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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유의 즐거움

근대 국제정치질서와 한국의 만남

2008년 세계외교사를 수강하며 작성한 발제문을 정리한 것입니다.



변환의 세계정치, 1장 근대 국제정치질서와 한국의 만남


 

 

문명권의 정신구조

국가나 사회는 대외 문제에 대하여 무의식적인 충동으로 반응한다. 그런 반응은 그 국가나 사회가 지니고 있는 정신 구조의 발로이며 오랜 역사로부터 나오는 지적 유산이다. 나는 외교사 서술의 분석 단위를 국가로 하되 그 단위의 정신 구조를 형성한 문명권의 존재를 강조하는 입장을 견지한다.[각주:1]

 

인간의 역사는 사랑과 증오에 관한 서술이라는 김용구의 견해를 인용하면, 1장의 내용은 서구권 안에서만 지켜지는 근대서구국제질서와 대비되는 제국질서가 서양과 동양의 충돌로 이루어졌으며 서로가 자신을 보편이자 문명표준으로 인식함과 동시에 상대방을 야만으로 규정하는 그들의 증오가 폭력적 충돌로 이어졌고, 한국은 이 와중에서 타자를 두려워하고 미워하면서 한편으로는 타자의 힘을 동경하는 정신적 공황상태를 맛보았고 이것은 아직도 상호간의 신뢰회복과 소통을 어렵게 하고 있기 때문에 우리가 풀어가야만 할 현재진행형 과제라는 것으로 요약될 수 있겠다.

 

근대 서구국제질서

근대 이전 제국질서 : 제국의 중심을 지배하는 정치세력은 문명의 중심으로서 주변의 정치세력들을 위계적으로 복속시킴. 제국 내에서 복수의 평등한 정치적 권위는 인정되지 않음

근대세계질서 : 대내적으로 절대적이고 대외적으로 평등한 주권을 지닌 국가들에 의해 형성

15세기에서 19세기에 서구의 중세에서 근대로의 점진적 이행의 단계 : 주권국가간 국제질서와 제국주의가 동시에 진행된 서구국가체제의 이원구조

서구는 비서구세계와의 관계 속에서 점진적이고 지속적인 자기변환을 통해 서구의 기적을이룰 수 있었다

 

근대 국제정치질서의 성격과 팽창

근대국가의 발전 : 서구의 중세질서 근대 국가경쟁적 공존 국제질서

중세질서의 이원성 - 보편적 정당체계 : 단일한 기독교 공동체의 보편적 이념

- 분절적 지배구조 : 중세의 영토지배, 분절적·중층적 정치적 권위

대내적 주권 : 영토에 대한 배타적이고 절대적인 지배의 권위

대외적 주권 : 복수의 (대내적) 주권의 독립성과 평등

근대국가의 발전은 ¹영토군주의 지배를 정당화하는 동시에 ²그 자의적 지배를 제한.

¹ 영토군주 세력의 부상과 교권 하락 : 교황청의 아비뇽유수(1305~1378), 교회의 대 분열(1378~1417), 16세기 종교개혁, 프랑스 가톨릭과 개신교 내란(1562~1598)

² 민주주의 발전 : 영국 명예혁명(1688), 프랑스 대혁명(1789), 1848년의 혁명

서구근대국가의 발전이 지니는 근대성: 제국질서를 대체하는 주권개념, 신분에서 해방된 보편적 인간의 정치적 기획으로서 민주주의, 산업혁명을 통해 생산력의 자연적 한계를 극복하고 부의 생산과 분배에서 정치적 제한의 철폐를 요구하는 자본주의

세력 균형 : 서구의 정치적 분립은 강대국들의 세력균형에 의해 유지

- 절대왕정시대 : 단일 왕가에 의한 강대국들의 통합 가능성이 정치적 분립 위협

- 빈회의 이후 제1차 세계대전까지: ‘정당한 세력균형의 현실적 기반은 영국의 패권, 유럽에 국한된 것이었으며 서구국가체제의 이원구조, 서구 안의 국제질서와 밖의 제국주의가 영국의 힘에 의해 분절

서구제국주의 : 1815년의 빈회의가 서구 안에서 주권국가들의 협력을 제도화했다면, 베를린회의는 서구 밖에서 주권을 명분으로 주권을 박탈하는 서구제국주의의 집단적 위선을 제도화

 

전통적 중화질서

타인과의 관계에서 질서를 도모하려는 유교적 사유체계에 기반. 따라서 천하질서에서 국가라고 하는 것은 현실적으로는 주요한 행위자로서 용인되면서도 이념적으로는 근대국제질서의 행위주체인 주권국가처럼 강고한 배타적 실재로서 인식 될 수 없었음

중화질서 내부에는 주변부의 인식과 현실 간에 불가피하게 괴리가 발생할 소지가 항시적으로 존재하였으나 장기적으로는 예적(禮的)인 질서이념 하에 끊임없이 해소될 수 있었음

 

문명표준의 역전

이질적인 문명이란 하나의 문명표준에 의거해서 보면 대개 야만으로 간주되는 경향이 있음

서구 근대국제질서 원리에서 국제사회의 일원, 즉 국제법적으로는 국제법적 주체가 될 수 있는 요건으로서 문명이라는 자격요건이 요구 ; 동아시아국가들이 구미국가와 맺은 조약이 하나같이 일방적인 불평등조약이었던 것은 기본적으로 이러한 문명적 요소의 미비라는 명분에 의한 것

서구의 국제질서와 전통적 중화질서의 만남은 동아시아 지역에서 문명표준의 역전 현상을 가져왔음

중국 : 서구국제사회의 문명 표준을 적극적으로 수용하기 어려운 근본적 어려움을 갖고 있음. 지금까지 중화문명권에서 문명표준을 제공하던 입장에서 유럽문명권의 문명표준에 의해 스스로를 재편해야하는 입장으로 전락하는 것을 뜻하기 때문

일본 : 문명의 양면성에 대한 인식을 확고히 하게 되고 문명을 오로지 힘과의 관련성에서 이해하게 되었음. ‘개화의 등급으로 표현된 문명 대 야만의 세계관이 자리 잡고 있었으며 서구의 문명표준에 눈뜨지 못한 아시아의 일원이라는 일본인들의 열등의식은 개화에 무관심한 조선이나 중국에 대한 멸시와 혐오의 감정으로 나타나게 됨

 

한국의 동요

중국과 일본은 이미 구미열강의 세계균형 속에 편재

중국 : 조공국의 자율성을 인정하는 전통적 사대질서를 부정, 조선에 대한 종주권 기획(임오군란과 갑신정변을 계기로 조선에 대한 직접 지배 강화, ·청상민수륙무역장정)

일본 : 메이지 유신 이후 서구적 근대화. 전통적 교린질서, 더 나아가 중화질서 전반의 전복 기획(강화도 조약을 통해 일본이 조선에서 중국의 종주권을 부정)

청일전쟁(1894)으로 이어지는 조선을 둘러싼 중·일의 대립은 러시아의 남하를 견제하기 위한 영국의 거문도점령(1885~87)이 상징하듯, 세계적 차원의 세력균형의 틀에서 이루어졌음

지역적·세계적 차원에서, 그리고 힘과 명분의 측면 모두에서 제국주의의 중층적인 압박은 조선의 독자적인 체제 변환의 가능성을 부정

 

세계대전

유럽문명권은 유럽 내에서는 주권국가간 관계, 국제의 모습을 띠고 있었지만, 지구의 대부분에 해당하는 비서구지역에서는 제국의 모습을 추구하고 있었음. 이처럼 제국주의의 활극장이 되어버린 세계는 바야흐로 인류사의 가장 비극적인 시기를 맞이하게 됨

제국주의, 민족주의, 유럽 세력균형의 와해가 주요 요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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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에서의 ‘100년간의 평화[각주:2]와 이와 대비되는 제국주의는 어떻게 공존할 수 있었는가가 이번 발제에 핵심이다. 대외적 주권이라는 복수의 (대내적) 주권의 독립성과 평등을 인정하는 경쟁적 공존 국제질서에서 어떻게 서구의 강대국들은 다른 문명권에 대해서는 폭력적인 행동을 취했는가. 저자는 이에 대해 서로 다른 문명권의 정신적 구조에 따라 서로를 야만으로 규정하고, 서구는 다른 문명권의 국가들을 국제사회의 일원으로 승인하지 않기 때문에 발발한 것으로 바라보고 있다. 이런 이원성은 근대국제질서 이전의 제국질서가 동시에 진행되고 있음을 보여준다고 설명하기도 한다.

 

발제자 본인은 이러한 이원성이 인식차원의 문제뿐만 아니라 그 당시 사회의 역사적 조건에 전체에 기반하고 있다는 입장을 취한다. 요컨데, 왜 유럽 국가들 사이에서는 오랜 평화(혹은 백년평화)가 이루어지며, 밖에서는 제국주의의 팽창이 이루어졌는가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질적인 문명표준에 대한 증오뿐만 아니라 경제적 이윤에 동기가 있음 이해할 필요가 있음을 주장한다.

 

중세 봉건제

계급 : 영주-농노, 물리력에 의한 경제외적 강제[각주:3]에 기반

분절적 정치 구조 : 물리적 강제력, 즉 군사력 소유양식의 분산성[각주:4]

상품·화폐관계 및 농촌과 연결된 도시경제를 발전시키고 농민적 저항이 지배층의 양 보를 받아내는데 유리하게 작용함으로써 봉건제의 해체와 자본주의의 발전을 크게 촉진

국제 질서 : 새로운 영토 정복 전쟁의 각축[각주:5]

근대 자본주의

계급 : 자본가-임노동자, 자유로운 계약[각주:6]과 생산수단의 사적 소유에 기반

근대 국가 : 일정한 영역 안에서 정당성에 의해 뒷받침되는 물리x    적 강제력을 효과적으로 독점한 제도적 지배기구[각주:7]

군사자원 및 군사기술의 혁명적 변화 : 기사군 중심의 군사양식의 퇴조와 보병군 중심의 군사양식 등장, 장창과 원시형태의 소총 및 대포가 기본무기로 사용[각주:8]

민주주의 : 자유로운 계약을 위한 신분적 해방(농노임노동자), 군사자원 확보를 위한 국가의 노력과 시민사회의 저항[각주:9]

민족주의 : 신분철폐를 부르짖으며 민주주의를 추구하는 프랑스대혁명이 동시에 신분으로 나뉘어져 있던 프랑스 민족을 하나로 묶는 민족주의임을 상기, 하층민들도 프랑스의 시민으로서 나폴레옹 전쟁에서 모든 국민은 군대에 동원

무역의 자유주의와 보호주의 : 세계체제는 ¹자본주의의 호황 등을 바탕으로 자본주의 발전을 선도하는 나라의 세계적 헤게모니 하에서 자유무역주의적 질서가 민족국가들의 상호번영을 가능케 한 안정적 발전국면과 경제위기의 도래 등으로 각국이 보호무역주의 정책을 채택하고 국가간의 갈등이 전쟁 발발과 가은 사태를 불러일으키며, 각국의 지배층에 대한 피지배대중의 저항이 격화되는 대혼란 국면을 거치면서 발전[각주:10]

세력균형 : 각국의 부르주아지들은 이해관계상 전쟁보다는 산업, 무역 및 식민지 확장 쪽으로 19세기 국가의 정책을 방향전환[각주:11]

 

중화 질서

중화질서는 조공과 책봉에 기초한 봉건제 질서. 중화질서의 위협은 그들의 정신 구조를 형성한 문명권의 위협이자 경제정치체제 자체에 대한 위협. 봉건영주(혹은 지주)들의 반발은 당연

 

지난 4~5세기 동안 대규모의 전쟁과 그 전쟁을 마무리하는 국제적 협약들이 유럽식 근대국가 체제(국제정치적 의미와 국내체제 양면 모두에 걸쳐)의 모습을 결정짓는 결정적 계기였음은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사실이다. 이러한 점에서 국가들이 전쟁을 만들어 냈지만 동시에 바로 그 전쟁이 오늘날과 같은 모습의 국가들을 만들어 냈다고 하는 틸리(Tilly)의 말은 단순히 인상주의적 표현 이상의 말로 이해하여야 할 것이다. 태생부터 전쟁 지향적인 근대 국가는 비록 비스크마르크나 카부르가 상당한 진실성을 보여주었으나, 주권적 실체로서의 모든 국가의 평등성이라는 추상적이고 본질상 허구적 개념에 의해 오랜 평화가 이뤄진 것이 아니고, 자본주의 체제에서의 경제적 이윤에 의한 자유주의가 그 기반이다. 다국체제에서 국민국가와 자본의 입장은 서로 상반되며, 이는 현 자본의 세계화와 대비되는 국민경제의 피폐성에서도 극명히 드러나는 문제이다.

 

 

국민국가(민족주의)와 자유주의에 대립에 기반한 연표

1776 아담 스미스, 국부론출판

1789 프랑스 대혁명 [나폴레옹 전쟁으로 인해 영국-대륙간의 무역 자유롭게 진행X]

1819 리카도, 정치경제론에서 비교우위론개념 등장 - 무역의 자유주의 주장

1839 콥든 반곡물법리그형성

1848 프랑스에서의 제2공화정 형성

1849 항해법 폐지

1853-54 영국, 프랑스, 터키, 러시아 크리미아 전쟁

1859 다윈, 종의 기원출판. 사회진화론에 근거한 민족주의 형성 기반

1860 콥든-슈발리에 무역조약. 최혜국대우 조항

민족주의, 식민지 경쟁의 시작

1871 독일 통일. 프랑스와의 전쟁에서 승리- 50억 프랑의 보상금과 알사스-로렌 지방을 할양받음, 그러나 과거의 영지를 떼어주는 개념이 아니라 민족을 분단, 전쟁 승리의 원인을 게르만족의 활력과 라틴족의 탈진으로 설명(사회진화론에 근거한 민족주의)

1873 뉴욕과 비엔나 증권시장 붕괴 보호무역 정책 증가, 영국은 계속 개방 일관

비스마르크 프랑스 고립, 독일-오스트리아-러시아 삼제동맹

1877-78 러시아 터기와의 전쟁 승리. 산스테파노 조약(78). 그러나 비엔나 회의를 통해 러 시아 발칸반도 진출 좌절

1879 비스마르크 무역 보호주의. 독일-오스트리아 이국동맹

1881 프랑스 관세체제

1894 프랑스-러시아 동맹 체결 (비스마르크가 주도한 러시아, 프랑스 분리 노력이 실패)

1892 메린느 관세제도

1895 막스 베버, 독일 제국주의 필요성 주장

1898 - 프 아프리카에서 충돌, 파쇼다 사건

- 스페인 미서 전쟁

1903 세르비아 군사쿠테타, 1878년 이래 친오스트리아왕조 붕괴

1900-14 자유주의 질서 절정기

  1. 김용구, 『외교사란 무엇인가』, 도서출판 원, 2002. [본문으로]
  2. K, Polanyi, The Origins of Our Time : The Great Transformation (Lodon, 1945), ch1. [본문으로]
  3. 토지 소유권, 인간의 인격적 소유 및 재판 행정권 E.A Kosminsky, Studies in the Agrarian History of England in the Thirteenth Century. [본문으로]
  4. 중앙정부가 아닌 지방세력에 의해 당시 필요로 하던 군사자원(병력과 이의 유지에 필요한 물적자원)의 대부분이 제공되던 중기마병 중심의 봉건제적 군사양식에서는 군사계층을 중심으로 하는 정치적 분권화의 경향이 불가피하게 된다. 다음의 문장은 초기의 서양 역사를 잘 표현해주고 있다. “사회전체는 끊임없는 사적 전쟁상태에 놓여있었다.” C.W. Previté-Orton, The Shorter Cambridge Medieval History, Vol.1: The Later Roman Empire to the Twelfth Century(Cambridge :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52), p128. [본문으로]
  5. 봉건제적 분산적 정치질서는 무력수단의 소우가 곧 생산수단 소유의 기반이 되고 또한 무력이 잉여생산 수취의 직접적 수단이 되었다는 점에서 독특한 역사사회학적 성격이 드러난다. 중세후기인 15세기까지 유럽사회에서 농업생산성과 무역량은 비록 정체되었던 것은 아니지만 그 성장속도는 새로운 영토정복에 의해 얻어지는 수확에 비교할 때 여전히 대단히 느렸다. 앤더슨(Perry Anderson)의 말을 빌려 “당시 봉건제하에서의 지배계급에게 주어진 여러 가지 수단 중에서 아마도 가장 합리적이고 신속한 단일의 잉여수취의 확대양식이었다.” Perry Anderson, Lineages of the Absolutist State(London : New Left Books, 1974), p.31. [본문으로]
  6. 자본가-임노동자는 봉건제와 같은 인격적 예속에 따른 관계가 아니라 자유로운 계약에 의한 관계이다. [본문으로]
  7. Max Weber, Wirtschaft und Gesellschaft [본문으로]
  8. 이를 바탕으로 개인적 전사인 기사가 아닌 조직으로서의 보병군이 중심적 군사양식이 된 당시 상황에서 군사적 승패는 기본적으로 병력규모와 대규모 병력을 유지할 수 있는 경제력에 의존하였다. [본문으로]
  9. 새롭게 등장한 체제는 증가된 부담의 균등한 배분, 그 부담에 상응하는 정치참여의 권리부여와 부담에 대한 동의형성을 위한 정치적 제도 마련 보장하는 것이었다. 형평원칙에 입각한 부담의 배분은 지배층의 특권폐지를 바탕으로 하는 부담의 국민화로, 그리고 이에 상응하는 정치적 참여의 국민화를 낳았다. [본문으로]
  10. 안정적 발전국면의 세계체제는 그간 ¹네덜란드가 스페인이 주도한 중세적 세계체제를 해체시키는 데에 앞장서고 자유무역주의적 세계체제를 최초로 성립시킨 웨스트팔렌 조약 체결을 주도함으로써 수립된, 근대적 세계체제 초기의 ‘네덜란드 헤게모니체제’에서 출발하여 ²대 나폴레옹 전쟁에서의 승리를 주도하고, 명실상부한 ‘세계의 공장’이 된 영국이 자유무역주의적 세계질서를 회복시킴으로써 수립된 ‘영국 헤게모니체제’를 거쳐 ³제2차 세계대전 이후에 수립된 ‘미국헤게모니체제’로 발전해왔다. 서울대학교 정치학과 교수 공저, 『정치학의 이해』박영사, 2004. [본문으로]
  11. 그럼에도 19세기를 지나면서 나타난 수많은 영토분쟁, 외교적 사건, 식민지에서의 충돌, 지역적 또는 기타의 제한된 무력 분쟁들은 다국체제의 구조 안에 내재하는 긴장을 잘 말해주는 증거가 된다. G. Poggi, 박상섭 옮김, 『근대국가의 발전』, 믿음사, 1995.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