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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5.10.10 플라톤 향연, 에로스를 사유하다

2009년 서양철학사를 수강하며 플라톤 향연에 대해 작성한 발제문을 정리한 것입니다. 



Platon : SYMPOSIUM



 델포이의 아폴론 신전 현관 기둥에 새겨졌다는 너 자신을 알라라는 말로 우리에게 친숙히 다가오는 소크라테스는 평소 스스로 무지를 자처하며, 인간들 가운데 가장 지혜로운 자는 앎에 관한 한 자신은 아무것도 아님을 아는 자라는 철학을 펼쳐나간 인물이다. 그런 그가 향연에서 예외적으로 에로스에 관한 것 외에는 아무것도 모른다, 즉 에로스에 관해서는 안다고 피력한 바 있다(177d). 이것은 과연 모순된 발언일까? 나는 그렇지 않다고 본다.


 『향연에서 소크라테스와 디오티마의 논의를 보면, 에로스는 다른 것, 자신에게 없는 어떤 것과 관계를 맺는 가운데 존재하기 때문에 신이 될 수 없으므로 다이몬에 지나지 않으며, 그것은 인간과 신의 중간적 존재, 불멸과 필멸의 중간적 존재이자 중개자, 매개자의 입장을 취한다. 다른 한편으로 지혜를 추구하는 사람들은 지자도 아니고 무지한 자도 아닌 중간적 존재다. , 자기가 무지하다는 것을 자각하며, 지혜를 추구하고 사랑하는 사람인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예외적으로 에로스에 관해서는 안다고 말한 소크라테스는 결국 평소와 다름없이 자신이 무지하다고 말하고 있는 셈이 된다. 요컨대, 에로스로 표명되는 무지의 자각은 신이 아닌 인간이 완전한 지혜를 얻지 못하지만 끊임없이 추구할 수 있는 가능성을 지닌, 비극과 희극이 동시에 공존한다.


 『향연에서 아리스토파네스의 이야기 역시 이 비극과 희극은 동시에 공존한다. 그는 완전함을 상징하는 원의 형태를 띠고 있던 인간이 대단한 힘과 능력으로 신에게 대들었고, 그로 인해 인간이 신에 의해 반으로 나뉘어졌다고 말한다. 그리고 잃어버린 예전의 전체에 대한 욕망과 노력을 에로스라고 정의한다. 이는 인간이 현 상태는 완전하지 않는 비극적 요소를 지니고 있는 동시에 완전함에 대한 가능성을 제시한다는 희극적 요소(에로스) 역시 존재한다는 점에서 앞의 논의와 비슷한 측면을 지니고 있다. 나는 이러한 점이 소크라테스가 향연이 끝난 새벽에 아리스토파네스에게 희극을 쓸 줄 아는 것과 비극을 쓸 줄 아는 것이 동일한 사람에게 속할 수 있다는 것을 말한(223d) 까닭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소크라테스의 연설을 들은 다른 모든 이들이 그의 연설에 모두 동의하는 모습을 취했을 때 아리스토파네스가 그에 대해 반박하려 했듯이(212c), 둘 사이에는 큰 간극이 있다. 비록 둘 모두 에로스를 욕구로 정의하고 있지만, 아리스토파네스 연설 속에서 이 욕구는 완전함에 대한 회복으로 회귀적인 성격을 지닌 반면, 소크라테스의 연설 속에서는 지속적인 상승의 노력으로 분출한다.


 즉, 아리스토파네스에게 있어 인간 불완전의 결여가 잃어버린 자신의 반쪽이라면 소크라테스에게 있어서는 아름다움이며, 에로스는 그 자체로 아름다운 것을 수직적으로 추구하게 된다. 말하자면 아리스토파네스의 딸꾹질이 고통에서부터 딸꾹질 이전으로의 회복되는 과정을 그린다면, 소크라테스 연설은 자신이 지니지 못한 아름다움, 좋음으로 향하는 과정을 그린다.


 소크라테스는 아리스토파네스를 의식하여, 사랑하는 자는 자신과 같은 것을 찾는 자가 아니며, 자신의 손과 발이 자신에게 해로운 것이라 생각될 때 자신의 것일지라도 잘라내 버리려고 하듯이, 오직 좋음을 추구한다고 말한다(205d-206a). 그런데 아리스토파네스는 좋음과 같은 도덕적 문제들에 대한 언급이 없기에 이에 취약한 약점을 지닌다. 그에게 도덕성의 문제는 인간과 신과의 관계 회복이라는 종교 문제와 연관 짓는 것에서 끝나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소크라테스와 아리스토파네스 에로스에 관한 논의는 사실 성 자체보다 다양한 인간관계의 정신적 특징 혹은 사회의 기능으로 파악하는 데 중점을 두었다는 한계를 지니고 있다고 생각된다. 성해방운동가들이 성적인(sexual) 것과 생식적인(genital) 것을 분류하는 바를 따르자면, 이들은 성적인 것 자체의 중요성보다도 생식적인 부분을 많은 부분에서 언급한 것이다.


 그런 부분에서 가장 소란스럽게 향연에 등장하는 알키비아데스가 이들에 대해 언성을 높일 수 있는 여지가 있다. 실제로 그는 자신을 성적으로 상대하려 하지 않는 소크라테스에게 큰 불만을 토로하고 있다. 하나로부터 둘로 둘에서 다시 모든 아름다운 몸으로, 몸에서 영혼의 아름다움 등으로의 아름다움 자체에 도달하는 소크라테스의 에로스에서는 물론 하나 역시 소홀히 해서는 안 되지만 사랑과도 같이 정열적으로 그 하나에만 전념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이것은 사실 성을 연구하는 현대의 학자들에게는 매우 중요한 문제가 된다. 우리는 소크라테스와 같이 모두를 사랑하고, 모두에게 사랑받는 자에게 알키비아데스처럼 성적 수치심을 느끼기 때문이다. 그것은 자신의 남편이 모든 여자들에게 잘해주지를 않기를 바라는 것과 같다. 그리고 누구나 알키비아데스처럼 이성이 자신의 성적 매력에 이끌려 성 행위를 하기를 원하지, 소크라테스와 같은 사람은 자칫 자기에게 동정을 베푼다는 생각을 하기 쉽다.


 아리스토파네스와 소크라테스의 이야기가 비슷한 구조를 가지면서도 차이를 지녀 플라톤의 철학이 잘 표현된다고 말한다면, 알키비아데스의 이야기는 플라톤의 철학을 풍부하게 만드는 요소라 말할 수 있지 않을까?

Posted by Economist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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