 대한 추가분이라는 것이다.”[각주:25] 이 사상이 바로 중상주의이다.


 그런데 자본주의적인 생산양식에서는 상업자본이 M-CPC’-M’의 움직임을 보인다. “이른바 중금주의는 불합리하고 피상적인 형태 M-C-M’, 오로지 유통영역에서만 진행되는 운동의 표현에 지나지 않으며, 따라서 (1) M-C(2) C-M’이라는 두 행위를 설명할 때, 2의 행위에서 C는 자기의 가치보다 높게 팔림으로써 그것의 구매 때에 유통영역에 투하된 것보다 더 많은 화폐를 유통영역으로부터 끌어낸다고 말할 수밖에 없다. 좀 더 발달한 중상주의의 기초에는 M-CPC’-M’이 유일한 형태로 고정되어 있는데, 이 형태에서는 상품유통뿐만 아니라 상품생산도 필수적인 요소로 나타나고 있다.”[각주:26]


 중상주의자들은 화폐야말로 국부이며 이윤은 유통영역에서 창출된다고 믿었다. 그러므로 중상주의 정책은 가능한 많은 금과 은을 국가 내로 끌어들이는 것을 목적으로 했다. 초기의 정책은 통화의 국외 유출을 금지해야 한다는 입장이었다. 목적은 외국시장에 상품을 수출함으로써 국내에 통화를 축적하는 것이었다. 이는 M-C-M’의 피상적인 유통영역의 운동의 표현에 기초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자본주의 경제형태가 발전되고 외국무역이 확장되면서 통화유통을 막는 정책은 점점 부당한 것으로 되었다. 화폐흑자정책은 무역균형정책에 의해 대체되었다. 그것은 후기 중상주의자들에 의해 옹호되었다(토머스 먼 Thomas Mun, 세라 안토니오 Serra Antonio ). 그들은 국가가 수출입의 균형을 이뤄야 한다고, 즉 국가는 수출하는 것보다 더 많은 상품을 수입해서는 안 된다고 느꼈다. 따라서 수출상품의 제조가 장려되었다. 중상주의는 외국무역을 부의 원천으로 간주하였고, 수출상품이 장인에 의해 제조되었기 때문에 그들은 수공업이 발전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런 중상주의의 주장은 좀 더 발달한 M-CPC’-M’의 형태에서 유통뿐만 아니라 상품생산도 고려하고 있다. “중금주의를 계승한 중상주의에서 결정적인 것은 더 이상 상품가치의 화폐로의 전환이 아니라 잉여가치의 생산인데, 그러나 유통영역이라는 불합리한 관점에서 그것을 고찰하며 동시에 이 잉여가치가 잉여화폐(surplus money)로서 무역수지의 흑자로 나타난다고 생각한다.”[각주:27]


 자본주의적 생산이 탄생하였고, 이렇게 중상주의자들의 전망은 그 시대의 경제발전 수준에 의해 조건 지워졌다. “근대적 생산양식에 관한 최초의 이론적 연구인 중상주의는 필연적으로 유통과정의 피상적인 현상들[이것들은 상업자본의 운동에서 자립성을 획득한다]로부터 출발하였으며, 이 때문에 외관을 파악했을 따름이다. 이렇게 된 이유는, 부분적으로는 상업자본이 자본 일반의 최초의 독립적인 존재형태이기 때문이었으며, 또 부분적으로는 상업자본이 봉건적 생산의 최초의 변혁기, 근대적 생산의 발생기에 미친 압도적인 영향 때문이었다. 근대경제에 관한 진정한 과학은 이론적 고찰이 유통과정으로부터 생산과정으로 옮겨갈 때 비로소 시작된다.”[각주:28]


 산업자본을 포섭하고 있던 상업자본은 점차 자본주의 생산이 확대되어 가면서 산업자본에 종속된다. 상인이 직접적으로 산업가가 되는 방식에서 생산자 자신이 상인으로 지배적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경제현상이 상업(유통)에서 산업(생산)으로 옮겨가는 것에 따라, 경제 현상을 설명하는 경제학 역시 유통과정에서 생산과정으로 이론적 고찰이 움직인다. 그것은 우선 중농주의로 모습을 드러낸다.

 

2.3 중상주의 이후의 경제학과 비교

 

2.3.1 보호무역정책, 종속이론


 중상주의 국가는 무역흑자를 늘리기 위한 갖가지 조치를 취했다. 이런 조치에는 독점권 부여, 수량제한과 수입허가, 수출보조금, 이자율 정책, 유치산업 육성, 노동자 관리 등이 포함된다. 이런 이유로 중상주의에서는 생산에 의한 이윤획득 보다 상품의 양도에 의한 이윤획득으로 부의 증식이 이루어진다. 잉여가치가 교환에서 생긴다고 보았고, 가치 이상으로 상품을 판매할 때 생기는 것으로 가정한 것이다.


 후기 중상주의자인 스튜어트(Steuart, J., 1713~1780)는 세 가지 이윤을 개념을 제시하는데, 노동과 근로 및 숙련의 증대에서 발생하는 적극적 이윤(positive profit), 부의 비중상 변동을 의미하는 상대적 이윤(relative profit), 이들의 혼합적 이윤이 바로 그것이다. 스튜어트는 적극적 이윤을 노동생산력의 발전에서 생기는 사용가치량의 증대로 이해한다. 그는 상품가치가 현실적 가치와 양도이윤(profit upon alienation)으로 구성된다고 보는데 여기서 이 양도이윤은 상대적 이윤이다.[각주:29]


 중상주의는 무역이나 교환에서 가치가 증가하는 유일한 방법이 교환의 한쪽 당사자로부터 다른 당사자로 가치가 이전(transfer)되는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이 같은 가치이전이 지속적이며 일방적으로 이루어지면 양자는 모종의 수탈관계에 놓이게 된다. 그런데 가치이전이나 수탈관계에서는 당사자들 전체로 보면 아무런 가치증가가 없다.


 이 같은 생각에서 무역이 쌍방 모두를 이롭게 하는 것이 아니라 일방을 이롭게 하고 타방은 빈곤하게 만든다는 인근궁핍화정책(beggar-my-neighbor policy)의 논리가 나온다. 이는 세계적 규모의 불균등 발전을 설명하기 위해 1969년 엠마뉴엘(Emmauel, A.)에 의해 제기된 부등가교환(unequal exchange)과 마찬가지로 무역은 중요한 약탈 수단이다. 부등가교환의 이론은 1970대에 상당한 영향을 준 이론인데, 선진국과 비교해서 저발전국에서 노동력의 가치를 결정하는 상품들의 가치가 엄청 낮기 때문에 저발전국들이 상대적으로 가치가 과소평가된 상품을 수출하고, 선진국들이 가치가 과대평가된 상품을 수출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식의 교환을 통하여 선진국은 그들이 생산에서 산출한 것보다 더 많은 노동시간을 교환에서 전유한다. 즉 잉여는 충분한 투자가능 잉여의 부족으로 축적률이 저하하고 있는 후진국으로부터 이전되는 것이다.


 무역이 일방을 이롭게 한다는 논리는 부등가교환과 비슷하게 종속이론에서도 찾을 수 있다. 프레비쉬(Prebisch, R.)는 슘페터와 케인즈의 제자였던 싱거(Singer)와 함께 1950년대에 선진국과 무역으로 인해 개도국은 점점 손해를 보게 된다는 프레비쉬-싱거 가설을 주창했다. 개도국이 비교우위가 있는 농산물 등 1차산품의 교역조건이 선진국의 공업제품에 비해 장기적으로 악화되어 무역에서 발생하는 이익은 선진국에게만 돌아가고 개도국의 후진성은 해소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소득이 늘어날수록 사람들은 공업제품을 더 소비하려고 할 것이므로 무역이 확대될수록 국제시장에서 1차산품의 상대가격은 공업제품에 비해 더욱 떨어진다는 것이다. 이 이론은 중심-주변으로 분할된 세계경제와 후진국의 종속을 설파했던 종속이론의 토대를 놓았다. 선진국으로 잉여가 흘러들어감에 따라 제3세계가 정체될 수밖에 없다는 주장이 프랑크(Frank, A. G.), 아민(Amin, S), 도스 산토스(Theotonio dos Santos)등의 다양한 종속이론들로 나타났다.[각주:30]


 중상주의는 무역에서 쌍방이 이익을 본다고 생각하지 않고 일방적인 가치이전이나 수탈을 통해 부가 증식된다고 보았기 때문에 수입을 최대한 줄이고 수출을 최대로 늘리기 위한 보호무역을 주창했다. 이 같이 중상주의는 경제운행에 대한 국가의 포괄적인 개입을 당연시했다. 후대에 중상주의와 보호무역이 거의 동일시되고 20세기에 들어 보호무역정책이 신중상주의로 규정된 것은 이 때문이다. 신중상주의는 구체적으로 반드시 일치한 용법이 있는 것은 아니고 영국의 경제학자 로빈슨(Robinson, J. V.)은 저서 신중상주의(the new mercantilism)(1966)을 통해 세계 각국이 타국으로부터 국제수지의 흑자를 획득하려고 하는 점에 신중상주의의 특징이 있다고 지적했다.


 보호무역의 주장했다는 점에서, 경제학과 사회과학에서 역사적 관점을 강조했던 독일의 역사학파와 관련지어 생각해볼 수도 있다. 역사학파는 자유무역이 독일경제의 발전에 저해가 된다는 생각에서 출발해 역사학파의 시조인 리스트(List, F., 1789~1846)는 자유무역이 당시 선진국이었던 영국에 적절한 논리일 뿐 후진국이었던 독일에 적용될 수 없다는 점을 주창했다.


 중상주의와 달리 고전학파에서 무역은 모두를 이롭게 한다. 고전학파는 교환이 인간의 본성에서 나온다는 점과 생산성을 증대시키는 분업체계 아래에서 교환이 불가피하다는 점을 들어 국내의 교환과 국제무역의 자유로운 교류, 즉 자유무역과 경제적 자유를 주창했다.


 이어 신고전학파는 교환과 자유무역의 중요성을 고전학파보다 한층 더 부각시키는데, 교환을 통해 당사자 모두가 이익을 얻는다는 논리에 의존한다. 신고전학파에서 교환은 파레토 개선을 가져온다.


 결론적으로 다 같이 교환과 무역을 중시하면서도, 중상주의는 교환의 이익이 가치의 일방적인 이전이나 수탈이라고 보아 보호무역을 내세운 데 비해, 나중에 등장한 고전학파 및 신고전학파는 교환당사자들에게 골고루 이익이 발생한다고 생각해 자유무역을 주장했다.[각주:31]

 

2.3.2 화폐에 대한 입장


 중상주의 사상 중 가장 논란이 되었던 것은 보호무역에 대한 옹호였다. 중상주의는 보호무역을 통해 특정 국가에게 지속적인 흑자 혹은 적자가 가능하다고 주창했다. 이에 대해 고전학파는 지속적인 흑자와 적자가 불가능하다고 반박했다. 이 반박은 스미스와 거의 동시대의 철학자이자 사회사상가인 흄(Hume, D., 1711~1776)의 정화-흐름(specie-flow)에 함축되어 있다. 흄은 무역이 이루어지는 과정에서 흑자와 적자가 반전되어 균형상태로 되돌아 간다는 견해를 내세웠다. 논리의 골자는 다음과 같다.


 교역중인 두 국가 AB A가 흑자를 누리는 데 반해, B는 적자를 겪고 있다고 하자. 이렇게 되면 BA에 금이 유입되고, 금이 유입되면 금본위제 하에서 자동적으로 화폐의 공급이 증가한다. 화폐수량설을 전제할 때 화폐공급의 증가는 A에 물가상승을 초래한다. B에서는 반대방향으로 이와 유사한 일련의 변동이 발생한다. , 금이 유출되고, 금본위제 하에서 화폐의 공급량이 감소하며, 화폐수량설에 따라 물가가 하락한다.


 편의상 교역재와 비교역재를 구분하지 않는다면, A의 물가가 상승하고 B의 물가가 하락하면서 교역조건이 A에 불리하게, 그리고 B에 유리하게 바뀌게 된다. 수요의 가격탄력성을 어느 정도 인정하는 경우 A국 제품에 대한 국내외 수요가 줄고, B국 제품에 대한 국내외 수요가 증가한다. 이렇게 되면서, A의 수출이 줄고 수입이 늘며, B의 수출이 증가하고 수입이 감소한다. 결국 국제수지가 원래 상태로부터 반대 방향으로 움직인다. 따라서 A가 계속 흑자를 누리고 B가 적자의 수렁에 빠져 있는 상황이 지속될 수 없다.


 이 이론은 금본위제, 화폐수량설, 수요의 가격탄력성 등 세 가지를 핵심 요소로 삼고 있다. 중상주의에 대한 흄의 비판을 이해하고 평가하기 위해서는 이 점이 인정되어야 한다. 금본위제도는 금의 유출입이 비례적으로 화폐의 공급량을 변동시킨다는 논리적 고리에 담겨 있다. 또한 화폐수량설은 화폐공급량의 변동이 같은 방향으로 물가변동을 가져온다는 고리에 표현되어 있다. 그리고 수요의 탄력성은 가격이 변동하면 수요가 반대 방향으로 움직인다는 고리에 반영되어 있다.


 그런데 화폐수량설이 중상주의에 배치된다. 일반적으로 화폐는 재화나 상품과 달리 교환과정이나 유통과정에만 머물지도 않고, 그렇다고 유통과정 밖에만 머물지도 않는다. 그런데 중상주의는 화폐축적 자체가 경제활동의 목표라고 보아 화폐가 유통과정에서 벗어나 있는 상황과 이에 상응하는 화폐의 퇴장(hoard) 기능에 초점을 맞추었다.


 화폐에 대한 중상주의의 관점에 의하면 화폐는 퇴장될 수 있으므로 화폐공급량 변동이 반드시 같은 비율의 화폐유통량 변동을 의미하지 않으며, 비슷한 비율로 물가를 변화시킨다는 논리도 성립하지 않는다. 나아가 화폐경제가 충분히 발달하지 않는 당시로서는 화폐공급량 변동이 물가변동을 가져오기보다 더 많은 거래를 촉진시킨다고 생각했을 가능성도 있다. 이와 관련해 현재도 흔히 후진국에 대해 화폐적 매개 혹은 금융적 매개의 미성숙이 지적되고 있음을 고려할 필요가 있다.


 이 논의를 피셔(Fisher, I., 1867~1947)의 교환방성식을 이용해 종합해 보자.


 MV = PT (M: 통화량, V: 유통속도, P: 물가, T: 거래량)


 화폐수량설은 VT가 고정되어 있어 M의 변동이 P의 변동으로 전달되는 것을 의미한다. 이와 달리 중상주의에서 퇴장기능은 M의 변동이 반대방향으로 V의 변동을 가져와 스스로 상쇄되므로, PT에 영향이 없거나 상당히 적다는 논리를 제공한다. 여기서 수요의 비탄력성은 M의 변동이 완전히 P의 변동으로 완전히 P의 변동으로 전환되지 않고 적어도 부분적으로 T의 변동을 낳는다는 주장을 가능케 한다.


 이 같이 화폐수량설이나 가격탄력성 등에 있어 흄의 정화-흐름 기제가 중상주의를 제대로 반영하지 못했거나 이해하지 못했다고 말할 수 있다. 같은 이유로 어떤 전제하에서 중상주의에서 보호무역을 주장했는지 이해할 수 있다.[각주:32] 더욱이 상품경제가 확장되고 있었던 중상주의의 시기에서는 필요한 화폐에 비해 금과 은이 부족했을 것이고, 오늘날의 경제학에서 화폐수량설이 갖은 여러 이론적 설명은 당시 경제 현실과 맞지 않았을 것이다.

  1. 홍훈, 『경제학의 역사』, 박영사, 2007, pp.37-38 [본문으로]
  2. Marx, K., “The Eighteenth Brumaire of Louis Bonaparte”(「루이 보나파르트의 브뤼메르 18일), 『칼 맑스·프레드리히 엥겡스 저작선집 2』, 박종철 출판사, 1992, p.287 [본문으로]
  3. 모든 사물에는 그 종류나름으로 ‘훌륭한 상태’, 즉 ‘좋은(agathos=good) 상태’가 있게 마련이다. 이는 대게 그 종류나름의 ‘기능’(ergon) 또는 ‘구실’과 관련되어 있는 말이다. 그것이 어떤 것의 생존 기능 또는 그것의 존립 이유나 존립 조건과 관련된 것이든 간에 상관 없이, 그것들의 ‘훌륭한 상태’는 있게 마련이다. 가령 우리가 ‘좋은 눈’이라 말할 때, 이는 눈의 기능과 관련해서 하는 말이요, 개나 말의 경우에서처럼 그것들의 생존 조건이나 인간에 대한 그것들의 유용성과 관련해서도 우리는 그 ‘훌륭한 상태’를 상정할 수 있다. 그리고 모든 인위적인 산물은 그것들의 유용성 및 기능과 관련된 ‘훌륭한 상태’를 전제로 하여 만들어지고 있다. ‘좋은 칼’이라든가 ‘좋은 낫’이라 말함은 그 때문이다. 이런 ‘훌륭한 상태’ (훌륭함: goodness, excellence)는 ‘아레테’라 한다.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있어 탁월한 하프 연주자는 하프 연주를 탁월하게 할 것이고 탁월한, 덕스러운 인간은 삶을 훌륭하게 살 것이다.(EN 1권 1098a 7-15) [본문으로]
  4. 아리스토텔레스 경제사상에 대해 매우 정리가 잘 된 글이 있어 인용한다. “물건의 자연스런 쓰임새가 자급자족 및 생계유지, 그리고 행복한 삶이나 도덕과 정의의 실천에 있다고 본 아리스토텔레스의 입장은 물건을 사용가치로 취급하는 생각에 부합된다. 또한 사용가치를 수단으로 활용하는 경제가 보편성을 갖는 경제이다. 이에 비해 교환가치는 물건의 본성과 무관하고 부자연스러우며, 이것을 추구하는 상업사회나 시장경제 역시 자연에 반한다.” (홍훈, 『경제학의 역사』, 박영사, 2007, p.32) [본문으로]
  5. “어떤 시대에서나 지배 계급의 사상이 지배적인 사상이다. 다시 말해서 사회의 지배적인 물질적 세력인 지배 계급이 동시에 그 사회의 지배적인 정신적 세력이라는 말이다. 물질적인 생산의 수단을 통제하는 계급은 그 결과 정신적인 생산의 수단도 통제하고 있으며, 그에 따라 정신적인 생산수단을 가지지 못한 계급의 사상은 대체로 그것에 종속된다. 지배적인 사상은 지배적인 물질적 관계들의 관념적 표현, 사상으로서 파악된 지배적인 물질적 관계일 뿐이다. 그러므로 한 계급을 지배 계급으로 만드는 관계들의 표현, 즉 이 계급의 지배 사상 이외의 아무것도 아니다.”(Marx, K. / Engels, F., 『독일 이데올로기 I』, 김대웅 역, 두레, 1989. pp.91-92) [본문으로]
  6. 이 시기를 자본주의로의 이행기로 봐야하는지 아직 본질적으로 봉건적인 자본주의 초기로 인식해야 하는지는 우리의 관심분야가 아니다. 이 시기 구분 문제에 관해서는 맑스주의 내부의 논쟁이 전개된 적이 있다. 모리스 돕(Maurice Dobb)은 “튜더 및 스튜어트 시대의 영국을 훗날의 ‘산업 자본주의’에 대비시켜, ‘상인 자본주의’로 규정하는 것은 문제를 회피하는 것”으로 “생산력은 중세나 다름없는 형태였더라도 생산관계는 [이미 변화하고 있던 게 아닐까]”하는 해결책을 제시하려 했다. [본문으로]
  7. Immanuel Wallerstein, 유재건 역, 『근대세계체제Ⅱ』, 까치, 1999, p.19 [본문으로]
  8. Hobsbawm, E. J., “The Crisis of the Seventeenth Century”, in Trevor Aston, ed., 『Crisis in Europe, 1560-1660』. London: Routledge & Kegan Paul, 1965, p.5 원래 「과거와 현재(Past and Present)」(1954)지에 실린 논문이다. [본문으로]
  9. Immanuel Wallerstein, op. cit, pp.57-58 [본문으로]
  10. 이에 대해서는 허쉬만(Hirschman)의 『The Passions and The Interests(열정과 이해관계)』를 참조할 것 [본문으로]
  11. Galbraith, J. K., 장태구 역, 『경제학의 역사』, 세종연구원, 1996, pp.53-54 [본문으로]
  12. Albert O. Hirschman, 『The Passions and The Interests –Political Arguments for Capitalism before Its Triumph』, Princeton University Press, 1978, p.80에서 재인용 [본문으로]
  13. 우에노 이타루, 신현호 역, 『세계사를 지배한 경제학자 이야기』, 국일증권경제연구소, 2003, p.106 [본문으로]
  14. lbid., p.107 [본문으로]
  15. Anderson, Perry, 『Lineages of the Absolutist State』, Lodon: New left Books, 1974, p.31 중상주의가 발전하던 당시는 봉건적인 경제 질서의 잔재가 많이 남아있었던 시기였던 만큼 이 말은 여전히 적용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본문으로]
  16. Vagts, Alfred, 『A History of Militarim』, New York : Meridian Books, 1959, p.70 [본문으로]
  17. 여기서 지대는 경제적인 차원을 넘어 기득권이라는 포괄적인 의미를 갖는다. 이해를 돕기 위해 경제학에서 지대추구행위가 무엇을 뜻하는지 간단히 살펴보겠다. 지대(rent)란 공급이 제한된 독점적인 생산요소나 지위를 가지고 있을 때 그 요소의 공급자가 얻을 수 있는 경제적 이득을 말하며, 흔히 판매가격이 기회비용보다 얼마나 높은가에 의해 측정된다. 지대추구행위란 지대를 얻고자 하는 자가 공급을 제한하거나 비탄력적으로 만들려는 하는 행위들을 말하는데, 일반적으로 국제무역에서는 정부가 국제무역을 제한하는 과정에서 발생하며, 국내기업들이 자신의 지위를 보호받고 이권을 획득하기 위해 경쟁하는 과정에서 자원이 낭비되는 현상을 일컫는다. 크루에거(Ann Krueger)와 바그와티(Jagdish Bhagwati)는 수입보호가 지대추구행위를 심화시켜 경제의 비효율성을 심화시킨다고 역설한 바 있다. 지대와 이권을 추구하기 위해 보호받는 산업가와 정치인, 정부관료 사이에서 뇌물 등이 오가는 비생산적 노력들이 나타나고 경제성장에 악영향을 미치게 된다는 것이다. [본문으로]
  18. Niehans, Jürg (1990), A History of Economic Theory: Classic Contributions, 1720–1980, Baltimore, MD: Johns Hopkins University Press [본문으로]
  19. Marx, K., 『자본론』, 김수행 역, 비봉출판사, 2006, 3권 하, p.954 [본문으로]
  20. 『자본론』, 3권 상 p.399 [본문으로]
  21. 『자본론』, 3권 상 p.394 [본문으로]
  22. 『자본론』, 1권 상 p.170 [본문으로]
  23. 물신숭배는 원래 바위나 큰 나무, 조상이 남긴 물건에 영혼이 깃들어 있고, 그것이 초자연적인 마법의 힘으로 사람들의 행복과 불행을 좌우한다는 신앙이다. 영어로는 페티시즘(fetishism)이라고 하는데 이 말은 15∼16세기에 포르투갈 탐험가들이 서아프리카 사람들이 돌이나 나무 같은 특정 대상물에 기도하는 것을 보고 쓰기 시작했다고 한다. 이 말의 어원인 라틴어 팍티키우스(facticius)는 '마법의 힘을 갖는다'는 뜻이다. 물신숭배는 세계 곳곳에서 볼 수 있는데 아프리카 사람들은 동물 뿔 속에 마법을 부리는 물건[물신, 物神]을 담아두고, 물신이 사냥을 잘되게 하고 병마를 막아낸다고 여겼다. 이러한 주술적 물건에는 조상의 머리카락이나 뼈도 있는데, 이들은 물신을 개인 사당에 모시고, 자신과 가족들의 건강을 기원했다. 물신은 세습으로 전해지며, 이것을 가진 사람들의 특권을 나타내고 권력의 밑바탕이 되었다. [본문으로]
  24. Magnusson, Lars G. 「Mercantilism」, 『A Companion to the History of Economic Thought』, ed, Blackwell, 2003, p.48 [본문으로]
  25. 『자본론』, 2권 p.11 이 부분은 서문으로 엥겔스가 쓴 것이다. [본문으로]
  26. 『자본론』, 2권 p.70 [본문으로]
  27. 『자본론』, 3권 하, p.953 [본문으로]
  28. 『자본론』, 3권 상, pp.407-408 [본문으로]
  29. Marx, K., 『잉여가치학설사』 [본문으로]
  30. 이강국, 『다보스, 포르투 알레그레 그리고 서울 –세계화의 두 경제학』, 후마니타스, 2005, p.122 [본문으로]
  31. 홍훈, 『경제학의 역사』, 박영사, 2007, pp.41-43 [본문으로]
  32. lbid, pp.44-49 [본문으로]
Posted by Economist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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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스스로 목숨을 끊겠다

-선택의 패러독스를 읽고

 

 “나는 스스로 목숨을 끊어야 하나, 아니면 커피를 마셔야 하나.” 소설가이자 실존철학자인 알베르 카뮈가 던진 말이다. 이런 말은 미시경제와 게임이론 등 선택을 강조하는 일반 주류경제학의 행태주의 또는 행동주의에 꽤나 달갑게 들린다. 삶의 모든 문제가 선택의 연속이구나!


선택의 패러독스의 저자인 미국 스워스모어 대학의 사회행동학 교수 배리 슈워츠는 흥미롭게도 사람들의 선택이 실존과 관련됨에도 불구하고 선택의 누적은 현대인에게 심한 스트레스를 가져다준다고 주장한다. 사람들은 선택의 기회가 많아질수록 진정 원하는 삶의 가치를 찾을 것이라 믿지만, 개인적 자유와 자율성의 상징인 선택이 오히려 우리의 심리적 감정적 만족에 해가 된다는 것이다. 인간의 모든 활동을 의도적이고 의식적인 선택의 문제로 만들기 때문이다.


 이런 견해는 도모노 노리오가 쓴 행동경제학에도 등장한다. “사람들은 선택대안이 많아지면 질수록, 선택결과에 대한 만족도가 낮아진다. 그 이유는 자신이 선택하지 않은 것 중에서 자신이 선택한 것보다 더 좋은 것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일찍이 도덕경에서도 이와 같이 많은 선택에 대해 부정적인 견해를 보인다.

 

오색영인목맹(五色人目盲)

다섯 가지 색은 눈을 멀게 하고

오음영인이롱(五音人耳)

다섯 가지 소리는 귀를 멀게 하고

오미영인구상(五味人口爽)

다섯 가지 맛은 입맛을 잃게 한다.

- <도덕경(道德經) 12>

 

 그렇다면 우리는 어찌해야하는가? 배리 슈워츠는 '가장 좋은 것'보다 '충분히 좋은 것'을 선택하라고 권한다. 가장 좋은 것을 구하려면 가능한 한 모든 대안-경제학적으로 정확히 표현하면 대체 가능한 것을 의미한다-을 검토해야 한다. 그러나 현대와 같이 대안이 넘쳐나는 세상에선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 최고만을 추구하고 받아들이는 '극대화자'는 고르고 또 고르느라 오히려 불행해지기 쉽다. 반면 더 좋은 게 있을 수 있다고 하지만 그 가능성은 접어두고 일단 충분하다고 생각되는 것에 만족하는 '만족자'가 낫다고 그는 말한다. , 진정한 선택을 위해서는 선택을 나 자신이 직접 통제할 수 있는 것으로 한정 짓고 중요한 선택에만 집중하는 자세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자신의 선택이 최선의 선택이라는 만족감을 느끼는 지혜도 요구된다.


 경제학에서 스스로 선택의 다양성이 갖는 폐해를 다뤘다는 점에서 나는 이 책을 높이 평가한다. 그러나 개인적으로 생각하기에 카뮈의 위 질문에 대해선 올바른 답변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그는 목숨을 끊는 실존적 위기와 커피라는 상품을 소비하는 일상적 삶에서 갈등하고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에게 배리 슈워츠가 과연 어떤 말을 해줄 수 있을까.


 우리는 진정 선택의 자유를 얻었다. 하지만 과연 슈퍼마켓에서 크래커 85종 중 원하는 크래커를 선택하는 것이, 쿠키 285종 중 원하는 쿠키를 선택하는 것이, 선탠오일과 선블록 61종 중 원하는 선제품을 선택하는 것이, 립스틱 150종 중 원하는 색상의 립스틱을 선택하는 것이, 대학의 핵심강의 220개 중(하버디 기준) 원하는 강의를 선택하는 것이, 이렇게 많은 선택을 택하는 자유가 있다는 것이 과연 행복한가?


 자본주의라는 매커니즘 속에서 우리는 수많은 상품들의 다양성과, 다양한 욕구 충족에 열광한다. 배리 슈워츠는 이런 다양성에서 심리적 피로를 준다고 견해를 피력하지만, 사실 자본주의에서는 이런 다양한 상품들은 오로지 화폐로 모습을 단일화하여 드러낼 뿐이다. 삶의 다양한 욕망은 오로지 화폐축적에 대한 영원한 갈망으로 등장하는 것이다. 선택의 다양한 질적 차이는 오로지 화폐의 많고 적으냐의 양적 차이의 문제로 환원된다.


 그러고 보면 자본주의 속에서 우리는 실로 많은 고통을 겪고 있는 것이다. 배리 슈워츠가 주장하듯이 질적으로 다른 무수한 상품들 속에서 고통을 받고, 그런 상품들의 질적 차이를 사상한 화폐라는 가치를 양적으로 더 많이 획득하기 위한 고통을 감내한다.


 일상의 삶이, 자본주의가 주는 상품의 다양성이 이렇게 고통스러운 것이라면 차라리 죽는 것이 낫다. 커피라는 상품을 소비하기보다, 실존의 문제에 봉착하는 것이 더 선()에 가까워보인다. 나는 카뮈에게 이렇게 답변하겠다. 소크라테스처럼 스스로 목숨을 끊으라고.

 

 인디언들은 말을 타고 달리다가도 중간중간 잠시 멈춰서는 경향이 있었다고 한다. 이는 육체의 속도를 영혼이 따라올 수 없을 거라 판단했기 때문이다. 우리는 과연 영혼이 쉴 만한 여유를 주고 있는가?

Posted by Economist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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