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스스로 목숨을 끊겠다
-『선택의 패러독스』를 읽고
“나는 스스로 목숨을 끊어야 하나, 아니면 커피를 마셔야 하나.” 소설가이자 실존철학자인 알베르 카뮈가 던진 말이다. 이런 말은 미시경제와 게임이론 등 ‘선택’을 강조하는 일반 주류경제학의 행태주의 또는 행동주의에 꽤나 달갑게 들린다. 삶의 모든 문제가 선택의 연속이구나!
『선택의 패러독스』의 저자인 미국 스워스모어 대학의 사회행동학 교수 배리 슈워츠는 흥미롭게도 사람들의 선택이 실존과 관련됨에도 불구하고 선택의 누적은 현대인에게 심한 스트레스를 가져다준다고 주장한다. 사람들은 선택의 기회가 많아질수록 진정 원하는 삶의 가치를 찾을 것이라 믿지만, 개인적 자유와 자율성의 상징인 선택이 오히려 우리의 심리적 감정적 만족에 해가 된다는 것이다. 인간의 모든 활동을 의도적이고 의식적인 선택의 문제로 만들기 때문이다.
이런 견해는 도모노 노리오가 쓴 『행동경제학』에도 등장한다. “사람들은 선택대안이 많아지면 질수록, 선택결과에 대한 만족도가 낮아진다. 그 이유는 자신이 선택하지 않은 것 중에서 자신이 선택한 것보다 더 좋은 것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일찍이 도덕경에서도 이와 같이 많은 선택에 대해 부정적인 견해를 보인다.
오색영인목맹(五色人目盲)
다섯 가지 색은 눈을 멀게 하고
오음영인이롱(五音人耳)
다섯 가지 소리는 귀를 멀게 하고
오미영인구상(五味人口爽)
다섯 가지 맛은 입맛을 잃게 한다.
- <도덕경(道德經) 제12장>
그렇다면 우리는 어찌해야하는가? 배리 슈워츠는 '가장 좋은 것'보다 '충분히 좋은 것'을 선택하라고 권한다. 가장 좋은 것을 구하려면 가능한 한 모든 대안-경제학적으로 정확히 표현하면 대체 가능한 것을 의미한다-을 검토해야 한다. 그러나 현대와 같이 대안이 넘쳐나는 세상에선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 최고만을 추구하고 받아들이는 '극대화자'는 고르고 또 고르느라 오히려 불행해지기 쉽다. 반면 더 좋은 게 있을 수 있다고 하지만 그 가능성은 접어두고 일단 충분하다고 생각되는 것에 만족하는 '만족자'가 낫다고 그는 말한다. 즉, 진정한 선택을 위해서는 △선택을 나 자신이 직접 통제할 수 있는 것으로 한정 짓고 △중요한 선택에만 집중하는 자세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자신의 선택이 최선의 선택이라는 만족감을 느끼는 지혜도 요구된다.
경제학에서 스스로 ‘선택’의 다양성이 갖는 폐해를 다뤘다는 점에서 나는 이 책을 높이 평가한다. 그러나 개인적으로 생각하기에 카뮈의 위 질문에 대해선 올바른 답변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그는 목숨을 끊는 실존적 위기와 커피라는 상품을 소비하는 일상적 삶에서 갈등하고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에게 배리 슈워츠가 과연 어떤 말을 해줄 수 있을까.
우리는 진정 선택의 자유를 얻었다. 하지만 과연 슈퍼마켓에서 크래커 85종 중 원하는 크래커를 선택하는 것이, 쿠키 285종 중 원하는 쿠키를 선택하는 것이, 선탠오일과 선블록 61종 중 원하는 선제품을 선택하는 것이, 립스틱 150종 중 원하는 색상의 립스틱을 선택하는 것이, 대학의 핵심강의 220개 중(하버디 기준) 원하는 강의를 선택하는 것이, 이렇게 많은 선택을 택하는 자유가 있다는 것이 과연 행복한가?
자본주의라는 매커니즘 속에서 우리는 수많은 상품들의 다양성과, 다양한 욕구 충족에 열광한다. 배리 슈워츠는 이런 다양성에서 심리적 피로를 준다고 견해를 피력하지만, 사실 자본주의에서는 이런 다양한 상품들은 오로지 화폐로 모습을 단일화하여 드러낼 뿐이다. 삶의 다양한 욕망은 오로지 화폐축적에 대한 영원한 갈망으로 등장하는 것이다. 선택의 다양한 질적 차이는 오로지 화폐의 많고 적으냐의 양적 차이의 문제로 환원된다.
그러고 보면 자본주의 속에서 우리는 실로 많은 고통을 겪고 있는 것이다. 배리 슈워츠가 주장하듯이 질적으로 다른 무수한 상품들 속에서 고통을 받고, 그런 상품들의 질적 차이를 사상한 화폐라는 가치를 양적으로 더 많이 획득하기 위한 고통을 감내한다.
일상의 삶이, 자본주의가 주는 상품의 다양성이 이렇게 고통스러운 것이라면 차라리 죽는 것이 낫다. 커피라는 상품을 소비하기보다, 실존의 문제에 봉착하는 것이 더 선(善)에 가까워보인다. 나는 카뮈에게 이렇게 답변하겠다. 소크라테스처럼 스스로 목숨을 끊으라고.
인디언들은 말을 타고 달리다가도 중간중간 잠시 멈춰서는 경향이 있었다고 한다. 이는 육체의 속도를 영혼이 따라올 수 없을 거라 판단했기 때문이다. 우리는 과연 영혼이 쉴 만한 여유를 주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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