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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5.09.05 인간이란 무엇인가? (2)
  2. 2015.09.05 인간이란 무엇인가? (1)

인간이란 무엇인가? (2)

 저번 글에서는 인간이란 무엇인가라고 묻는 질문이 갖는 의미를 다루었다. 인간다움의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에 따라서 세계를 어떻게 바라보고 어떻게 변화시켜야 되는지가 결정되는데, 우리는 인간의 다양한 속성들을 나열하기보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원하고 바람직하다고 생각하는 인간상에 대해 다루기로 하였다.

 예컨대 우리는 살인을 서슴없이 저지르는 사람 역시도 인간이라 정의라 내리고 있으며 현상 세계에 존재하는 인간이기는 하지만, 우리는 흔히 그런 사람은 인간도 아니다라고 언급을 하며 살인의 행위를 인간다움과 부정적 관계에 있는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그런가 하면, 우리는 인간의 감정이 통제되는 미래 도시를 다룬 영화 이퀼리브리엄(Equilibrium, 2002)을 보고, 그 도시가 바람직한 인간과 사회 모습이 아니라고 생각할 수 있다.

 앞으로는 인간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의 의의를 넘어서 그에 대한 필자의 생각을 전개 할 것이다. 사실 필자는 이에 관해서 많은 부분을 에리히 프롬(Erich Fromm, 1900~1980)에 의존하고 있으나, 필자는 단순히 에리히 프롬의 여러 도서들의 내용을 요약하고 설명하기보다는 인간에 대한 그와 같은 사고가 사회 변화에 구체적으로 어떤 영향을 줄 수 있는지에 대해 필자의 생각을 피력할 것이다. 그리고 원문의 내용을 정확히 인용하며 전달하는데 집중하기 보다는 우선 전체적으로 틀을 먼저 그려보는 시간을 가질 것이다.

 그동안 배웠던 서양 철학을 보면 구체와 추상에 관한 형이상학에 대해 많은 부분을 할애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것은 이성이라는 인간의 특이한 능력으로부터 사고 가능한 것일 텐데, 필자가 보기에는 이와 같은 부분이 인간의 여러 특징들을 규정지으며, 사회학에서 다룰 법한 사회의 여러 법칙들과도 관련이 있는 것 같다.

 인간은 구체적인 'a1, a2, a3, a4....'를 통해서 추상적인 ‘A'를 사고 할 수 있는데, 예를 들어 우리가 경험적으로 여러 모습의 까마귀들을 보고 그것을 통틀어 까마귀라고 정의내리는 것이다. 이것은 인간 특유의 이성과 언어에 의해 작용되는 것으로써 반대로 우리는 구체적인 까마귀 사진 한 장을 보더라도 다음에 실제로 까마귀를 보았을 때 우리는 그것을 까마귀라 부를 수 있다물론 까마귀와 비슷한 새를 보고 그것을 까마귀라 부르는 잘못된 판단을 내릴 수 있다. 우리는 더 나아가 까마귀를 더 추상적으로 새, 동물로 규정지을 수 있다 이러한 것들이 단순히 언어에 지나지 않을 수 있지만, 이에 대해 사고를 하는 것은 상당히 복잡한 문제이므로 다음으로 미루겠다. 우리는 구체적인 'a1, a2, a3, a4...'들을 각각 분리시켜 사고하기도 하는데 사실 현실 세계에서는 모든 사물이 변화하는 세계에 있기 때문 개별 'a1, a2, a3, a4들은 각기 서로 다른 것이기도 하므로이기도 하다.

 인간 역시 구체적이고 개별적인 현실의 여러 인간들이 있는데 철수도 있고 영희도 있고, 이러한 사고가 가능하다는 것은 인간이 서로 분리되어 있으며, 그것을 인식할 수 있다는 것을 입증한다. , 이성은 분리되어있는 실재로서의 자기를 인식할 수 있게 한다.

 그래서 우리는 불안감을 느낀다. 뿐만 아니라 현실 세계는 인간의 이성으로 인식하는 질서를 넘어서서 비결정적이고 불확실하며 개방적이다. 이러한 우주에 우리는 던져져 있으며 우리는 계속 낯설음을 느끼고 불안해하며 이성을 이용해 우주의 질서를 파악하고자 한다. 법칙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인간은 불안을 느끼며 법칙이 지배하고 법칙을 아는 자가 세계를 통제, 지배(세계에 대한 적극적 행위)가 가능하다는 신념을 가지고 있다. 신화, 형이상학, 과학으로의 그동안 인류의 학문의 발전을 보았을 때, 그것을 세속화라고 규정짓는 여러 학자들을 보았을 때 우리와 같이 학문을 하고 있는 사람들은 더욱 쉽게 위의 논증을 이해할 수 있다.

 따라서 인간의 절실한 욕구는 이러한 분리상태를 극복하고자 하는 것이다. 이것은 다양하게 이루어지는데, 동물숭배, 인간의 희생 또는 군사적 정복, 사치에의 탐닉, 금욕적인 관념, 강제노동, 예술적 사랑, 신의 사랑, 인간의 사랑, 독제체제, 도취적 합일(마약, 성적 행위), 집단과의 일치에 바탕을 둔 합일 등이 이루어진다. 차이를 제거하고 추상적 동일성을 찾으려는 노력은 학문에서 뿐만 아니라, 우리의 일상생활에서도, 화폐라는 가장 지배적인 추상이 등장하는 자본주의 사회 전체에서도 일어난다.

 인간에 대한 이와 같은 이해는 사회에 어떻게 작용 될까? 인간은 역사가 흘러가면서 노동이 분업화 되고, 군사 공동체가 형성이 되면서 인간은 더욱더 분리되고 그와 동시에 추상적으로 되어버렸다. 현 자본주의 사회를 보면, 구체적 노동과 화폐로 드러나는 추상적 일반 노동이 분리되는 것과 동시에 추상적으로 동일하며노동을 하는 인간 역시 마찬가지이다군사적 물리력을 독점하는 각 국가의 정부의 추상적 힘과 군사력의 기반인 일반 시민들의 구체성의 힘은 대립과 동시에 동일성을 갖추고 있다. 이런 구체와 추상의 아이러니한 관계에 대해 우리는 굳이 존재론적인 질문인 있는 것은 있고, 없는 것은 없다라는 말을 여기서 굳이 언급할 필요까지는 없다나는 뛰어난 철학자 헤겔이 아니므로….―

 현 자본주의 사회만큼은 아니더라도, 노동의 분업화가 어느 정도 이루어지기 시작한 사회에서 그것을 바라보았던 플라톤의 이론들, 그의 수많은 제자들, 분리되어 있는 개인들이 사회를 구성하는 방식을 논하는 사회계약론자들, 원자화된 개인들이 지배적인 사회를 비판하는 자들, 동양사회의 유교 재발견하려는 사람들을 보면서 필자는 위에서 기술한 사고를 정립하고 확신해 갔다.

 그런데 애초에 인간을 분리와 결합, 구체와 추상으로 바라보지 않고 분리만을 강조하는 근대와 현대의 여러 시도들은 나와 전혀 다른 사회를 구상해 왔다. 이기적 개인들의 도덕적 가치를우리가 더 이상 도덕적으로 논할 필요가 없게 하기 위해, 왜냐하면 그것은 현대에 와서는 파악이 힘들다고 외치기 때문에 너무나 힘든 작업일 뿐만 아니라, 도덕자들이 아무리 사회에 덕을 강조해도 군주나 일반 시민들은 그와 다른 행동을 일삼었으므로각자의 이해관계에 맞추는 사회를 그리며 자본주의를 찬양한다. , 분리된 개인의 이기심이 모였을 때 아이러니하게도 사회 전체에는 이타적인 행위의 결과물이 등장한다는 사고방식아담 스미스가 가장 대표적이다이 현 사회에 지배적 영향을 미치고 있는 것이다.

 이제 서양 철학에서 인간의 이성의 능력을 강조하는 것이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는지 자세히물론, 여기서는 자세한 인용은 다음으로 미루고논의해보겠다. 필자가 보기에 서양 철학은 인간의 두 가지 특별한 능력을 중심으로 다루고 있다. 첫째가 생각할 수 있다는 것이고, 둘째는 말할 수 있다는 것이다. 사실 이 두 능력에 의해 인간이 철학할 수 있기 때문이다. 서양 철학에서 플라톤과 칸트가 생각의 힘에, 그리고 아리스토텔레스와 비트겐슈타인이 언어의 힘에 깊은 관심을 기울였다는 사실만 봐도 이 두 가지 능력을 서양 철학에서 중점으로 다루고 있다는 것을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서양 철학에서는 이 양자 간의 관계가 중요해서 언어 이전에 생각이 있느냐, 아니면 생각하기 위해 언어가 먼저 있느냐는 질문이 매우 논쟁적인 주제가 되어 있다. 물론 이 질문에 저마다 달리 답할 수는 있겠지만, 이 두 능력이 서양 철학을 이루어지는 두 가지 단계를 명확하게 보여준다는 것만큼은 분명하다. 우선 생각한다는 것은 궁극적으로 서양 철학이 개인의 자아에서 출발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생각하기 위해 언어가 필요한 건 분명하지만, 아렌트가 말하듯 생각한다는 것 자체가 그 시작에 있어서는 아주 개인적인 활동이기 때문이다. 칸트가 계몽을 세계혁명이 아니라 자아의 성숙으로 이해한 것 역시 다르지 않은 맥락일 것이다. 그리고 서양 철학은 생각을 통해 자신을 성숙하게 하는 데서 그치지 않는다. 말할 수 있다는 것은 자신의 생각을 다른 이들과 나눌 수 있다는 뜻이며, 철학이 공유될 수 있다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문제는 이러한 사고는 결국 개인으로부터 출발하고 있다는 것이다. 아렌트의 The Promise of Politics소크라테스편을 보면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다. “소크라테스가 말하고 있는 것은그리고 아리스토텔레스의 우정에 대한 이론이 더욱 자세하게 설명하고 있는 것은다른 이와 함께 산다는 일이 나와 함께 산다는 것에서 시작한다는 것이다. 소크라테스의 가르침은 바로 단지 자기 자신과 사는 법을 아는 사람만이 다른 이들과 사는 데에도 적합함을 의미한다.” 필자가 보기에는 이러한 사고방식은 그대로 이어져, 플라톤 이후의 서양 철학에서 타자와의 관계개인에서 시작한다.

 그러나 문제는 서양 고대 철학에서는 말하는 능력이 타자와의 관계를 규정짓는데, 타자는 결국 아름다움을 인식한선의 이데아개인에게 있어 타자는 설득당해야 할 대상 뿐이라는 것이다. 플라톤은 인간들의 결합 원리인 에로스를 결핍된 대상에 대한 욕망으로 보는데, 이 때문에 그는 개인의 이기심에 기초해 결합을 설명한다는 비판을 받아 왔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이와 달리 동질성이 입각한 우정을 내세웠지만, 동일하지 않는 대상소크라테스적인 표현을 하자면 자신이 무지하다는 것조차 깨닫지 못한 자들에 대해서는 배타적인 원리일 뿐이다. 따라서 서양 고대 철학에서 타자와의 관계를 말하는 능력에서 찾는 행위는 개인의 생각을 남에게 설득하는 것 이상이 아니며, 이는 이타성에 입각한 원리는 아니다.

 이러한 사실이 개인의 합리성을 강조한 수많은 플라톤의 주석들에서도 발견되는 것은 결코 놀랄만한 일이 아니다. 그것은 사회계약론자들에게서, 공동체주의자들에게서테일러의 진정한 자기애, 의사소통의 합리성을 강조하는 이들에게서 극명히 발견될 뿐만 아니라 심지어 에리히 프롬조차 이를 피해가지는 못한다. 왜냐하면 그는 이타적 사랑을 마조히즘과 구분하고자하며, 만인에 대한 보편적 사랑사해동포적 성격을 지니는을 주장했기 때문이다. 아쉽게도 개인이 보편이 되는 방법은 이성의 능력에 의지하는 길밖에 없는 듯 보인다.

 그러나 에로스는 대상에 대한 지향적inter욕망 플라톤은 향연에서 아버지가 누구의 아버지이듯이, 에로스 역시 의 에로스라고 말한 바 있다이므로 그것은 보편적 관계가 아니라 아주 특수한 관계이다. 왜 우리는 특수한 관계들의 변화와 조화, 생성, 위치변화가 거시적인 사회의 변화를 가져온다는 생각을 하지 못하는가? 우리는 생각을 잘하고, 말하는 능력이 탁월한 자들이 세상을 구상하고, 우리를 구원해주기를 진정 바라는 것인가?

 

 그동안의 논의를 정리해보도록 하겠다. 인간 세계에서는 구체적 현상과 보편적 추상이 나타나는데, 인간은 이성을 통해 이를 인식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 그런데 이러한 이성의 능력은 인간이 서로 각기 다른 존재임을, 불확실하게 보이는 이 세계와 분리되어 있다는 사고를 낳는다. 그래서 인간은 이러한 분리를 다양한 방법을 통해서 극복하고자 하는데, 그동안의 서양철학에서는 이성의 특별한 능력을 통해 인간을 보편으로 끌고 가고자 노력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이성은 결국 개인에서 출발하므로 이기심에 기초하며, 사회의 지배 이데올로기는 이 이기심이 사회를 봤을 때 보편적으로 좋은 결과를 낳는다는 생각으로 발전하기에 이르렀다. 인간에 대한 이러한 이해가 결국 이 사회의 지배적 이데올로기인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우리가 지향해야 하는 인간상을 지배적으로 제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 2009년에 <철학적 인간학>을 수강하며 작성한 글을 블로그에 맞게 수정한 것입니다.


Posted by Economist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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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이란 무엇인가? (1)

 『성경시편詩篇을 보면 너 스스로를 생각하는 너, 인간이란 도대체 무엇인가라고 묻고 있다. 이에 대한 답은 아주 다양할 수 있다. 수업시간에서도 이에 대한 다양한 의견들이 나왔었다. 그러나 우리가 인간이란 무엇인가라고 묻는다는 것은 인간에 대한 본질에 대한 질문이며, 이는 단순히 인간의 다양한 성격들을 나열하는 일만은 아닐 것이다. 칸트는 인간의 이성이 알 수 있는 것은 진리가 어딘가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뿐이다.”라고 말한 바 있는데, 현재처럼 다양한 인식론이 대두되고 있는 상황에서 우리가 인간의 본질을 규명하고자 하는 시도는 생각보다 훨씬 복잡하며, 그 해답을 구하지 못할 수 있는 일이 될 수 있다.

 그러나 누군가 인간이란 무엇인가에 대해서 우리는 알 수 없습니다. 그런데 당신은 왜 그것을 알려고 하나요?” 묻는다면, 나는 우리는 끊임없이 인간다움을 생각하며, 그에 대한 질문은 세계를 어떻게 바라보며, 이 세계를 우리가 어떻게 변화시켜야 되는지에 대한 해답을 주기 때문에 가치 있는 질문입니다.”라고 말할 것이다.

 인간이 본래 자유로운 존재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자본주의는 항시 인간의 자유를 어느 정도 제약한다고 생각할 것이고, 그들에겐 자본주의에 나타나는 화폐의 물신성을 어떻게 극복해 나아가야할지가 주요 논의 사항이 되곤 한다. 인간이 현재 성적으로 억압되어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인간이 성적으로 해방되어 있는 사회가 좋은 사회이며, 인간은 원래 그런 존재라는 가치관을 담고 있다.

 따라서, 우리가 인간이 무엇이냐고 묻는 질문은 단순히 우리가 이 현실세계에서 어떤 모습을 지니고, 어떤 성격을 지니고 있느냐에 대해 답을 하는 것을 넘어, 우리가 지향하고 꿈꾸는 바가 무엇이냐를 결정하는 주요한 물음이다.

 우리는 연쇄살인범에 대해 흔히 그는 인간도 아니다.”라는 말을 하기도, 때로는 그와 비슷한 말을 듣기도 한다. 그러나 우리는 진짜로 그를 인간이 아니라고 규정하기 보다는 우리 마음 속 깊이 인간다움에 대해 어느 정도 정의를 내리고 있으며, 살인을 서슴없이 저지르는 살인범은 그런 범주에 속하지 않는다는 것을 말하고 있을 뿐이다.

 이것은 일종의 토톨로지(Tautology)로 우리가 친구들과 함께 대화하며 그는 정말 남자답다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 애초에 그는 남자이지만 우리는 흔히 남자다움을 상정하고 있기 때문에 벌어지는 일이며, 이는 논리학에서 단순히 “A=A라고 말하는 것과는 다른 방식이 아닐 수 없다.

 그렇다면 우리는 진정 인간의 어떤 모습을 인간다움이라 생각하고 느끼는가. 이에 대한 일화를 하나 들도록 하자. 프리모 레비(Primo Levi)는 아우슈비츠에서 살아남은 후, 이탈리아로 돌아와 자신의 수용소 체험을이것이 인간인가라는 제목으로 1947년에 출간했다. 여기서 인간이라면 이런 짓은 절대로 하지 않을 것이다라는 우리의 막연한 믿음이 얼마나 허망한 것임을 알 수 있다.

 이 책에서 대단히 인상적인 대목이 나오는데, 당시 프리모 레비는 강제수용소에서 피콜로라는 동료 죄수와 함께 밥을 나르는 작업을 하고 있었다. 그곳 수용소에서는 영양 섭취가 절대적으로 부족해서 아무리 애를 써도 보통 생활이라면 3달 안에 죽을 수밖에 없는 환경이었고, 게다가 가혹한 강제노동을 매일매일 강요받았으며 자칫 사소한 규칙 하나라도 위반할 경우엔 무시무시한 고문과 처벌이 기다리고 있었다. 동시에 다른 사람의 약점을 고발하거나 어떻게 하면 남을 속여서 그의 물건을 훔칠까, 어떻게 하면 나보다 더 약한 인간을 짓밟아 살아남을까만을 궁리하는 곳이 바로 강제수용소라는 공간이다. 거기서 피콜로는 레비에게 아무 시라도 좋으니 읽어주지 않겠느냐?’고 말한다. 시 낭독을 부탁받았지만 수용소엔 당연히 책 같은 것이 없으므로 기억하고 있던 시를 읊조리는고 있는데, 이때 레비의 뇌리에 단테(Alighieri Dante)신곡에 나오는 오디세우스의 노래가 불현듯 스친다.

 

그리하여 나는 조그만 배 한 척을 얻어

 언제나 나를 따르는 몇몇 친구들과 심연의 대양을 향해 나섰소.

스파냐와 모로코에 이르기까지 피안과 차안을 바라보고

 또 사르디니아 섬과 바다에 씻기고 있는 그밖에 많은 섬들을 보았소.

인간이 더 이상 넘어가서는 안 된다고 경고하는,

헤라클레스가 세워놓은 좁은 입구 표지에 이르러서는

나와 동료들 모두 이미 늙고 어느덧 때는 늦었는데,

오른쪽으로는 세비야가 멀어지고 왼쪽으로는 벌써 세타가 보이지 않게 되었소.

난 이렇게 말했소.

, 온갖 위험을 무릅쓰고 세상의 서쪽 끝에 다다른 형제들이여!

그대들은 태양을 좇아

얼마 남지 않은 짧은 오관을 각성하며

사람 살지 않는 세상을 탐색하려는 마음 버리지 말지어다.

그대들은 자신의 타고난 기원을 기억하라.

그대들은 짐승 같은 삶을 살기 위해서가 아니라 덕과 지식을 구하기 위하여 태어났나니.’

동료들은 나의 이 짧은 연설을 듣고 모두가 서로 불발하며 뱃길을 앞 다투었으니

그들을 진정시키기가 힘들 지경이었소.

 

 요컨대 오디세우스가 지극히 험난했던 이 항해 도상에서 이제 끝인가!”하고 생각했을 때, 우리는 짐승처럼 살아가기 위하여 태어난 것이 아니다. 덕과 지혜를 구하기 위해서 태어났다. 그것이 바로 인간이다. 그렇게 이야기한다. 그 말을 통해 피콜로에게 힘을 내라고 했던 것이다.

 강제수용소의 삶은 우리가 쉽게 느끼기에도 인간다움이 결여되어 있는 삶이다. 혹은, 영화 이퀼리브리엄(Equilibrium, 2002)에서 나타나는 모든 감정이 통제되는 미래도시역시 우리에게는 너무나 인간다움이 결여되어 있는 곳으로 느껴진다. 이는 즉 우리가 인간다움을 생각할 때 그것은 상당히 이상적이며, 강제와 통제로 우리의 덕과 지혜가 제한되거나 살인을 서슴없이 저지르는 비윤리적인 모습, 감성이 억압되지만 이성으로 질서정연한 인간의 모습까지도 그것이 진정 인간답다고 느끼지 못한다는 것이다.


* 2009년에 <철학적 인간학>을 수강하며 작성한 글을 블로그에 맞게 수정한 것입니다.

Posted by Economist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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