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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유의 즐거움

아리스토텔레스의 사랑과 자본주의 경제

2009년 서양철학사를 수강하며 작성한 레포트를 정리한 것입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사랑(philia)과 자본주의 경제




목차

 

. 들어가는 말

. 아리스토텔레스의 사랑(philia) - 탁월성(, arete)의 일종으로서의 사랑

. 사랑은 왜 필요한가 - 사랑과 행복 그리고 윤리

. 자본주의 경제의 물상화(reification)와 사랑(philia)

. 맺음말

 

 

. 들어가는 말

 

 많은 이들은 이 글의 제목인 아리스토텔레스의 사랑(philia)과 자본주의 경제를 보고, 철학적 개념인 사랑(philia)을 경제학적으로 바라보는 것에 대해 여러 의혹들을 품을 수 있다. 그러나 경제학이라는 것이 철학적으로 이미 많이 다루어지고 있는 자본주의에 대한 분석이라는 것을 상기한다면, 내가 이 글을 통해 철학적 개념인 아리스토텔레스의 사랑(philia)을 경제학적인 방법으로 다루는 것에 대해 큰 반감을 갖지 않을 수도 있다. 왜냐하면 내가 시도하고자 하는 것은 일반적으로 경제학이라고 받아들여지고 있는 여러 수치들에 대한 고뇌가 아니라 자본주의 경제에 대한 성찰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런 성찰에 있어 단지 아리스토텔레스의 사랑(philia)의 개념을 중점적으로 다루고 있을 뿐이기 때문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사랑(philia)의 개념을 통해 자본주의를 성찰하고자 했던 그동안의 시도들은 아리스토텔레스가 유익함을 이유로 하는 사랑(philia)이 불완전하다고 했던 것에 주로 기초하여 논의를 진행해왔다. , 경제적 이익의 동기로 친분을 쌓고자 노력하는 현대인들을 비판할 수 있는 근거가 되어왔었다.


 이런 협소한 수준을 넘어서는 보통 인격적 사랑의 개념으로 사용되어 현대 자본주의 사회의 인간관을 비판해왔었다. 여기서 사랑(philia), phila는 좁은 의미에서의 우정뿐만이 아니라 보다 넓은 의미에서의 우정으로 파악될 수 있는 정신-인격적 사랑으로 이해되고 있다.[각주:1] 이는 앞의 논지를 발전시킨 것이다. , 자본주의 사회에서 경제적 이익을 바탕으로 하는 인간관계가 지배적인 것을 비판하고 정신-인격적인 관계를 주장하는 것이다.


 나는 이런 방식으로 그동안 시도되어 왔던 것을 여기서 다시 반복하고자 하지 않는다. 그러한 논의들은 분명히 충분한 가치가 있지만, 왜 자본주의 경제에서는 유독 경제적 이익을 이유로 하는 사랑이 지배적인지에 대한 경제 사회구조적인 이해가 결여되어 있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아리스토텔레스의 사랑(philia) 개념을 깊이 있게 다루고 있지 않다. 따라서 나는 이 글을 통해 아리스토텔레스의 사랑(philia) 개념을 중점적으로 살피며, 자본주의 경제 사회에서 인간관계가 왜 그렇게 피상적이며 경제적 이익을 근거로 하여 성립하게 되는지에 대한 분석을 시도할 것이다.


 이 글의 순서는 다음과 같다. 먼저 아리스토텔레스의 사랑(philia)을 분석하면서 아리스토텔레스의 사랑(philia)이 탁월성의 일종으로서의 사랑이며, 그것이 윤리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다는 것을 논할 것이다. 그리고 자본주의 경제에서 윤리적인 삶이 시행되기 어려운 이유, 즉 사랑(philia)이 실현되기 힘든 원인을 물상화(reification)를 가지고 설명할 것이다. 이러한 글의 구조는 단순히 아리스토텔레스의 사랑(philia)을 논하며, 이러한 철학적 개념이 현실에 실현되기를 단순히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자본주의 경제의 문제점들이 극복되어야지만 사랑이 실현될 수 있고 윤리적인 삶을 살 수 있다는 것을 밝히는 데에 있다. , 이 글은 아리스토텔레스의 힘을 빌려 자본주의 경제를 비판하기 위한 시도이다.

 

 

 

. 아리스토텔레스의 사랑(philia) - 탁월성(, arete)의 일종으로서의 사랑

 

 ‘philia’는 주로 우정, 사랑으로 번역되는데, 우리의 어감에는 친구가 될 수 없는 선후배나 부모자식을 포함할 수 있는 관계에 있기 때문에 우리가 일반적으로 인식하는 우정과 다소 차이가 있다. 또 성적인 사랑(eros)과도 다른 의미를 지니고 있기 때문에, 아리스토텔레스에 있어 ‘philia’가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는지 먼저 살펴볼 필요가 있다.

 

 사랑(philia)은 일종의 탁월성(arete)이거나 혹은 탁월성을 수반하는 것이다.(EN 81155a3-4)

 

 아리스토텔레스는 니코마코스 윤리학2권에서 탁월성에 관한 일반적 설명 이후, 개별적 탁월성을 열거하면서 사랑(philia)을 인간관계에서 놀이 이외의 일상적 삶에 공유되는 즐거움과 관련한 중용의 품성상태로 정의하였다.[각주:2] 여기서 인간관계는 부모자식이나 형제지간과 같은 가족 관계부터 시작하여 정치적 공동체에 소속된 동료 시민까지의 범위를 포함하는 넓은 의미의 인간관계이다.


 사랑은 일종의 탁월성이기에 탁월성의 구별과 같은 방법으로, 활동으로서의 사랑과 품성상태로서의 사랑으로 구별된다.[각주:3] 품성상태는 상응하는 활동(들의 반복)에서 생기는데, 이는 올바른 행위의 반복에서 올바른 품성상태가 생긴다.[각주:4] ,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있어 진정한 의미의 사랑은 중용에 따른 올바른 활동에 의해 형성된 품성상태이다.


 이러한 탁월성에 기초한 사랑은 유익이나 즐거움과 같이 상대방에게 우연적으로 속하는 것에 의해 성립한 것이 아니다. 유익이나 즐거움과 달리 상대방 자체의 좋음에 의해 성립한 것이며, 유익이나 즐거움 때문에 생긴 사랑은 더 이상 유익과 즐거움을 주지 못하면 사랑이 멈추는 것[각주:5]과 달리 탁월성이 지속적인 것과 마찬가지로 탁월성에 기초한 사랑은 유지된다. 좋음에 의한 사랑은 더불어 유익과 즐거움을 준다.[각주:6] 따라서 이것이 가장 완전한 사랑이다.

이렇게 아리스토텔레스에 있어 사랑(philia)은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할 수 있는 연애의 감정이나 우정과 다른 개념이다. 그가 가장 좋은 사랑을 탁월성과 관련지어 생각해본 것 역시 우리가 쉽게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다. 더불어 ‘philia’가 인격적인 사랑으로 받아들여지고 있지만, 사실 상대방 그 자체를 전인격적으로 바라보기보다는 상대방의 탁월성에 기초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 전체적 인격 그 자체를 사랑했다기보다는 선함, 고귀함을 사랑한 것처럼 보인다.


 사랑이 탁월성과 결부되어 다소 딱딱하게 보이는 이유는 다음과 같다. 서로 호의를 가지고 있고, 상대방이 잘 되기를 혹은 훌륭하기를 바라며, 또 그런 호의나 바람이 서로에게 알려져 있는, 그런 사람들의 관계가 사랑이다. 그런데 서로가 잘 되기를 바라는 것은 서로가 좋은 사람인 한에서 바란다. 나쁜 사람은 자신들에게 좋아 보이는 것 대신, 실제로는 해가 되지만 즐거운 것을 선택[각주:7]하지만 훌륭한 사람은 자신에게 좋음과 그렇게 보이는 것을 바라며 실제로 행하고 사랑하는 사람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이다. 모든 지성(nous)은 자신에게 최선의 것을 선택하며, 훌륭한 사람은 그 지성의 설득에 복종하기 때문이다.[각주:8] 따라서 사랑에는 탁월성이 결부되었고, 영혼의 지속적인 상태로서의 탁월성은 순간적인 감정과 구별되기에 사랑 역시 감정으로 바라보지 않았기 때문에[각주:9] 우리에게 다소 메마르게 다가올 수 있다.

 

 

 

. 사랑(philia)은 왜 필요한가 - 사랑과 행복 그리고 윤리


 이제 서로를 이용하지 않는 진정한 사랑은 탁월성을 이유로 하는 좋은 사람들 사이에서만 가능하다.[각주:10] 그런데 좋은 사람들은 그들 모두 자기 충족적이기 때문에 상대방을 필요로 하지 않기 때문에 사랑은 불가능하게 된다. 아리스토텔레스 역시 행복을 그것만으로 삶을 선택할 만한 것으로 그리고 아무것도 부족함이 없게끔 만드는 자족적인 목적으로 바라보았기 때문에 사랑과 행복을 연결하는데 있어 난관에 봉착할 수 있다.

 

 행복한 사람이 친구를 필요로 하는지 그렇지 않은지에 관해서도 쟁론이 있다. 어떤 사람들은 지복의 경지에 있으며 자족적인 사람들에게는 친구가 필요하지 않다고 주장한다. 그들은 이미 좋음을 가지고 있으며 자족적인 만큼 그 어떤 것도 추가적으로 필요로 하지 않다. 그런데 친구는 원래자신과는 다른 타인으로서 본인 스스로는 할 수 없는 것을 공급하는 사람이니 말이다. (EN 99, 1169b3-22)

 

 플라톤은 그가 썼던 뤼시스(Lysis)을 보면, 아리스토텔레스가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자족적인 사람들에게는 친구가 필요하지 않다고 주장했던 사람이다. 훌륭한 자끼리는 그들이 비슷한 한에서는 서로에게 아무런 도움이나 해를 줄 수 없고 따라서 서로를 존중할 수 없다. 또 그들이 훌륭한 한에서는자족적이며, 그래서 서로를 전혀 필요로 하지 않으며, 따라서 서로를 존중할 수 없다. 훌륭한 사람들이 공유하는 비슷함과 훌륭함 둘 중 어느 측면에서도 훌륭한 자끼리는 서소를 존중하지 않을 것이고, 따라서 서로를 사랑하는 것이 못 되며, 따라서 친구도 될 수 없다.[각주:11]


 그러나 아리스토텔레스는 뤼시스편에서의 플라톤과 다른 주장을 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행복한 사람이 친구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는 얘기가 맞는 것은 주로 유익이나 즐거움을 이유로 하는 친구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는 점에서라고 말한다.[각주:12] 우연적인 의미에 따른 사랑은 행복의 자족성 요구로부터 배제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사랑의 필요성과 행복의 자족성 사이의 모순처럼 보이는 것을 풀기 위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그런데 사태를 보다 자연적으로 고찰하는 사람들에게 유덕한 사람은 유덕한 친구를 본성상(physei) 선택해야 하는 것으로 보인다. 본성상 좋은 것은 유덕한 사람에게 그 자체 좋으며 즐거운 것이라고 얘기되기 때문이다. 동물에게 있어서 삶은 지각의 능력으로 정의되며, 인간의 경우에는 지각 혹은 사유의 능력으로 정의된다. 그런데 능력은 '그것의 발현으로서의' 활동을 조회점으로 하며 일차적인 것은 활동에서 성립한다. 그래서 삶은 일차적인 의미에서 지각함 혹은 사유함인 것으로 보인다. 산다는 것은 그 자체 좋고 즐거운 것에 속한다. 왜냐하면 정의에 의해 규정되었기 때문이다. 정의에 의해 규정된 것은 좋음의 본성을 가진다. 그런데 본성상 좋은 것은 훌륭한 사람에게도 좋다. 이것이 바로 산다는 것이 모든 사람에게 즐거운 이유이다. [] 그런데 산다는 것 자체가 좋고 즐거운 것이며 모두가 그것을 추구하는 것으로 보인다면, 훌륭하며 신적으로 행복한 사람들도 그 누구보다도 삶을 추구할 것이다. 이들에게 삶은 무엇보다도 우선해서 선택해야 할 것이며 이들의 삶이 가장 신적인 행복으로 충만하기 때문이다.(EN 99, 1170a13-29)

 

 여기서 아리스토텔레스는 친구를 그 자체, 본성상 선택할 만한 것으로 이해하고 있다. 친구는 다른 것을 위한 수단으로, 나의 부족함을 채우기 위해 선택되는 것이 아니다. 유덕한 친구는 그 자체 선택할 만한 것이다. 우리가 우리의 삶을 그 자체 추구하듯이 훌륭한 친구들의 삶 또한 그 자체 추구한다. 좋은 친구들이 존재하지 않으면 행복의 자족성은 유지될 수 없기에 행복은 가장 완전한 사랑을 내재적 구성요소로 요구한다.


 그리고 인간은 폴리스적이며 함께 살게끔 되어 있는데[각주:13] 인간에게 있어서 함께 산다는 것은 동물처럼 같은 공간에 배정받았다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고유 기능인 생각과 말을 나누는 것이기 때문에 이 고유한 인간적인 사회성을 완성시키는 즐거움이 바로 사랑이다. 친구와 함께 지각할 내용은 서로가 존재함을 서로 알고 있는 일이며, 이것이 구체적으로는 함께 살면서 서로의 말과 생각을 나누는 것이라면, 자신의 존재가 무엇보다 선택할 만한 것이듯 친구의 존재 역시 선택할 만한 것이다. 따라서 행복하게 될 사람은 훌륭한 친구를 필요로 하게 될 것이다.[각주:14]


 그러므로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있어 인간은 본성상 폴리스적이며 이런 본성에 따른 탁월성을 이유로 하는 좋은 사람들 간의 사랑은 행복과 관련 될 수 있다. 이렇듯 그는 자신이 가지고 있는 탁월성과 행복에 관한 철학으로 사랑을 고찰하였다. 아리스토텔레스에 있어 사랑에 관한 철학은 그의 고유한 탁월성과 행복에 관한 철학체계와 분리해서 생각할 수 없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체계의 이해를 위해 잠시 아리스토텔레스와 다른 사유체계를 가졌던 순자를 언급해보도록 하자. 순자 역시 아리스토텔레스가 사회공동체는 같은 공간을 배정받았다는 의미를 넘어선다고 바라본 것과 유사하게 사회구성을 바라본다.

 

 사람이 생존하기 위해서는 무리를 짓지 않을 수 없고, 무리가 있으면서 나눔이 없으면 쟁탈이 일어나고, 쟁탈이 생겨나면 어지러워진다.[각주:15]

 

 그러므로 고대의 성왕이 이를 위하여 예의로 절제해서 분별했다.[각주:16]

 

 사람은 사회공동체를 이룰 수 있으나, 소나 말은 그것을 이룰 수 없다. 사람은 어떻게 무리를 이룰 수 있는가? 나누기 때문이다. 나누는 것을 어떻게 실천할 수 있는가? 그것은 의()에 의해서이다.[각주:17]

 

 여기서 의()에 의한 나눔은 예()라고 할 수 있다. 이것은 인간을 지성(nous)으로 동물과 구분하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체계와 마찬가지로 인간과 동물을 구분하는 기준이 된다. ()에 의해 각자 감정을 적절하게 절제해야 하는 이유는 사회구성에 그 원인이 있다. 이렇듯 인간은 사회를 구성하면서 일종의 윤리를 필요로 하게 된다.


 아리스토텔레스가 탁월성과 행복에 관한 철학을 논한 것이 윤리학과 관계가 있듯이 그에 있어 사랑 역시 윤리적인 문제가 아닐까? 그렇다면 탁월성에 따른 사랑을 인간의 사회적 본성과 관련지어 가장 완전한 사랑이라고 언급한 것 역시 탁월성에 기초한 사랑이 가장 윤리적인 사랑이라고 말하기 위한 것이라고 생각해 볼 수 있지 않을까? 나는 그동안 살펴보았던 아리스토텔레스의 사랑을 일종의 윤리적으로 요구되는 인간관계로 규정짓고자 한다. 그렇기 때문에 사랑(philia)은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는 것처럼 상대방을 그 자체로 전인격적으로 대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윤리적 삶을 완성하며 상대방 역시 훌륭해지기를 바라는 것이다. 이제 사랑은 윤리적으로 요구된다.

 

 

 

. 자본주의 경제의 물상화(reification)와 사랑(philia)

 

 오늘날 많은 이들은 원자력의 치명적인 폐해와 환경파괴의 엄청난 결과에 대해, 관료제와 자본주의의 비인간성 등등에 대해 도덕적인 비난을 한다. 그런 의미에서 일종의 윤리적 의미가 함축되어 있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사랑(philia)은 오늘날 사회에 더욱더 요구되어야 할 것으로 보인다. 더불어 현대 아리스토텔레스주의자들이 걱정하듯이, 사회공동체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은 개인들이 만연한 오늘날 사회에서 개인들을 윤리적 관계로 연결하는 데에 아리스토텔레스의 사랑(philia)은 충분히 그 의미를 지닌다.


 현대인들은 현실의 자질구레한 행복과 물질적 쾌락에 만족하며 어떠한 모험도 감행하지 않는 지극히 평범하고 소심한 개인들도 보여진다.[각주:18] 텔레비전과 인터넷, 게임 중독으로 대표되는 오늘날 청소년층의 불안은 사회가 숱한 깨진 유리조각처럼 숱한 개인들로 원자화, 파편화되어있는 것으로부터 발생한다. 이렇게 원자주의가 만연해있는 사회에 아리스토텔레스에 있어 폴리스적 본성이 갖는 의미와 그에 따라 탁월성에 기초한 인간관계인 사랑을 강조하는 것은 매우 뜻 깊은 일이 될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한 발 더 앞서 나가 왜 개인들은 파편화되었으며, 왜 사랑이 실현되지 않고 있는 사회에 살고 있는지 되물을 수 있다. 나는 이러한 물음들을 자본주의 경제의 물상화(reification)와 관련지어 대답해보려고 한다. 그리고 이러한 분석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사랑이 갖는 중요성을 다시금 강조하게 되는 계기가 될 것으로 보인다.


 먼저 물상화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살펴보도록 하자. 물상화는 사람과 사람의 사회적 관계가 물건과 물건의 사회적 관계로 나타나는 것을 뜻한다. 자본주의 경제에 살고 있는 우리들의 사회적 관계는 직접적인 관계가 아니라 상품이라는 사물들의 교환관계로 나타난다. 예컨대 선풍기 생산자와 농부의 관계는 직접적인 관계로 드러나지 않고 선풍기와 농부가 생산하는 쌀의 관계로 등장할 뿐이다. 선풍기 생산자는 밥을 먹으면서 농부가 무더운 더위 속에서 고생하고 있다는 생각을 하지 않는다. 농부 역시 선풍기 생산자가 끼니를 거르지는 않을까 걱정하지 않는 것은 분명하다.


 이러한 사회적 관계는 아리스토텔레스가 살고 있던 폴리스에서 이루어질 수 있는 탁월성에 따른 관계(philia)와는 분명한 차이가 있다. 선풍기 생산자와 농부가 서로 호의를 가지고 있고, 상대방이 훌륭해지기를 바라지 않는 것은 매우 당연해 보인다. 이러한 사회적 관계는 유익을 이유로 하는 관계로 볼 수도 있는데, 그들은 상대방이 얼마나 좋고 훌륭한지에 상관없이 그 사람이 생산한 상품에 대해서만, 즉 외적인 피조물에 의해서만 관계를 맺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문제는 자본주의 경제가 확대될수록 이러한 물상화가 더욱더 심화된다는 점에 있다. 예컨대 교육이 본격적으로 상품화되면서 선생과 학생의 관계는 교육이라는 상품을 두고 생산과 소비하는 사람이 된다. 그들은 선생이 생산하는 교육이라는 상품과 학생이 지불하는 화폐의 관계로 나타날 뿐이다. 이것은 아리스토텔레스가 살던 당시에 스승과 제자 사이에 사랑(philia)이 성립하던 아카데미의 모습과 큰 대조를 이룬다.


 이렇게 인간관계에 있어 물상화가 더욱더 지배적인 힘을 얻게 될 때마다 인간관계에 있어 탁월성을 바탕으로 한 사랑(philia)의 관계는 더욱더 성립하기 어려워지며, 윤리적인 의미에 있어서도 매우 큰 위기를 갖게 된다. 오늘날 자본주의 사회에서 사람 사이에 경제적 관계가 아닌 관계를 만드는 시기는 보통 회사에 들어가기 이전인 학생시절이다. 그러나 교육이 상품화되면서 학교는 단순히 상품을 소비하는 장소로 전락해버렸고, 학생시절마저 친구를 만들기 힘들게 되었다. 교육의 목적은 우리의 노동력이라는 상품을 더욱더 비싸게 만드는데 있기 때문에, 학생들은 친구들과 어울리기 보다는 공부에 열중하며 다른 학생들과 경쟁해야 한다. 우리나라는 특히 학생들이 주로 학원에서 시간을 보내고 있기 때문에 함께 생활하지 못하면서 사랑(philia)의 관계를 맺기 더욱더 힘들다.


 이렇게 사람과 사람의 사회적 관계가 상품들간의 사회적 관계로 나타나는 물상화가 이루어지는 자본주의 경제에서는 인간이 탁월성을 기초로 하는 사랑(philia)의 관계를 맺고 유지하기 매우 힘들다. 인간의 윤리와 관계되어 있는 사랑(philia)이 실현되기 어렵다는 것은, 다시 말해 사람들 사이에 윤리가 실현되기 어렵다는 것과 우리가 윤리적인 삶을 살기 어렵다는 것을 뜻한다. 따라서 우리가 아리스토텔레스의 사랑(philia)의 개념을 분석하고 단순히 그것을 주장하는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자본주의 경제에 존재하는 물상화를 비판하고 자본주의 경제의 문제점들을 짚고 넘어가야 한다. 오늘날 사회에서 여러 윤리적인 문제들이 대두되고 있는 것들은 이런 것들과 기초하여 살펴봐야 하며, 우리가 윤리적인 삶을 생활하고자 한다면 자본주의 경제가 갖고 있는 병폐-예컨대 물상화의 원인이 되고 있는 상품-들을 해결하고자 노력해야 할 것이다.

 

 

 

. 맺음말

 

 지금까지 아리스토텔레스의 사랑(philia)과 자본주의 경제의 물상화(reification) 개념들을 살펴보았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사랑(philia)을 일종의 탁월성으로 바라보면서 유익과 즐거움과 같이 우연적인 것에서 오지 않는 지속적인 사랑을 가장 완전한 사랑으로 바라보았다. 사랑은 인간의 폴리스적인 본성에 의해 요구되는데 이는 사랑을 탁월성에 기초하여 바라본 것과 관련된다. 따라서 아리스토텔레스의 사랑은 윤리적 의미를 지닌다는 것이 이 글의 전반부에 해당된다.


 후반부에서는 자본주의 경제에 물상화를 다루었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가 상품, 사물들의 관계로 나타나면서 아리스토텔레스의 사랑(philia)이 실현되기 힘든 측면들을 설명하였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사랑(philia)은 앞서 본 것과 같이 윤리적인 의미를 지고 있기 때문에 이것이 실현되기 힘들다는 것은 자본주의 경제에서 비윤리적인 일들이 크게 문제시되는 것을 설명하는데 도움이 된다.


 많은 이들이 오늘날 사회의 비윤리성을 지적하면서 아리스토텔레스를 언급하곤 한다. 그러나 정작 왜 오늘날 사회에서 윤리적인 문제가 대두되고 있는지 사회구조에 대한 분석에 소홀히 해왔다. 나는 이런 점들을 극복하고자 아리스토텔레스에 있어 사랑(philia)이 어떤 의미인지 살펴보고 자본주의 경제에서 사랑(philia)이 왜 실현되기 힘든지 분석하였다. 이는 오늘날 자본주의 경제에 살고 있는 우리에게 윤리가 문제시되고 있는 문제를 구조적으로 살핀 것이다. 처음 작업해보는 일이어서 그런지 글이 매우 피상적으로 느껴지고 논지도 많은 부분에서 허술함이 보인다. 다만, 이 글이 오늘날 사회의 윤리 문제에 대해 어느정도 문제제기가 되길 바라며 이 글을 마친다.

 

 

 

참고문헌

 

Aristoteles, Aristotelis Ethica Nicomachea (이창우김재홍강상진 옮김, 니코마코스 윤리학, 이제이북스, 2006)

Charles Taylor, The Malaise of Modernity (송영배 옮김, 불안한 현대 사회, 이학사, 2001)

Karl Marx, Capital (김수행 옮김, 자본론, 비봉출판사, 2006)

Platon, Lysis (강철웅 옮김, 뤼시스, 이제이북스, 2007)

김재홍 외, 아리스토텔레스 니코마코스 윤리학,철학사상별책 제3권 제9, 서울대학교 철학사상연구소, 2004

심상태, 인간 : 신학적 인간학 입문, 서광사, 1989

리쩌허우(李澤厚), 정병석 옮김, 중국고대사상사론, 한길사, 2005

  1. 심상태, 『인간 : 신학적 인간학 입문』, 서광사, 1989, p.221 [본문으로]
  2. 일상적 삶에서 찾아지는 나머지 즐거운 일들에 관련해서, 마땅한 방식으로 즐거운 사람은 사랑이 있는 사람이요, 그 중용은 사랑(philia)이다. 이에 반하여 이런 면에서 지나친 사람은, 만일 아무 목적이 없으면 비굴한 사람이고, 만일 자기 자신의 이익을 추구하고 있으면 아첨꾼이다. 그리고 이 방면에서 모자라서 어떤 상황에서나 불쾌한 사람은 일종의 싸움꾼이요, 심보가 고약한 사람(dyskolos)이다. (EN 2권 1108a26-30) [본문으로]
  3. 탁월성에 관한 논의에서 어떤 사람들은 품성 상태(hexis)에 따라, 또 어떤 사람들은 활동(energeia)에 따라 좋은 사람이라고 이야기되듯, 사랑(philia)의 경우에 있어서도 그러하다. 함께 살면서 서로에게 기쁨을 주며 좋음을 제공하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또 자고 있는 사람들이나 혹은 장소상 서로 떨어져 있는 사람들은 사랑의 활동을 하는 것은 아니지만 친구처럼 활동할 수 있을 그런 품성 상태를 가지는 것이다. (EN 8권 5장 1157b5-10) [본문으로]
  4. 따라서 탁월성의 경우에서도 이와 마찬가지이다. 왜냐하면 다른 사람들과의 거래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행함으로써 우리는 올바른 사람이 되고 또 어떤 사람은 올바르지 못한 사람이 된다. 무서운 상황 안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행함으로써 또 두려워하거나 혹은 배짱 있는 마음을 지니거나 하는 습관을 얻게 됨으로써, 어떤 사람은 용감하게 되고 또 다른 어떤 사람은 비겁한 사람이 되기 때문이다. 욕구나 노여움에 관한 것들의 경우에서도 이와 마찬가지이다. 왜냐하면 그들 자신이 처한 이러한 상황 속에서 이렇게 행동하는가 또는 저렇게 행동하는가에 따라서, 어떤 사람은 절제 있는 사람이 되고 또 온화한 사람이 되기도 하고, 또 다른 어떤 사람은 방종한 사람이 되기도 하고 화를 잘 내는 사람이 되기도 한다. 어떤 사람들은 동일한 상황 속에서 이렇게 행함으로써 다른 사람들은 저렇게 행함으로써 그런 저런 사람이 되는 것이니 한 마디로 말하자면, 품성 상태들은 상응하는 활동(energeia)들에서 생긴다. (EN 2권 1103b14-22) [본문으로]
  5. 따라서 이러한 것들[유익 혹은 쾌락을 이유로 성립하는 사랑]은 우연적인 의미에 따른 사랑이다. 사랑받는 사람이 그 자체인 한에서 사랑을 받는 것이 아니라 어떤 좋음이나 즐거움을 주는 한에서 사랑받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랑은 [사랑을 주고 받는 친구들이] 계속 이전 같지는 않을 때 쉽게 해체된다. 더 이상 즐거움이나 유익을 주지 못하게 될 경우 그들의 사랑 역시 멈추게 된다. 유익한 것은 지속하지 못하고 경우에 따라 다른 것이 유익해지는 것이다. 따라서 그들이 서로 친구였던 그 이유가 사라지고 나면 사랑 역시 해체된다. (EN 8권 3장, 1156a16-24) [본문으로]
  6. 각자는 또 단적으로도 좋은 사람이고 친구에 대해서도 좋은 사람이다. 좋은 사람들은 단적으로도 좋으며 서로에 대해서도 도움을 주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좋은 사람들은 즐거움을 주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단적으로도 즐거우며 서로에게도 즐거움을 주기 때문이다. 좋은 사람들 각각에게 자신의 행위들 또 그와 같은 종류의 행위들은 즐거운 것이며, 좋은 사람들의 행위들은 [이런 점에서] 같거나 유사하다. (EN 8권 3장, 1156b7-17) [본문으로]
  7. EN 9권 1166b9-10 [본문으로]
  8. EN 9권 1169a17-18 [본문으로]
  9. 애호(philesis)는 감정(pathos)이지만 사랑은 품성상태(hexis)인 것처럼 보인다. 애호는 [생물] 못지않게 무생물에 대해서도 성립하지만, 사람들이 호응하는 사랑을 하는 것은 합리적인 선택(prohairesis)과 함께하는 것인데, 합리적 선택은 품성상태로부터 나오기 때문이다. 더 나아가 사랑받는 사람들 자체를 위해서 그들이 잘 되기를 바라는 것은 감정에 따른 것이 아니라 품성상태에 따른 것이다.(EN 8권 1157b28-32) [본문으로]
  10. 가장 완전한 사랑은 좋은 사람들, 또 탁월성에 있어서 유사한 사람들 사이에서 성립하는 사랑이다. (EN 8권 3장, 1156b6-7 [본문으로]
  11. Lysis 214e-215e [본문으로]
  12. ‘그들이 주장하는 바는’ 대중들이 유익한 사람을 친구로 간주한다는 것인가? 다시 없이 행복한 사람(makarios)은 좋음을 가지고 있으니, 그러한 유익한 사람들은 전혀 필요로 하지 않을 것이다. 즐거움을 이유로 찾는 친구들도 전혀 필요하지 않거나 약간만 필요할 터인데 그의 삶은 즐겁고 그 어떤 외적인 즐거움도 필요로 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한 친구들을 필요로 하지 않으니 친구들을 필요로 하지 않아 보인다. (EN 9권 1169b22-28) [본문으로]
  13. EN 9권 9장, 1169b19-20 [본문으로]
  14. 삶은 본성상 좋은 것이고, 좋음을 지각하는 일은 그 자체 즐거운 것이니까. '그렇다면' 산다는 것은 선택되어야 할 것, 특히 누구보다도 좋은 사람들에 의해 선택되어야 할 것이다. 그들에게는 존재가 좋고 즐거우니까. 그들은 그 자체 좋은 것에 대한 지각을 공유하면서, '즉 서로의 존재를 지각하면서' 즐거워한다. 마치 유덕한 사람은 자기 자신에 대해 하듯이 그렇게 또 친구에 대해― 친구는 또 다른 자기 자신이니까― 그러하듯이 말이다. 따라서 각자에게 있어서 자신의 존재가 선택되어야 할 것이듯이 그렇게 친구의 존재도 선택되어야 한다. 혹은 거의 그렇게 선택되어야 한다. 존재는 자신이 좋은 사람임을 지각하기에 선택할 만한 것이었다. 그런데 그러한 지각은 그 자체 즐거운 것이다. 따라서 친구가 존재함을 함께 지각하는 일, '즉 서로가 존재함을 서로 알고 있는 일이' 필요한데 이것은 함께 삶과 서로 말과 생각을 나누는 일에서 성립한다. 인간에게 있어서 함께 산다는 것은 가축의 경우처럼 같은 공간에 배정받았다는 것이 아니라 이러한 것을, '즉 서로 말과 생각을 나누는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이니 말이다. 과연 신적으로 행복한 사람에게도 존재는 본성상 좋고 즐거운 것이라 그 자체 선택해야 할 것이며, 그 다음으로 친구의 존재가 선택해야 할 것이라면, 친구 또한 선택되어야 할 것 중의 하나일 것이다. 신적으로 행복한 사람에게 선택되어야 할 가치는 마땅히 그에게 귀속되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바로 이점에서 부족하게 될 것이다. 따라서 행복하게 될 사람은 유덕한 친구를 필요로 하게 될 것이다. (EN 9권 9장, 1170b1-19) [본문으로]
  15. 『순자』「부국」 [본문으로]
  16. 같은 책, 「영욕」 [본문으로]
  17. 같은 책, 「왕제」 [본문으로]
  18. 안네 마리 파이퍼 지음, 정영도 옮김, 『니체의 ‘짜라투스트라’에 대한 철학적 해석』, [5.종말인 : 삶의 형식으로서의 향락], 이문출판사, 1994, pp.90~95 참조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