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년 국어와 작문 수업을 수강하며 작성한 글을 수정한 것입니다.
개인과 사회
독후감 : 『페스트』 알베르 카뮈,『감자』 김동인,『삼국지연의』 나관중
‘인간은 정치적 동물이다.’ 굳이 아리스토텔레스나 순자 같은 고인들을 끌어오지 않더라도 사회와 개인은 명확하게 분리될 수 있는 것이 아님을 누구나 다 안다. 그런데 이 둘, 개인과 사회는 서로 갈등한다. 아직도 끝나지 않은 이 갈등 속에서 나는 길을 잃은 아이처럼 방황한다. 난 주체가 되지 못한 채, 동쪽으로 물꼬를 트면 동쪽으로 흐르고 서쪽으로 트면 서쪽으로 돌고 도는 물처럼 어떤 책을 읽느냐에 따라 거기에 흡수되었다. 그럼에도 한 가지 분명히 옳다고 느끼는 바가 있다면, 그것은 개인은 사회 속에서 주체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내 인식이 세 편의 소설을 보면서도 작용되었다. 난 어쩌면 작디 작은 빨간 안경을 쓰고 세상이 온통 빨갛게 보인다고 하는 것일 수 있다. 그래도 사실 텍스트는 순수하지 않은 해석이라는데, 이 정도의 색안경을 쓰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
□ 『삼국지연의』 나관중
“자신이 충성을 서약했던 대상이 옳다고 믿는 바를 위해 기꺼이 피를 뿌리고 죽어간 수많은 충신절사들은 삼국지의 갈피 갈피를 수놓는 꽃이다.” 어렸을 보았더라면 가슴 찡했을 법한 말이지만, 지금 이문열의 말을 듣자니 절로 소름이 오싹 끼친다. 그렇다면 아우슈비츠 수용소의 지배인 루돌프 회스도 한 송이의 아름다운 꽃이란 말인가. 그리고 이들의 파쇼를 가슴 속에서 느끼며 고이고이 책장을 3번은 넘겨야 다른 사람과 이야기 할 수 있는 자격을 얻을 수 있는 이 아름다운 신세계!
이 우아한 도서가 아이들에게 너무나 많이 보급되어 있는 위험한 책이라는 것을 깨달은 것은 최근이다. 내가 어렸을 땐, 장비와 관우가 무엇을 위해 무기를 들어야하는 가는 중요하지 않았다. 유비에 대한 충성, 이 맹목적인 충성이 남자들에게는 호방하게 느껴지기만 하다. 그럼에도 우리는 이제 색안경을 쓰고 이 영웅서사기를 다시 보아야 한다. 그들의 맹목적인 충성에 죽어간 수많은 이들. 서로가 자신의 사회를 옳다고 믿는 이들. 이 멋진 사회를 위해 자기 한 목숨이야 쉽게 내버릴 수 있는 멋진 신사들. 이들을 보아야 한다. 그리고 난 그들을 보았다. 그래서 난 더 이상 삼국지연의를 보고 가슴 찡한 감동과 애국으로의 다짐 따윈 느끼지 않았다. 소름 끼쳤다. 그동안 나도 모르게 지배당하고 있던 아비투스를 느끼며 나는 그야말로 무섭다. 무서워 살 수가 없다.
□ 『감자』 김동인
환경과 사회의 물질적 악화가 일으킨 비극. 복 많은 그녀는 희생양이다. 부조리한 사회 현실 속에서 비정상적인 방법으로 묻혀버리고 만 것이다. 끈적끈적한 물질로 이루어진 사회는 결코 눈에 보이는 폭력으로서만 희생양을 생산하지 않는다. 비록, 여기에는 『삼국지연의』에서 나오는 파쇼는 없지만 사회가 인간의 윤리의식을 박탈해 가는 과정에 대한 관찰의 기록이 있다. 윤리 관념이 뚜렷하고 어질던 복녀가 돈에 팔려 시집을 간 후 가난 때문에 매춘을 하게 되었던 것이다. 돈, 돈, 돈. 그녀의 죽음까지도 왕 서방·남편·한의사 셋이서 공모하여 돈으로 지워버려졌다. 요컨대 물질적 생활양식·사회적 존재가 인간의 의식을 규정한 것이다.
□ 『페스트』 알베르 카뮈
알제리의 오랑 시에 급성 전염병인 페스트가 창궐한다. 도시는 격리되고 계엄령이 선포된다. 이런 페스트의 상황에 대해 사람들은 다른 대응을 보인다. 랑베르는 페스트가 ‘이 고장 사람이 아닌’ 자신과는 무관하다고 하며 도피로만 찾는다. 반면, 리유와 타루 그리고 그랑은 페스트와 싸우기 위해 보건대를 조직한다. 여기에서도 나는 색안경을 쓰고자 한다. 일반적으로 페스트로 상징되는 비인격성은 전체주의 추상성과 폭력으로 해석되곤 한다. 그러나 여기에는 또 다른 사회세력이 있다. 보건대가 바로 그것이다. 그런데 이 사회와 랑베르라는 개인은 서로 갈등한다.
“하지만 나는 이곳 사람이 아닌데요!”
“지금부터는 유감입니다만, 선생은 이 고장 사람입니다. 다른 모든 사람들처럼 말입니다.”
그 사람은 흥분했다.
“이건 그야말로 인도적인 문제입니다. 서로 마음이 잘 맞아서 살고 있는 두 사람에게 이러한 이별이 어떤 것인지를 아마 선생님께서는 이해하지 못하실 겁니다.”
리유는 곧바로 대답을 하지 않았다. 그러다가 그는, 자기도 그걸 잘 이해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랑베르가 아내와 다시 만나게 되고, 서로 사랑하는 사람들 모두가 다시 결합하게 되기를 진심으로 원하는 바이지만, 포고와 법률이 있고 페스트가 있으니, 자기의 역할은 마땅히 해야 할 일을 완수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아니지요.” 입맛이 쓰다는 듯이 랑베르가 말했다. “선생은 이해하지 못하세요. 선생님 말씀은 이성에서 나오는 말씀이지요. 선생님은 추상적이십니다.” (p124)
오랑 시에서 탈출을 시도하는 랑베르와 페스트를 퇴치하려는 보건대의 리유와 갈등이다. 여기서 개인과 사회, 과연 어느 것이 앞서야 하는가. 나는 랑베르의 생각에 많이 동의한다.
“그런데 당신은 하나의 관념을 위해서는 죽을 수 있습니다. 눈에 빤히 보입니다. 그런데 나는 어떤 관념 때문에 죽는 사람들에 대해선 신물이 납니다. 나는 영웅주의를 믿지 않습니다. 나는 그것이 쉬운 일이라는 것을 알고 있고, 그것은 살인적인 것임을 배웠습니다. 내가 흥미를 느끼는 것은,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서 살고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서 죽는 일입니다.” (p223)
그러나 랑베르는 결국 ‘혼자서만 행복해진다는 것은 부끄러운 일’임을 깨닫는다. 결국 함께 페스트 퇴치 작업을 벌이고, 마침내 페스트는 사라지고 시민들은 해방의 기쁨에 휩싸인다. 요컨대 전체주의 추상성과 폭력은 단순히 개인에 의해 극복된 것이 아니라, 새로운 연대의식에 의해 이루어진 것이다. 그렇다고 이것이 영원한 승리를 거둔다고는 카뮈 역시 보지 않는다.
시내에서 올라오는 환희의 외침소리에 귀를 기울이면서, 리유는 그러한 환희가 항상 위협을 받고 있다는 사실을 상기하고 있었다. 왜냐하면 그는 그 기쁨에 들떠 있는 군중이 모르고 있는 사실, 즉 페스트균은 결코 죽거나 소멸하지 않으며, 그 균은 수십 년 간 가구나 옷가지들 속에서 잠자고 있을 수 있고, 방이나 지하실이나 트렁크나 손수건이나 낡은 서류 같은 것들 속에서 꾸준히 살아 남아 있다가 아마 언젠가는 인간들에게 불행과 교훈을 가져다 주기 위해서 또다시 저 쥐들을 흔들어 깨워가지고 어느 행복한 도시로 그것들을 몰아넣어 거기서 죽게 할 날이 온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p410)
사회와 개인의 갈등은 끝나지 않는다. 그렇다고 그들을 대립적으로만 봐서도 역시 안 된다. 사회와 개인은 서로에게 꼭 필요한 존재이고, 서로 도아야 하는 상보적인 관계이다. 그럼에도 이 둘의 갈등이 결코 죽거나 소멸하지 않기에 나에게 있어서는 풀어야할 숙제로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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