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 세계외교사를 수강하며 작성한 발제문을 정리한 것입니다.



변환의 세계정치, 5장 국제냉전질서의 국제정치이론과 한국


 

본 텍스트의 구성

- 발제를 하는 본 텍스트는 저자(이근욱)의 주관적 생각에 따라 내용이 구성되어 있음

- 새로운 현실은 새로운 이론을 필요. 현실과 유리된 이론은 그 자체로도 충분히 논리적일 수 있으나 현실을 설명하고 예측하지 못하기 때문에 경험적인 차원에서 결과적으로 기각

- 현실주의이론은 민주주의 평화에 있어, 맑스주의 시각은 중국의 경제성장 측면에서 비판

 

현실주의 국제정치이론 : 냉전에 대한 무도덕적 이해와 국제적 갈등

 

전통적 현실주의이론 : 모든 국가는 권력을 추구한다

현실

냉전의 발생

이론가

투키디데스Thucydides, 한스 모겐소Hans Morgenthau

전제

인간의 본성이 공격적이고 권력을 추구, 특정 국가의 도덕적 열망과 보편적인 도덕원칙은 다름

이론

현재 유지되고 있는 세력균형을 유지하고자 하는 현상유지정책status-quo policy, 현재 세력균형에 도전하는 현상타파정책revisionist policy

현실 설명

(냉전) 미국 현상유지정책, 소련 현상타파정책 추진. Not 악마적인 공산주의 세력에 대응하는 선량한 자유민주주의 세력의 대립 But 두 국가가 자신의 이익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일반적으로 나타나는 갈등

 

안보 딜레마 이론 : 원하지 않는 충돌

현실

1960년대 데탕트라고 불리었던 긴장완화와 미·소간 협조

이론가

허즈Herz, 로버트 저비스Robert Jervis

전제

한 국가의 군사적 준비가 다른 국가의 심리에 있어 그와 같은 준비가 단지 방어적인목적인지(불완전한 세계에서 자신의 안보를 증진시키려는) 아니면 공격적인 목적인지(자신의 이익에 맞게 현상을 변경하려는)에 대한 풀 수 없는 불확실성 존재

이론

자신의 안보를 확보하기 위한 조치가 다른 국가들의 안보를 저해. 안보딜레마에 영향을 미치는 요인- 지리적 변수와 현재 상황에 대한 개별국가의 믿음 등과 함께, 공격수비 균형과 공격수비 구분 가능성

현실 설명

냉전은 2차 세계대전 직후 특이한 공격수비 균형과 공격수비 구분 가능성 상황에서 벌어진 의도하지 않았던 국제정치적 경쟁. 시간이 지나면서 어느 정도 상대방에 대한 정보를 축적, 선제공격을 받고도 상대에게 보복이 가능한 핵무기 개발되면서 군사기술이 방어우위와 공격 수비 구분 가능 상황으로 변화. 따라서 데탕트는 소련이 공격적이고 팽창적인 현상타파정책을 포기했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이 아니라 군사기술의 변화를 통해서 본래부터 현상유지 정책을 추진했던 미국과 소련이 서로를 확실하게 수용했기 때문 가능

 

신현실주의이론 : 무정부 상태에서 불가피한 국가간의 충돌

현실

미국과 소련의 데탕트

이론가

월츠Kenneth Waltz

전제

상대방의 의도에 대한 불확실성이 갈등 야기(본능무정부성 국제체제)

이론

무정부 국제체제에서는 정치적인 차원의 분업이 존재 할 수 없음. 국제정치의 변화는 강대국의 숫자로 정의되는 국제체제의 구조에 의해서 파악, 다극체제, 양극체제, 일극체제

현실 설명

불확실성이 강한 다극체제에서 두 차례의 세계 대전 발발. 양극체제의 대립인 냉전시기에는 한국전쟁과 베트남전쟁, 그리고 네 차례에 걸친 중동전쟁 등은 국제체제 전체를 포괄하는 전쟁으로 이어지지 않았음, 쿠바 미사일 위기도 핵전쟁으로 확대되지 않음, 냉전은 안정적

 

강대국 순환론 : 패권국과 도전국의 순환

현실

중국의 쇠락

이론가

로버트 길핀Robert Gilpin

전제

강대국과 패권국은 순환

이론

위계질서에 가까운 무정부 상태. 과대팽창은 과대비용으로 인해 패권국은 결국 쇠태. 새롭게 등장한 세력균형에 적합한 새로운 국제체제가 만들어며, 이 과정에서 패권전쟁이 발생

현실 설명

16~17세기 스페인의 패권은 17~18세기 프랑스의 패권으로, 그리고 19세기 영국의 패권으로 변화. 이 과정에서 대규모 전쟁 수행. 또한 20세기 초 영국의 패권에 대해서 독일이 도전하면서 벌어진 두 차례에 걸친 세계대전은 패권국과 도전국 이외의 제3의 국가인 미국과 소련의 패권을 가져왔으며, 앞으로도 이러한 패권국의 순환은 계속

 

자유주의 국제정치이론 : 데탕트와 유럽통합, 그리고 국제협력

- 현실주의 국제정치이론은 주로 국가간의 갈등과 경쟁, 전쟁이라는 현상에 주목. 그러나 경우에 따라서는 자신의 주권과 권한을 다른 단위체에 이양하며, 군사력 사용을 제한받음. 이러한 현실을 설명하기 위해서 새로운 이론체계가 필요

 

통합이론 : 유럽국가들의 경제협력과 통합

현실

ECC, EU 등장

이론가

미트라니Mitrany, 하스Haas

전제

국제적 무정부 상태가 항상 갈등과 불신을 가져오는 것은 아니며 오히려 여러 방법을 통해서 협력하고 새로운 체제를 건설하는 것이 가능

이론

기능주의 - 중요한 행위자 Not 개별 국가 But 경제통합을 통해서 이익을 보고 더욱 높은 수준의 통합을 요구하는 국내 이익집단

신기능주의 - 어떠한 원인에서든 일단 창설된 국제기구와 그 구성원은 출신국가의 이익과는 무관하게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서 더 높은 수준의 통합을 추진

이와 반대로 현실주의이론은 유럽통합은 개별 국가가 결단, 국가에서 실제로 정책을 결정하는 것은 정부이며, 각 국가와 정부의 이익이 어떻게 구성되어 있는가에 분석의 초점을 맞춤

현실 설명

확산효과와 국제기구의 역할에 따라 새로운 체제 건설 가능했음

 

상호의존이론 : 권력과 복합적 상호의존

현실

1970년대 미국의 경제적 우위 쇠태, 1차 오일쇼크

이론가

로버트 코헤인Robert Keohane, 조지프 나이Joseph Nye

전제

군사력에 기초한 힘과 경제력에 기초한 힘은 서로 다르며 동시에 서로 호환될 수 없음

이론

힘의 새로운 원천으로서 비대칭적 상호의존 제시. 중동국가들이 석유가격을 일방적으로 인상했을 때, 해저 유전을 보유하고 있는 영국에 비해 자체 유전이 존재하지 않는 일본이 더욱 힘이 약함

현실 설명

군사적인 우위가 경제적 다극체제 구축을 막지 못했으며, 석유가격 상승이라는 문제에 아무런 해결책을 제시하지 못했음

 

제도주의 협력이론 : 국가들의 지속되는 협력

현실

1970년대 이후 데탕트 분위기가 확산되고 미국의 경제적 우위가 축소됨에 따라 다른 국가와 협력하는 경우가 많아짐

이론가

코헤인Keohane, 오이Oye

이론 및 현실 설명

공동의 이익이 존재하지만 국가들이 협력을 통해서 공동의 이익을 추구하지 못하는 원인은 거래비용이 지나치게 높아서 발생하는 정보의 비대칭성과 불확실성의 증가 때문. , 서로의 협력 의사를 확인하고 상대의 협력 행동을 확인하는 데 필수적인 정보 비용이 지나치게 높아서.

대안

서로에 대한 감시와 상대방 행동에 대한 불확실성 제거, 거래비용의 감소를 가져오는 국제제도는 협력을 촉진할 수 있음

 

맑스주의 국제정치이론 : 세계질서와 경제구조에 대한 비판적 시각

 

세계체제론 : 자본주의 세계체제와 생산분업

이론가

칼 맑스Karl Marx, 페르낭 브로델Fernand Braudel, 월러스틴Wallerstein

전제

어느 정도 위계질서가 있으며, 이러한 위계질서는 세계자본주의체제의 유지를 위해서 존재

이론

세계경제 중심부에 위치한 국가는 강대국으로서 세계체제를 관리하며, 주변부에 위치한 국가는 중심부 국가의 관리 대상

세계자본주의 경제의 변화가 불가피하게 일어나면 과거에는 중심부 국가였지만 쇠퇴하여 반주변부로, 그리고 주변부 국가로 전락할 수 있으며, 동시에 반주변부 국가인 경우에도 발전을 가속화하여 중심부 국가로 부상하기도 함

 

종속이론 : 개발도상국의 경제성장전략

현실

중남미 국가들의 쇠퇴

이론가

프랑크Frank

이론

후진국가는 선진국가에 값싼 자원과 노동력을 제공하게 되고 선진국가는 후진국가에게 효율성이 떨어지는 기술만을 이전하며 선진국가와 후진국가의 경제적인 격차는 줄어들지 않음

 

 

Posted by Economist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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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세계외교사를 수강하며 작성한 발제문을 정리한 것입니다.



변환의 세계정치, 1장 근대 국제정치질서와 한국의 만남


 

 

문명권의 정신구조

국가나 사회는 대외 문제에 대하여 무의식적인 충동으로 반응한다. 그런 반응은 그 국가나 사회가 지니고 있는 정신 구조의 발로이며 오랜 역사로부터 나오는 지적 유산이다. 나는 외교사 서술의 분석 단위를 국가로 하되 그 단위의 정신 구조를 형성한 문명권의 존재를 강조하는 입장을 견지한다.[각주:1]

 

인간의 역사는 사랑과 증오에 관한 서술이라는 김용구의 견해를 인용하면, 1장의 내용은 서구권 안에서만 지켜지는 근대서구국제질서와 대비되는 제국질서가 서양과 동양의 충돌로 이루어졌으며 서로가 자신을 보편이자 문명표준으로 인식함과 동시에 상대방을 야만으로 규정하는 그들의 증오가 폭력적 충돌로 이어졌고, 한국은 이 와중에서 타자를 두려워하고 미워하면서 한편으로는 타자의 힘을 동경하는 정신적 공황상태를 맛보았고 이것은 아직도 상호간의 신뢰회복과 소통을 어렵게 하고 있기 때문에 우리가 풀어가야만 할 현재진행형 과제라는 것으로 요약될 수 있겠다.

 

근대 서구국제질서

근대 이전 제국질서 : 제국의 중심을 지배하는 정치세력은 문명의 중심으로서 주변의 정치세력들을 위계적으로 복속시킴. 제국 내에서 복수의 평등한 정치적 권위는 인정되지 않음

근대세계질서 : 대내적으로 절대적이고 대외적으로 평등한 주권을 지닌 국가들에 의해 형성

15세기에서 19세기에 서구의 중세에서 근대로의 점진적 이행의 단계 : 주권국가간 국제질서와 제국주의가 동시에 진행된 서구국가체제의 이원구조

서구는 비서구세계와의 관계 속에서 점진적이고 지속적인 자기변환을 통해 서구의 기적을이룰 수 있었다

 

근대 국제정치질서의 성격과 팽창

근대국가의 발전 : 서구의 중세질서 근대 국가경쟁적 공존 국제질서

중세질서의 이원성 - 보편적 정당체계 : 단일한 기독교 공동체의 보편적 이념

- 분절적 지배구조 : 중세의 영토지배, 분절적·중층적 정치적 권위

대내적 주권 : 영토에 대한 배타적이고 절대적인 지배의 권위

대외적 주권 : 복수의 (대내적) 주권의 독립성과 평등

근대국가의 발전은 ¹영토군주의 지배를 정당화하는 동시에 ²그 자의적 지배를 제한.

¹ 영토군주 세력의 부상과 교권 하락 : 교황청의 아비뇽유수(1305~1378), 교회의 대 분열(1378~1417), 16세기 종교개혁, 프랑스 가톨릭과 개신교 내란(1562~1598)

² 민주주의 발전 : 영국 명예혁명(1688), 프랑스 대혁명(1789), 1848년의 혁명

서구근대국가의 발전이 지니는 근대성: 제국질서를 대체하는 주권개념, 신분에서 해방된 보편적 인간의 정치적 기획으로서 민주주의, 산업혁명을 통해 생산력의 자연적 한계를 극복하고 부의 생산과 분배에서 정치적 제한의 철폐를 요구하는 자본주의

세력 균형 : 서구의 정치적 분립은 강대국들의 세력균형에 의해 유지

- 절대왕정시대 : 단일 왕가에 의한 강대국들의 통합 가능성이 정치적 분립 위협

- 빈회의 이후 제1차 세계대전까지: ‘정당한 세력균형의 현실적 기반은 영국의 패권, 유럽에 국한된 것이었으며 서구국가체제의 이원구조, 서구 안의 국제질서와 밖의 제국주의가 영국의 힘에 의해 분절

서구제국주의 : 1815년의 빈회의가 서구 안에서 주권국가들의 협력을 제도화했다면, 베를린회의는 서구 밖에서 주권을 명분으로 주권을 박탈하는 서구제국주의의 집단적 위선을 제도화

 

전통적 중화질서

타인과의 관계에서 질서를 도모하려는 유교적 사유체계에 기반. 따라서 천하질서에서 국가라고 하는 것은 현실적으로는 주요한 행위자로서 용인되면서도 이념적으로는 근대국제질서의 행위주체인 주권국가처럼 강고한 배타적 실재로서 인식 될 수 없었음

중화질서 내부에는 주변부의 인식과 현실 간에 불가피하게 괴리가 발생할 소지가 항시적으로 존재하였으나 장기적으로는 예적(禮的)인 질서이념 하에 끊임없이 해소될 수 있었음

 

문명표준의 역전

이질적인 문명이란 하나의 문명표준에 의거해서 보면 대개 야만으로 간주되는 경향이 있음

서구 근대국제질서 원리에서 국제사회의 일원, 즉 국제법적으로는 국제법적 주체가 될 수 있는 요건으로서 문명이라는 자격요건이 요구 ; 동아시아국가들이 구미국가와 맺은 조약이 하나같이 일방적인 불평등조약이었던 것은 기본적으로 이러한 문명적 요소의 미비라는 명분에 의한 것

서구의 국제질서와 전통적 중화질서의 만남은 동아시아 지역에서 문명표준의 역전 현상을 가져왔음

중국 : 서구국제사회의 문명 표준을 적극적으로 수용하기 어려운 근본적 어려움을 갖고 있음. 지금까지 중화문명권에서 문명표준을 제공하던 입장에서 유럽문명권의 문명표준에 의해 스스로를 재편해야하는 입장으로 전락하는 것을 뜻하기 때문

일본 : 문명의 양면성에 대한 인식을 확고히 하게 되고 문명을 오로지 힘과의 관련성에서 이해하게 되었음. ‘개화의 등급으로 표현된 문명 대 야만의 세계관이 자리 잡고 있었으며 서구의 문명표준에 눈뜨지 못한 아시아의 일원이라는 일본인들의 열등의식은 개화에 무관심한 조선이나 중국에 대한 멸시와 혐오의 감정으로 나타나게 됨

 

한국의 동요

중국과 일본은 이미 구미열강의 세계균형 속에 편재

중국 : 조공국의 자율성을 인정하는 전통적 사대질서를 부정, 조선에 대한 종주권 기획(임오군란과 갑신정변을 계기로 조선에 대한 직접 지배 강화, ·청상민수륙무역장정)

일본 : 메이지 유신 이후 서구적 근대화. 전통적 교린질서, 더 나아가 중화질서 전반의 전복 기획(강화도 조약을 통해 일본이 조선에서 중국의 종주권을 부정)

청일전쟁(1894)으로 이어지는 조선을 둘러싼 중·일의 대립은 러시아의 남하를 견제하기 위한 영국의 거문도점령(1885~87)이 상징하듯, 세계적 차원의 세력균형의 틀에서 이루어졌음

지역적·세계적 차원에서, 그리고 힘과 명분의 측면 모두에서 제국주의의 중층적인 압박은 조선의 독자적인 체제 변환의 가능성을 부정

 

세계대전

유럽문명권은 유럽 내에서는 주권국가간 관계, 국제의 모습을 띠고 있었지만, 지구의 대부분에 해당하는 비서구지역에서는 제국의 모습을 추구하고 있었음. 이처럼 제국주의의 활극장이 되어버린 세계는 바야흐로 인류사의 가장 비극적인 시기를 맞이하게 됨

제국주의, 민족주의, 유럽 세력균형의 와해가 주요 요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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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에서의 ‘100년간의 평화[각주:2]와 이와 대비되는 제국주의는 어떻게 공존할 수 있었는가가 이번 발제에 핵심이다. 대외적 주권이라는 복수의 (대내적) 주권의 독립성과 평등을 인정하는 경쟁적 공존 국제질서에서 어떻게 서구의 강대국들은 다른 문명권에 대해서는 폭력적인 행동을 취했는가. 저자는 이에 대해 서로 다른 문명권의 정신적 구조에 따라 서로를 야만으로 규정하고, 서구는 다른 문명권의 국가들을 국제사회의 일원으로 승인하지 않기 때문에 발발한 것으로 바라보고 있다. 이런 이원성은 근대국제질서 이전의 제국질서가 동시에 진행되고 있음을 보여준다고 설명하기도 한다.

 

발제자 본인은 이러한 이원성이 인식차원의 문제뿐만 아니라 그 당시 사회의 역사적 조건에 전체에 기반하고 있다는 입장을 취한다. 요컨데, 왜 유럽 국가들 사이에서는 오랜 평화(혹은 백년평화)가 이루어지며, 밖에서는 제국주의의 팽창이 이루어졌는가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질적인 문명표준에 대한 증오뿐만 아니라 경제적 이윤에 동기가 있음 이해할 필요가 있음을 주장한다.

 

중세 봉건제

계급 : 영주-농노, 물리력에 의한 경제외적 강제[각주:3]에 기반

분절적 정치 구조 : 물리적 강제력, 즉 군사력 소유양식의 분산성[각주:4]

상품·화폐관계 및 농촌과 연결된 도시경제를 발전시키고 농민적 저항이 지배층의 양 보를 받아내는데 유리하게 작용함으로써 봉건제의 해체와 자본주의의 발전을 크게 촉진

국제 질서 : 새로운 영토 정복 전쟁의 각축[각주:5]

근대 자본주의

계급 : 자본가-임노동자, 자유로운 계약[각주:6]과 생산수단의 사적 소유에 기반

근대 국가 : 일정한 영역 안에서 정당성에 의해 뒷받침되는 물리x    적 강제력을 효과적으로 독점한 제도적 지배기구[각주:7]

군사자원 및 군사기술의 혁명적 변화 : 기사군 중심의 군사양식의 퇴조와 보병군 중심의 군사양식 등장, 장창과 원시형태의 소총 및 대포가 기본무기로 사용[각주:8]

민주주의 : 자유로운 계약을 위한 신분적 해방(농노임노동자), 군사자원 확보를 위한 국가의 노력과 시민사회의 저항[각주:9]

민족주의 : 신분철폐를 부르짖으며 민주주의를 추구하는 프랑스대혁명이 동시에 신분으로 나뉘어져 있던 프랑스 민족을 하나로 묶는 민족주의임을 상기, 하층민들도 프랑스의 시민으로서 나폴레옹 전쟁에서 모든 국민은 군대에 동원

무역의 자유주의와 보호주의 : 세계체제는 ¹자본주의의 호황 등을 바탕으로 자본주의 발전을 선도하는 나라의 세계적 헤게모니 하에서 자유무역주의적 질서가 민족국가들의 상호번영을 가능케 한 안정적 발전국면과 경제위기의 도래 등으로 각국이 보호무역주의 정책을 채택하고 국가간의 갈등이 전쟁 발발과 가은 사태를 불러일으키며, 각국의 지배층에 대한 피지배대중의 저항이 격화되는 대혼란 국면을 거치면서 발전[각주:10]

세력균형 : 각국의 부르주아지들은 이해관계상 전쟁보다는 산업, 무역 및 식민지 확장 쪽으로 19세기 국가의 정책을 방향전환[각주:11]

 

중화 질서

중화질서는 조공과 책봉에 기초한 봉건제 질서. 중화질서의 위협은 그들의 정신 구조를 형성한 문명권의 위협이자 경제정치체제 자체에 대한 위협. 봉건영주(혹은 지주)들의 반발은 당연

 

지난 4~5세기 동안 대규모의 전쟁과 그 전쟁을 마무리하는 국제적 협약들이 유럽식 근대국가 체제(국제정치적 의미와 국내체제 양면 모두에 걸쳐)의 모습을 결정짓는 결정적 계기였음은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사실이다. 이러한 점에서 국가들이 전쟁을 만들어 냈지만 동시에 바로 그 전쟁이 오늘날과 같은 모습의 국가들을 만들어 냈다고 하는 틸리(Tilly)의 말은 단순히 인상주의적 표현 이상의 말로 이해하여야 할 것이다. 태생부터 전쟁 지향적인 근대 국가는 비록 비스크마르크나 카부르가 상당한 진실성을 보여주었으나, 주권적 실체로서의 모든 국가의 평등성이라는 추상적이고 본질상 허구적 개념에 의해 오랜 평화가 이뤄진 것이 아니고, 자본주의 체제에서의 경제적 이윤에 의한 자유주의가 그 기반이다. 다국체제에서 국민국가와 자본의 입장은 서로 상반되며, 이는 현 자본의 세계화와 대비되는 국민경제의 피폐성에서도 극명히 드러나는 문제이다.

 

 

국민국가(민족주의)와 자유주의에 대립에 기반한 연표

1776 아담 스미스, 국부론출판

1789 프랑스 대혁명 [나폴레옹 전쟁으로 인해 영국-대륙간의 무역 자유롭게 진행X]

1819 리카도, 정치경제론에서 비교우위론개념 등장 - 무역의 자유주의 주장

1839 콥든 반곡물법리그형성

1848 프랑스에서의 제2공화정 형성

1849 항해법 폐지

1853-54 영국, 프랑스, 터키, 러시아 크리미아 전쟁

1859 다윈, 종의 기원출판. 사회진화론에 근거한 민족주의 형성 기반

1860 콥든-슈발리에 무역조약. 최혜국대우 조항

민족주의, 식민지 경쟁의 시작

1871 독일 통일. 프랑스와의 전쟁에서 승리- 50억 프랑의 보상금과 알사스-로렌 지방을 할양받음, 그러나 과거의 영지를 떼어주는 개념이 아니라 민족을 분단, 전쟁 승리의 원인을 게르만족의 활력과 라틴족의 탈진으로 설명(사회진화론에 근거한 민족주의)

1873 뉴욕과 비엔나 증권시장 붕괴 보호무역 정책 증가, 영국은 계속 개방 일관

비스마르크 프랑스 고립, 독일-오스트리아-러시아 삼제동맹

1877-78 러시아 터기와의 전쟁 승리. 산스테파노 조약(78). 그러나 비엔나 회의를 통해 러 시아 발칸반도 진출 좌절

1879 비스마르크 무역 보호주의. 독일-오스트리아 이국동맹

1881 프랑스 관세체제

1894 프랑스-러시아 동맹 체결 (비스마르크가 주도한 러시아, 프랑스 분리 노력이 실패)

1892 메린느 관세제도

1895 막스 베버, 독일 제국주의 필요성 주장

1898 - 프 아프리카에서 충돌, 파쇼다 사건

- 스페인 미서 전쟁

1903 세르비아 군사쿠테타, 1878년 이래 친오스트리아왕조 붕괴

1900-14 자유주의 질서 절정기

  1. 김용구, 『외교사란 무엇인가』, 도서출판 원, 2002. [본문으로]
  2. K, Polanyi, The Origins of Our Time : The Great Transformation (Lodon, 1945), ch1. [본문으로]
  3. 토지 소유권, 인간의 인격적 소유 및 재판 행정권 E.A Kosminsky, Studies in the Agrarian History of England in the Thirteenth Century. [본문으로]
  4. 중앙정부가 아닌 지방세력에 의해 당시 필요로 하던 군사자원(병력과 이의 유지에 필요한 물적자원)의 대부분이 제공되던 중기마병 중심의 봉건제적 군사양식에서는 군사계층을 중심으로 하는 정치적 분권화의 경향이 불가피하게 된다. 다음의 문장은 초기의 서양 역사를 잘 표현해주고 있다. “사회전체는 끊임없는 사적 전쟁상태에 놓여있었다.” C.W. Previté-Orton, The Shorter Cambridge Medieval History, Vol.1: The Later Roman Empire to the Twelfth Century(Cambridge :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52), p128. [본문으로]
  5. 봉건제적 분산적 정치질서는 무력수단의 소우가 곧 생산수단 소유의 기반이 되고 또한 무력이 잉여생산 수취의 직접적 수단이 되었다는 점에서 독특한 역사사회학적 성격이 드러난다. 중세후기인 15세기까지 유럽사회에서 농업생산성과 무역량은 비록 정체되었던 것은 아니지만 그 성장속도는 새로운 영토정복에 의해 얻어지는 수확에 비교할 때 여전히 대단히 느렸다. 앤더슨(Perry Anderson)의 말을 빌려 “당시 봉건제하에서의 지배계급에게 주어진 여러 가지 수단 중에서 아마도 가장 합리적이고 신속한 단일의 잉여수취의 확대양식이었다.” Perry Anderson, Lineages of the Absolutist State(London : New Left Books, 1974), p.31. [본문으로]
  6. 자본가-임노동자는 봉건제와 같은 인격적 예속에 따른 관계가 아니라 자유로운 계약에 의한 관계이다. [본문으로]
  7. Max Weber, Wirtschaft und Gesellschaft [본문으로]
  8. 이를 바탕으로 개인적 전사인 기사가 아닌 조직으로서의 보병군이 중심적 군사양식이 된 당시 상황에서 군사적 승패는 기본적으로 병력규모와 대규모 병력을 유지할 수 있는 경제력에 의존하였다. [본문으로]
  9. 새롭게 등장한 체제는 증가된 부담의 균등한 배분, 그 부담에 상응하는 정치참여의 권리부여와 부담에 대한 동의형성을 위한 정치적 제도 마련 보장하는 것이었다. 형평원칙에 입각한 부담의 배분은 지배층의 특권폐지를 바탕으로 하는 부담의 국민화로, 그리고 이에 상응하는 정치적 참여의 국민화를 낳았다. [본문으로]
  10. 안정적 발전국면의 세계체제는 그간 ¹네덜란드가 스페인이 주도한 중세적 세계체제를 해체시키는 데에 앞장서고 자유무역주의적 세계체제를 최초로 성립시킨 웨스트팔렌 조약 체결을 주도함으로써 수립된, 근대적 세계체제 초기의 ‘네덜란드 헤게모니체제’에서 출발하여 ²대 나폴레옹 전쟁에서의 승리를 주도하고, 명실상부한 ‘세계의 공장’이 된 영국이 자유무역주의적 세계질서를 회복시킴으로써 수립된 ‘영국 헤게모니체제’를 거쳐 ³제2차 세계대전 이후에 수립된 ‘미국헤게모니체제’로 발전해왔다. 서울대학교 정치학과 교수 공저, 『정치학의 이해』박영사, 2004. [본문으로]
  11. 그럼에도 19세기를 지나면서 나타난 수많은 영토분쟁, 외교적 사건, 식민지에서의 충돌, 지역적 또는 기타의 제한된 무력 분쟁들은 다국체제의 구조 안에 내재하는 긴장을 잘 말해주는 증거가 된다. G. Poggi, 박상섭 옮김, 『근대국가의 발전』, 믿음사, 1995. [본문으로]
Posted by Economist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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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서양철학사를 수강하며 작성한 레포트를 정리한 것입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사랑(philia)과 자본주의 경제




목차

 

. 들어가는 말

. 아리스토텔레스의 사랑(philia) - 탁월성(, arete)의 일종으로서의 사랑

. 사랑은 왜 필요한가 - 사랑과 행복 그리고 윤리

. 자본주의 경제의 물상화(reification)와 사랑(philia)

. 맺음말

 

 

. 들어가는 말

 

 많은 이들은 이 글의 제목인 아리스토텔레스의 사랑(philia)과 자본주의 경제를 보고, 철학적 개념인 사랑(philia)을 경제학적으로 바라보는 것에 대해 여러 의혹들을 품을 수 있다. 그러나 경제학이라는 것이 철학적으로 이미 많이 다루어지고 있는 자본주의에 대한 분석이라는 것을 상기한다면, 내가 이 글을 통해 철학적 개념인 아리스토텔레스의 사랑(philia)을 경제학적인 방법으로 다루는 것에 대해 큰 반감을 갖지 않을 수도 있다. 왜냐하면 내가 시도하고자 하는 것은 일반적으로 경제학이라고 받아들여지고 있는 여러 수치들에 대한 고뇌가 아니라 자본주의 경제에 대한 성찰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런 성찰에 있어 단지 아리스토텔레스의 사랑(philia)의 개념을 중점적으로 다루고 있을 뿐이기 때문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사랑(philia)의 개념을 통해 자본주의를 성찰하고자 했던 그동안의 시도들은 아리스토텔레스가 유익함을 이유로 하는 사랑(philia)이 불완전하다고 했던 것에 주로 기초하여 논의를 진행해왔다. , 경제적 이익의 동기로 친분을 쌓고자 노력하는 현대인들을 비판할 수 있는 근거가 되어왔었다.


 이런 협소한 수준을 넘어서는 보통 인격적 사랑의 개념으로 사용되어 현대 자본주의 사회의 인간관을 비판해왔었다. 여기서 사랑(philia), phila는 좁은 의미에서의 우정뿐만이 아니라 보다 넓은 의미에서의 우정으로 파악될 수 있는 정신-인격적 사랑으로 이해되고 있다.[각주:1] 이는 앞의 논지를 발전시킨 것이다. , 자본주의 사회에서 경제적 이익을 바탕으로 하는 인간관계가 지배적인 것을 비판하고 정신-인격적인 관계를 주장하는 것이다.


 나는 이런 방식으로 그동안 시도되어 왔던 것을 여기서 다시 반복하고자 하지 않는다. 그러한 논의들은 분명히 충분한 가치가 있지만, 왜 자본주의 경제에서는 유독 경제적 이익을 이유로 하는 사랑이 지배적인지에 대한 경제 사회구조적인 이해가 결여되어 있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아리스토텔레스의 사랑(philia) 개념을 깊이 있게 다루고 있지 않다. 따라서 나는 이 글을 통해 아리스토텔레스의 사랑(philia) 개념을 중점적으로 살피며, 자본주의 경제 사회에서 인간관계가 왜 그렇게 피상적이며 경제적 이익을 근거로 하여 성립하게 되는지에 대한 분석을 시도할 것이다.


 이 글의 순서는 다음과 같다. 먼저 아리스토텔레스의 사랑(philia)을 분석하면서 아리스토텔레스의 사랑(philia)이 탁월성의 일종으로서의 사랑이며, 그것이 윤리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다는 것을 논할 것이다. 그리고 자본주의 경제에서 윤리적인 삶이 시행되기 어려운 이유, 즉 사랑(philia)이 실현되기 힘든 원인을 물상화(reification)를 가지고 설명할 것이다. 이러한 글의 구조는 단순히 아리스토텔레스의 사랑(philia)을 논하며, 이러한 철학적 개념이 현실에 실현되기를 단순히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자본주의 경제의 문제점들이 극복되어야지만 사랑이 실현될 수 있고 윤리적인 삶을 살 수 있다는 것을 밝히는 데에 있다. , 이 글은 아리스토텔레스의 힘을 빌려 자본주의 경제를 비판하기 위한 시도이다.

 

 

 

. 아리스토텔레스의 사랑(philia) - 탁월성(, arete)의 일종으로서의 사랑

 

 ‘philia’는 주로 우정, 사랑으로 번역되는데, 우리의 어감에는 친구가 될 수 없는 선후배나 부모자식을 포함할 수 있는 관계에 있기 때문에 우리가 일반적으로 인식하는 우정과 다소 차이가 있다. 또 성적인 사랑(eros)과도 다른 의미를 지니고 있기 때문에, 아리스토텔레스에 있어 ‘philia’가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는지 먼저 살펴볼 필요가 있다.

 

 사랑(philia)은 일종의 탁월성(arete)이거나 혹은 탁월성을 수반하는 것이다.(EN 81155a3-4)

 

 아리스토텔레스는 니코마코스 윤리학2권에서 탁월성에 관한 일반적 설명 이후, 개별적 탁월성을 열거하면서 사랑(philia)을 인간관계에서 놀이 이외의 일상적 삶에 공유되는 즐거움과 관련한 중용의 품성상태로 정의하였다.[각주:2] 여기서 인간관계는 부모자식이나 형제지간과 같은 가족 관계부터 시작하여 정치적 공동체에 소속된 동료 시민까지의 범위를 포함하는 넓은 의미의 인간관계이다.


 사랑은 일종의 탁월성이기에 탁월성의 구별과 같은 방법으로, 활동으로서의 사랑과 품성상태로서의 사랑으로 구별된다.[각주:3] 품성상태는 상응하는 활동(들의 반복)에서 생기는데, 이는 올바른 행위의 반복에서 올바른 품성상태가 생긴다.[각주:4] ,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있어 진정한 의미의 사랑은 중용에 따른 올바른 활동에 의해 형성된 품성상태이다.


 이러한 탁월성에 기초한 사랑은 유익이나 즐거움과 같이 상대방에게 우연적으로 속하는 것에 의해 성립한 것이 아니다. 유익이나 즐거움과 달리 상대방 자체의 좋음에 의해 성립한 것이며, 유익이나 즐거움 때문에 생긴 사랑은 더 이상 유익과 즐거움을 주지 못하면 사랑이 멈추는 것[각주:5]과 달리 탁월성이 지속적인 것과 마찬가지로 탁월성에 기초한 사랑은 유지된다. 좋음에 의한 사랑은 더불어 유익과 즐거움을 준다.[각주:6] 따라서 이것이 가장 완전한 사랑이다.

이렇게 아리스토텔레스에 있어 사랑(philia)은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할 수 있는 연애의 감정이나 우정과 다른 개념이다. 그가 가장 좋은 사랑을 탁월성과 관련지어 생각해본 것 역시 우리가 쉽게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다. 더불어 ‘philia’가 인격적인 사랑으로 받아들여지고 있지만, 사실 상대방 그 자체를 전인격적으로 바라보기보다는 상대방의 탁월성에 기초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 전체적 인격 그 자체를 사랑했다기보다는 선함, 고귀함을 사랑한 것처럼 보인다.


 사랑이 탁월성과 결부되어 다소 딱딱하게 보이는 이유는 다음과 같다. 서로 호의를 가지고 있고, 상대방이 잘 되기를 혹은 훌륭하기를 바라며, 또 그런 호의나 바람이 서로에게 알려져 있는, 그런 사람들의 관계가 사랑이다. 그런데 서로가 잘 되기를 바라는 것은 서로가 좋은 사람인 한에서 바란다. 나쁜 사람은 자신들에게 좋아 보이는 것 대신, 실제로는 해가 되지만 즐거운 것을 선택[각주:7]하지만 훌륭한 사람은 자신에게 좋음과 그렇게 보이는 것을 바라며 실제로 행하고 사랑하는 사람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이다. 모든 지성(nous)은 자신에게 최선의 것을 선택하며, 훌륭한 사람은 그 지성의 설득에 복종하기 때문이다.[각주:8] 따라서 사랑에는 탁월성이 결부되었고, 영혼의 지속적인 상태로서의 탁월성은 순간적인 감정과 구별되기에 사랑 역시 감정으로 바라보지 않았기 때문에[각주:9] 우리에게 다소 메마르게 다가올 수 있다.

 

 

 

. 사랑(philia)은 왜 필요한가 - 사랑과 행복 그리고 윤리


 이제 서로를 이용하지 않는 진정한 사랑은 탁월성을 이유로 하는 좋은 사람들 사이에서만 가능하다.[각주:10] 그런데 좋은 사람들은 그들 모두 자기 충족적이기 때문에 상대방을 필요로 하지 않기 때문에 사랑은 불가능하게 된다. 아리스토텔레스 역시 행복을 그것만으로 삶을 선택할 만한 것으로 그리고 아무것도 부족함이 없게끔 만드는 자족적인 목적으로 바라보았기 때문에 사랑과 행복을 연결하는데 있어 난관에 봉착할 수 있다.

 

 행복한 사람이 친구를 필요로 하는지 그렇지 않은지에 관해서도 쟁론이 있다. 어떤 사람들은 지복의 경지에 있으며 자족적인 사람들에게는 친구가 필요하지 않다고 주장한다. 그들은 이미 좋음을 가지고 있으며 자족적인 만큼 그 어떤 것도 추가적으로 필요로 하지 않다. 그런데 친구는 원래자신과는 다른 타인으로서 본인 스스로는 할 수 없는 것을 공급하는 사람이니 말이다. (EN 99, 1169b3-22)

 

 플라톤은 그가 썼던 뤼시스(Lysis)을 보면, 아리스토텔레스가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자족적인 사람들에게는 친구가 필요하지 않다고 주장했던 사람이다. 훌륭한 자끼리는 그들이 비슷한 한에서는 서로에게 아무런 도움이나 해를 줄 수 없고 따라서 서로를 존중할 수 없다. 또 그들이 훌륭한 한에서는자족적이며, 그래서 서로를 전혀 필요로 하지 않으며, 따라서 서로를 존중할 수 없다. 훌륭한 사람들이 공유하는 비슷함과 훌륭함 둘 중 어느 측면에서도 훌륭한 자끼리는 서소를 존중하지 않을 것이고, 따라서 서로를 사랑하는 것이 못 되며, 따라서 친구도 될 수 없다.[각주:11]


 그러나 아리스토텔레스는 뤼시스편에서의 플라톤과 다른 주장을 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행복한 사람이 친구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는 얘기가 맞는 것은 주로 유익이나 즐거움을 이유로 하는 친구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는 점에서라고 말한다.[각주:12] 우연적인 의미에 따른 사랑은 행복의 자족성 요구로부터 배제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사랑의 필요성과 행복의 자족성 사이의 모순처럼 보이는 것을 풀기 위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그런데 사태를 보다 자연적으로 고찰하는 사람들에게 유덕한 사람은 유덕한 친구를 본성상(physei) 선택해야 하는 것으로 보인다. 본성상 좋은 것은 유덕한 사람에게 그 자체 좋으며 즐거운 것이라고 얘기되기 때문이다. 동물에게 있어서 삶은 지각의 능력으로 정의되며, 인간의 경우에는 지각 혹은 사유의 능력으로 정의된다. 그런데 능력은 '그것의 발현으로서의' 활동을 조회점으로 하며 일차적인 것은 활동에서 성립한다. 그래서 삶은 일차적인 의미에서 지각함 혹은 사유함인 것으로 보인다. 산다는 것은 그 자체 좋고 즐거운 것에 속한다. 왜냐하면 정의에 의해 규정되었기 때문이다. 정의에 의해 규정된 것은 좋음의 본성을 가진다. 그런데 본성상 좋은 것은 훌륭한 사람에게도 좋다. 이것이 바로 산다는 것이 모든 사람에게 즐거운 이유이다. [] 그런데 산다는 것 자체가 좋고 즐거운 것이며 모두가 그것을 추구하는 것으로 보인다면, 훌륭하며 신적으로 행복한 사람들도 그 누구보다도 삶을 추구할 것이다. 이들에게 삶은 무엇보다도 우선해서 선택해야 할 것이며 이들의 삶이 가장 신적인 행복으로 충만하기 때문이다.(EN 99, 1170a13-29)

 

 여기서 아리스토텔레스는 친구를 그 자체, 본성상 선택할 만한 것으로 이해하고 있다. 친구는 다른 것을 위한 수단으로, 나의 부족함을 채우기 위해 선택되는 것이 아니다. 유덕한 친구는 그 자체 선택할 만한 것이다. 우리가 우리의 삶을 그 자체 추구하듯이 훌륭한 친구들의 삶 또한 그 자체 추구한다. 좋은 친구들이 존재하지 않으면 행복의 자족성은 유지될 수 없기에 행복은 가장 완전한 사랑을 내재적 구성요소로 요구한다.


 그리고 인간은 폴리스적이며 함께 살게끔 되어 있는데[각주:13] 인간에게 있어서 함께 산다는 것은 동물처럼 같은 공간에 배정받았다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고유 기능인 생각과 말을 나누는 것이기 때문에 이 고유한 인간적인 사회성을 완성시키는 즐거움이 바로 사랑이다. 친구와 함께 지각할 내용은 서로가 존재함을 서로 알고 있는 일이며, 이것이 구체적으로는 함께 살면서 서로의 말과 생각을 나누는 것이라면, 자신의 존재가 무엇보다 선택할 만한 것이듯 친구의 존재 역시 선택할 만한 것이다. 따라서 행복하게 될 사람은 훌륭한 친구를 필요로 하게 될 것이다.[각주:14]


 그러므로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있어 인간은 본성상 폴리스적이며 이런 본성에 따른 탁월성을 이유로 하는 좋은 사람들 간의 사랑은 행복과 관련 될 수 있다. 이렇듯 그는 자신이 가지고 있는 탁월성과 행복에 관한 철학으로 사랑을 고찰하였다. 아리스토텔레스에 있어 사랑에 관한 철학은 그의 고유한 탁월성과 행복에 관한 철학체계와 분리해서 생각할 수 없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체계의 이해를 위해 잠시 아리스토텔레스와 다른 사유체계를 가졌던 순자를 언급해보도록 하자. 순자 역시 아리스토텔레스가 사회공동체는 같은 공간을 배정받았다는 의미를 넘어선다고 바라본 것과 유사하게 사회구성을 바라본다.

 

 사람이 생존하기 위해서는 무리를 짓지 않을 수 없고, 무리가 있으면서 나눔이 없으면 쟁탈이 일어나고, 쟁탈이 생겨나면 어지러워진다.[각주:15]

 

 그러므로 고대의 성왕이 이를 위하여 예의로 절제해서 분별했다.[각주:16]

 

 사람은 사회공동체를 이룰 수 있으나, 소나 말은 그것을 이룰 수 없다. 사람은 어떻게 무리를 이룰 수 있는가? 나누기 때문이다. 나누는 것을 어떻게 실천할 수 있는가? 그것은 의()에 의해서이다.[각주:17]

 

 여기서 의()에 의한 나눔은 예()라고 할 수 있다. 이것은 인간을 지성(nous)으로 동물과 구분하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체계와 마찬가지로 인간과 동물을 구분하는 기준이 된다. ()에 의해 각자 감정을 적절하게 절제해야 하는 이유는 사회구성에 그 원인이 있다. 이렇듯 인간은 사회를 구성하면서 일종의 윤리를 필요로 하게 된다.


 아리스토텔레스가 탁월성과 행복에 관한 철학을 논한 것이 윤리학과 관계가 있듯이 그에 있어 사랑 역시 윤리적인 문제가 아닐까? 그렇다면 탁월성에 따른 사랑을 인간의 사회적 본성과 관련지어 가장 완전한 사랑이라고 언급한 것 역시 탁월성에 기초한 사랑이 가장 윤리적인 사랑이라고 말하기 위한 것이라고 생각해 볼 수 있지 않을까? 나는 그동안 살펴보았던 아리스토텔레스의 사랑을 일종의 윤리적으로 요구되는 인간관계로 규정짓고자 한다. 그렇기 때문에 사랑(philia)은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는 것처럼 상대방을 그 자체로 전인격적으로 대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윤리적 삶을 완성하며 상대방 역시 훌륭해지기를 바라는 것이다. 이제 사랑은 윤리적으로 요구된다.

 

 

 

. 자본주의 경제의 물상화(reification)와 사랑(philia)

 

 오늘날 많은 이들은 원자력의 치명적인 폐해와 환경파괴의 엄청난 결과에 대해, 관료제와 자본주의의 비인간성 등등에 대해 도덕적인 비난을 한다. 그런 의미에서 일종의 윤리적 의미가 함축되어 있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사랑(philia)은 오늘날 사회에 더욱더 요구되어야 할 것으로 보인다. 더불어 현대 아리스토텔레스주의자들이 걱정하듯이, 사회공동체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은 개인들이 만연한 오늘날 사회에서 개인들을 윤리적 관계로 연결하는 데에 아리스토텔레스의 사랑(philia)은 충분히 그 의미를 지닌다.


 현대인들은 현실의 자질구레한 행복과 물질적 쾌락에 만족하며 어떠한 모험도 감행하지 않는 지극히 평범하고 소심한 개인들도 보여진다.[각주:18] 텔레비전과 인터넷, 게임 중독으로 대표되는 오늘날 청소년층의 불안은 사회가 숱한 깨진 유리조각처럼 숱한 개인들로 원자화, 파편화되어있는 것으로부터 발생한다. 이렇게 원자주의가 만연해있는 사회에 아리스토텔레스에 있어 폴리스적 본성이 갖는 의미와 그에 따라 탁월성에 기초한 인간관계인 사랑을 강조하는 것은 매우 뜻 깊은 일이 될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한 발 더 앞서 나가 왜 개인들은 파편화되었으며, 왜 사랑이 실현되지 않고 있는 사회에 살고 있는지 되물을 수 있다. 나는 이러한 물음들을 자본주의 경제의 물상화(reification)와 관련지어 대답해보려고 한다. 그리고 이러한 분석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사랑이 갖는 중요성을 다시금 강조하게 되는 계기가 될 것으로 보인다.


 먼저 물상화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살펴보도록 하자. 물상화는 사람과 사람의 사회적 관계가 물건과 물건의 사회적 관계로 나타나는 것을 뜻한다. 자본주의 경제에 살고 있는 우리들의 사회적 관계는 직접적인 관계가 아니라 상품이라는 사물들의 교환관계로 나타난다. 예컨대 선풍기 생산자와 농부의 관계는 직접적인 관계로 드러나지 않고 선풍기와 농부가 생산하는 쌀의 관계로 등장할 뿐이다. 선풍기 생산자는 밥을 먹으면서 농부가 무더운 더위 속에서 고생하고 있다는 생각을 하지 않는다. 농부 역시 선풍기 생산자가 끼니를 거르지는 않을까 걱정하지 않는 것은 분명하다.


 이러한 사회적 관계는 아리스토텔레스가 살고 있던 폴리스에서 이루어질 수 있는 탁월성에 따른 관계(philia)와는 분명한 차이가 있다. 선풍기 생산자와 농부가 서로 호의를 가지고 있고, 상대방이 훌륭해지기를 바라지 않는 것은 매우 당연해 보인다. 이러한 사회적 관계는 유익을 이유로 하는 관계로 볼 수도 있는데, 그들은 상대방이 얼마나 좋고 훌륭한지에 상관없이 그 사람이 생산한 상품에 대해서만, 즉 외적인 피조물에 의해서만 관계를 맺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문제는 자본주의 경제가 확대될수록 이러한 물상화가 더욱더 심화된다는 점에 있다. 예컨대 교육이 본격적으로 상품화되면서 선생과 학생의 관계는 교육이라는 상품을 두고 생산과 소비하는 사람이 된다. 그들은 선생이 생산하는 교육이라는 상품과 학생이 지불하는 화폐의 관계로 나타날 뿐이다. 이것은 아리스토텔레스가 살던 당시에 스승과 제자 사이에 사랑(philia)이 성립하던 아카데미의 모습과 큰 대조를 이룬다.


 이렇게 인간관계에 있어 물상화가 더욱더 지배적인 힘을 얻게 될 때마다 인간관계에 있어 탁월성을 바탕으로 한 사랑(philia)의 관계는 더욱더 성립하기 어려워지며, 윤리적인 의미에 있어서도 매우 큰 위기를 갖게 된다. 오늘날 자본주의 사회에서 사람 사이에 경제적 관계가 아닌 관계를 만드는 시기는 보통 회사에 들어가기 이전인 학생시절이다. 그러나 교육이 상품화되면서 학교는 단순히 상품을 소비하는 장소로 전락해버렸고, 학생시절마저 친구를 만들기 힘들게 되었다. 교육의 목적은 우리의 노동력이라는 상품을 더욱더 비싸게 만드는데 있기 때문에, 학생들은 친구들과 어울리기 보다는 공부에 열중하며 다른 학생들과 경쟁해야 한다. 우리나라는 특히 학생들이 주로 학원에서 시간을 보내고 있기 때문에 함께 생활하지 못하면서 사랑(philia)의 관계를 맺기 더욱더 힘들다.


 이렇게 사람과 사람의 사회적 관계가 상품들간의 사회적 관계로 나타나는 물상화가 이루어지는 자본주의 경제에서는 인간이 탁월성을 기초로 하는 사랑(philia)의 관계를 맺고 유지하기 매우 힘들다. 인간의 윤리와 관계되어 있는 사랑(philia)이 실현되기 어렵다는 것은, 다시 말해 사람들 사이에 윤리가 실현되기 어렵다는 것과 우리가 윤리적인 삶을 살기 어렵다는 것을 뜻한다. 따라서 우리가 아리스토텔레스의 사랑(philia)의 개념을 분석하고 단순히 그것을 주장하는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자본주의 경제에 존재하는 물상화를 비판하고 자본주의 경제의 문제점들을 짚고 넘어가야 한다. 오늘날 사회에서 여러 윤리적인 문제들이 대두되고 있는 것들은 이런 것들과 기초하여 살펴봐야 하며, 우리가 윤리적인 삶을 생활하고자 한다면 자본주의 경제가 갖고 있는 병폐-예컨대 물상화의 원인이 되고 있는 상품-들을 해결하고자 노력해야 할 것이다.

 

 

 

. 맺음말

 

 지금까지 아리스토텔레스의 사랑(philia)과 자본주의 경제의 물상화(reification) 개념들을 살펴보았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사랑(philia)을 일종의 탁월성으로 바라보면서 유익과 즐거움과 같이 우연적인 것에서 오지 않는 지속적인 사랑을 가장 완전한 사랑으로 바라보았다. 사랑은 인간의 폴리스적인 본성에 의해 요구되는데 이는 사랑을 탁월성에 기초하여 바라본 것과 관련된다. 따라서 아리스토텔레스의 사랑은 윤리적 의미를 지닌다는 것이 이 글의 전반부에 해당된다.


 후반부에서는 자본주의 경제에 물상화를 다루었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가 상품, 사물들의 관계로 나타나면서 아리스토텔레스의 사랑(philia)이 실현되기 힘든 측면들을 설명하였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사랑(philia)은 앞서 본 것과 같이 윤리적인 의미를 지고 있기 때문에 이것이 실현되기 힘들다는 것은 자본주의 경제에서 비윤리적인 일들이 크게 문제시되는 것을 설명하는데 도움이 된다.


 많은 이들이 오늘날 사회의 비윤리성을 지적하면서 아리스토텔레스를 언급하곤 한다. 그러나 정작 왜 오늘날 사회에서 윤리적인 문제가 대두되고 있는지 사회구조에 대한 분석에 소홀히 해왔다. 나는 이런 점들을 극복하고자 아리스토텔레스에 있어 사랑(philia)이 어떤 의미인지 살펴보고 자본주의 경제에서 사랑(philia)이 왜 실현되기 힘든지 분석하였다. 이는 오늘날 자본주의 경제에 살고 있는 우리에게 윤리가 문제시되고 있는 문제를 구조적으로 살핀 것이다. 처음 작업해보는 일이어서 그런지 글이 매우 피상적으로 느껴지고 논지도 많은 부분에서 허술함이 보인다. 다만, 이 글이 오늘날 사회의 윤리 문제에 대해 어느정도 문제제기가 되길 바라며 이 글을 마친다.

 

 

 

참고문헌

 

Aristoteles, Aristotelis Ethica Nicomachea (이창우김재홍강상진 옮김, 니코마코스 윤리학, 이제이북스, 2006)

Charles Taylor, The Malaise of Modernity (송영배 옮김, 불안한 현대 사회, 이학사, 2001)

Karl Marx, Capital (김수행 옮김, 자본론, 비봉출판사, 2006)

Platon, Lysis (강철웅 옮김, 뤼시스, 이제이북스, 2007)

김재홍 외, 아리스토텔레스 니코마코스 윤리학,철학사상별책 제3권 제9, 서울대학교 철학사상연구소, 2004

심상태, 인간 : 신학적 인간학 입문, 서광사, 1989

리쩌허우(李澤厚), 정병석 옮김, 중국고대사상사론, 한길사, 2005

  1. 심상태, 『인간 : 신학적 인간학 입문』, 서광사, 1989, p.221 [본문으로]
  2. 일상적 삶에서 찾아지는 나머지 즐거운 일들에 관련해서, 마땅한 방식으로 즐거운 사람은 사랑이 있는 사람이요, 그 중용은 사랑(philia)이다. 이에 반하여 이런 면에서 지나친 사람은, 만일 아무 목적이 없으면 비굴한 사람이고, 만일 자기 자신의 이익을 추구하고 있으면 아첨꾼이다. 그리고 이 방면에서 모자라서 어떤 상황에서나 불쾌한 사람은 일종의 싸움꾼이요, 심보가 고약한 사람(dyskolos)이다. (EN 2권 1108a26-30) [본문으로]
  3. 탁월성에 관한 논의에서 어떤 사람들은 품성 상태(hexis)에 따라, 또 어떤 사람들은 활동(energeia)에 따라 좋은 사람이라고 이야기되듯, 사랑(philia)의 경우에 있어서도 그러하다. 함께 살면서 서로에게 기쁨을 주며 좋음을 제공하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또 자고 있는 사람들이나 혹은 장소상 서로 떨어져 있는 사람들은 사랑의 활동을 하는 것은 아니지만 친구처럼 활동할 수 있을 그런 품성 상태를 가지는 것이다. (EN 8권 5장 1157b5-10) [본문으로]
  4. 따라서 탁월성의 경우에서도 이와 마찬가지이다. 왜냐하면 다른 사람들과의 거래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행함으로써 우리는 올바른 사람이 되고 또 어떤 사람은 올바르지 못한 사람이 된다. 무서운 상황 안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행함으로써 또 두려워하거나 혹은 배짱 있는 마음을 지니거나 하는 습관을 얻게 됨으로써, 어떤 사람은 용감하게 되고 또 다른 어떤 사람은 비겁한 사람이 되기 때문이다. 욕구나 노여움에 관한 것들의 경우에서도 이와 마찬가지이다. 왜냐하면 그들 자신이 처한 이러한 상황 속에서 이렇게 행동하는가 또는 저렇게 행동하는가에 따라서, 어떤 사람은 절제 있는 사람이 되고 또 온화한 사람이 되기도 하고, 또 다른 어떤 사람은 방종한 사람이 되기도 하고 화를 잘 내는 사람이 되기도 한다. 어떤 사람들은 동일한 상황 속에서 이렇게 행함으로써 다른 사람들은 저렇게 행함으로써 그런 저런 사람이 되는 것이니 한 마디로 말하자면, 품성 상태들은 상응하는 활동(energeia)들에서 생긴다. (EN 2권 1103b14-22) [본문으로]
  5. 따라서 이러한 것들[유익 혹은 쾌락을 이유로 성립하는 사랑]은 우연적인 의미에 따른 사랑이다. 사랑받는 사람이 그 자체인 한에서 사랑을 받는 것이 아니라 어떤 좋음이나 즐거움을 주는 한에서 사랑받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랑은 [사랑을 주고 받는 친구들이] 계속 이전 같지는 않을 때 쉽게 해체된다. 더 이상 즐거움이나 유익을 주지 못하게 될 경우 그들의 사랑 역시 멈추게 된다. 유익한 것은 지속하지 못하고 경우에 따라 다른 것이 유익해지는 것이다. 따라서 그들이 서로 친구였던 그 이유가 사라지고 나면 사랑 역시 해체된다. (EN 8권 3장, 1156a16-24) [본문으로]
  6. 각자는 또 단적으로도 좋은 사람이고 친구에 대해서도 좋은 사람이다. 좋은 사람들은 단적으로도 좋으며 서로에 대해서도 도움을 주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좋은 사람들은 즐거움을 주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단적으로도 즐거우며 서로에게도 즐거움을 주기 때문이다. 좋은 사람들 각각에게 자신의 행위들 또 그와 같은 종류의 행위들은 즐거운 것이며, 좋은 사람들의 행위들은 [이런 점에서] 같거나 유사하다. (EN 8권 3장, 1156b7-17) [본문으로]
  7. EN 9권 1166b9-10 [본문으로]
  8. EN 9권 1169a17-18 [본문으로]
  9. 애호(philesis)는 감정(pathos)이지만 사랑은 품성상태(hexis)인 것처럼 보인다. 애호는 [생물] 못지않게 무생물에 대해서도 성립하지만, 사람들이 호응하는 사랑을 하는 것은 합리적인 선택(prohairesis)과 함께하는 것인데, 합리적 선택은 품성상태로부터 나오기 때문이다. 더 나아가 사랑받는 사람들 자체를 위해서 그들이 잘 되기를 바라는 것은 감정에 따른 것이 아니라 품성상태에 따른 것이다.(EN 8권 1157b28-32) [본문으로]
  10. 가장 완전한 사랑은 좋은 사람들, 또 탁월성에 있어서 유사한 사람들 사이에서 성립하는 사랑이다. (EN 8권 3장, 1156b6-7 [본문으로]
  11. Lysis 214e-215e [본문으로]
  12. ‘그들이 주장하는 바는’ 대중들이 유익한 사람을 친구로 간주한다는 것인가? 다시 없이 행복한 사람(makarios)은 좋음을 가지고 있으니, 그러한 유익한 사람들은 전혀 필요로 하지 않을 것이다. 즐거움을 이유로 찾는 친구들도 전혀 필요하지 않거나 약간만 필요할 터인데 그의 삶은 즐겁고 그 어떤 외적인 즐거움도 필요로 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한 친구들을 필요로 하지 않으니 친구들을 필요로 하지 않아 보인다. (EN 9권 1169b22-28) [본문으로]
  13. EN 9권 9장, 1169b19-20 [본문으로]
  14. 삶은 본성상 좋은 것이고, 좋음을 지각하는 일은 그 자체 즐거운 것이니까. '그렇다면' 산다는 것은 선택되어야 할 것, 특히 누구보다도 좋은 사람들에 의해 선택되어야 할 것이다. 그들에게는 존재가 좋고 즐거우니까. 그들은 그 자체 좋은 것에 대한 지각을 공유하면서, '즉 서로의 존재를 지각하면서' 즐거워한다. 마치 유덕한 사람은 자기 자신에 대해 하듯이 그렇게 또 친구에 대해― 친구는 또 다른 자기 자신이니까― 그러하듯이 말이다. 따라서 각자에게 있어서 자신의 존재가 선택되어야 할 것이듯이 그렇게 친구의 존재도 선택되어야 한다. 혹은 거의 그렇게 선택되어야 한다. 존재는 자신이 좋은 사람임을 지각하기에 선택할 만한 것이었다. 그런데 그러한 지각은 그 자체 즐거운 것이다. 따라서 친구가 존재함을 함께 지각하는 일, '즉 서로가 존재함을 서로 알고 있는 일이' 필요한데 이것은 함께 삶과 서로 말과 생각을 나누는 일에서 성립한다. 인간에게 있어서 함께 산다는 것은 가축의 경우처럼 같은 공간에 배정받았다는 것이 아니라 이러한 것을, '즉 서로 말과 생각을 나누는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이니 말이다. 과연 신적으로 행복한 사람에게도 존재는 본성상 좋고 즐거운 것이라 그 자체 선택해야 할 것이며, 그 다음으로 친구의 존재가 선택해야 할 것이라면, 친구 또한 선택되어야 할 것 중의 하나일 것이다. 신적으로 행복한 사람에게 선택되어야 할 가치는 마땅히 그에게 귀속되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바로 이점에서 부족하게 될 것이다. 따라서 행복하게 될 사람은 유덕한 친구를 필요로 하게 될 것이다. (EN 9권 9장, 1170b1-19) [본문으로]
  15. 『순자』「부국」 [본문으로]
  16. 같은 책, 「영욕」 [본문으로]
  17. 같은 책, 「왕제」 [본문으로]
  18. 안네 마리 파이퍼 지음, 정영도 옮김, 『니체의 ‘짜라투스트라’에 대한 철학적 해석』, [5.종말인 : 삶의 형식으로서의 향락], 이문출판사, 1994, pp.90~95 참조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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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서양철학사를 수강하며 작성한 레포트를 정리한 것입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행복



 인간은 왜 사는가? 아리스토텔레스에 따르면 인간은 행복하기 위해 산다. 니코마코스 윤리학의 출발점인 동시에 전체를 끌어가는 핵심개념이 바로 행복이다. 아리스토텔레스에 따르면, 인간의 모든 의도된 행위는 어떤 목적을 지향하며, 이 목적이 성취되면 이 목적은 다시 더 높은 목적을 위한 수단이 돼 그 위의 목적에 이바지한다. 이렇게 목적과 수단의 지속적인 연쇄관계의 계단을 계속 밟아 올라가면, 더 이상 다른 것의 수단이 아니라 그 자체가 목적인 최종 목적지에 도달한다. 이것이 다름 아닌 인생의 가장 좋은 것(최고선)이자 궁극적인 목적인 행복eudaimonia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다음으로 행복에 대한 통념들을 검토한다. 첫 번째 견해는 행복은 쾌락 혹은 즐거움에서 성립한다는 견해이다. 그러나 이러한 삶이 짐승들에 알맞은 삶이라 욕망의 노예가 될 뿐인 삶이라고 평가한다. 두 번째, 사람들이 행복의 내용으로 생각하는 명예를 중심에 놓는 삶을 아리스토텔레스는 정치적 삶의 유형으로 분류한다. 그러나 아리스토텔레스는 이것 역시 피상적이기에 진정한 행복의 내용이 되기 어렵다고 평가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행복이 우리에게 고유한 것이며 쉽게 박탈될 수 있는 어떤 것이 아니어야 하는데 명예의 경우 명예를 받는 사람이 아니라 주는 사람이 더 결정적이기 때문이라는 지적을 한다. 그 다음 아리스토텔레스는 간단하게 언급하지만, 을 버는 삶을 언급하며 부는 그것 자체가 목적이 아니며 다른 어떤 목적을 위해서만 유용하다는 단순한 이유로 행복의 후보에서 배제된다.


 이런 통념적인 삶이 위에서 논증하듯 진정한 행복의 내용이 되기에 부족하다면, 진정한 행복이 되려면 갖추어야할 조건들은 무엇인가? 아리스토텔레스는 성취가능성, 완전성, 자족성을 논변한다.


1) 행복은 만약 그것이 인간이 추구하는 것이라면, 인간적 행위로 성취할 수 있거나 도달할 수 있는 것이어야 한다.

2) 행복은 항상 바로 자기 자신 때문에 선택될 뿐 자신 아닌 다른 것 때문에 선택되지는 않고 동시에 다른 모든 것들은 바로 이것을 위해 선택되는 단적으로 완전한 목적이다.

3) 행복은 그것만으로 삶을 선택할 만한 것으로 그리고 아무것도 부족함이 없게끔 만드는 자족적인 목적이다.


 행복을 최상의 좋음으로 정의한 후 이렇게 정의된 최상의 좋음으로부터 성취가능성, 완전성, 자족성까지 도출해 낸 후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의 기능으로부터 인간의 행복을 정의한다. 이것은 일반적으로 좋음이 수행해야 할 혹은 수행할 것으로 기대하는 기능에 비추어 정의된다는 사실로부터 도출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이 아니면 잘 할 수 없는 인간의 고유한 기능에서부터 인간의 행복을 정의하려 하는데, 그것은 다른 식물 동물과 구분하는, 이성이라는 인간 고유의 능력이다.


 인간의 기능이 이성과 일치하는 혹은 적어도 이성과 분리되지 않은 영혼의 활동이라는 것을 상정한다면 뛰어난 사람의 기능은 이것들을 잘 그리고 훌륭하게 행하는 것이어서 각각의 기능은 그것의 부류에 고유한 탁월성에 따라서 수행될 때 잘 수행되는 것이다. 이로써 인간의 좋음은 탁월함()에 따르는 영혼의 활동이라는 것이 밝혀진다.


 즉, 좋은 혹은 뛰어난 하프 연주자가 하프를 잘 연주하는 사람이듯이 훌륭한 인간도 인간의 고유한 기능인 이성적 삶을 잘 살아내는 사람이다. 인간 고유의 기능을 그 탁월성에 따라 영혼이 활동해 낼 때 인간은 자신의 고유한 좋음()에 이르는 것이며 행복하다는 것이다.


 인간 고유의 이성적 기능을 행복과 좋음()에 연결시킨 아리스토텔레스의 행복관은 자칫 인간 전체의 다른 기능을 배제할 우려의 여지가 존재한다고 생각한다. 영화 이퀼리브리엄(Equilibrium, 2002)에서 그려지고 있는 모든 감정이 통제되는 미래도시를 우리가 행복한 사회, 인간다운 사회라고 규정짓지 못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따라서 아리스토텔레스의 행복관을 프로크루스테스와 같은 태도로 받아들이는 것은 큰 문제가 있다.




 나는 인간의 고유한 기능과 탁월성에 따라 인간 고유한 좋음과 행복에 도달하는 아리스토텔레스의 행복관을 높게 평가한다. 그러나 나는 오히려 인간의 성적 충동과 소외를 가지고 행복의 내용을 즐겨 바라본다. 나는 인간이 이성으로 인해 분리되어있는 실재로서의 자기를 인식할 수 있기 때문에 불안감과 같은 소외를 느낀다고 보기 때문에 이성의 기능을 탁월하게 발휘하는 것만으로는 행복을 찾을 수 없다고 본다. 여기에서는 오히려 인간의 성적 행위가 이와 같은 불안감과 소외를 극복하고 행복해지는 길을 제시한다. 그것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화폐와도 같은 추상에 대한 에로스가 아니라, 구체적 개별에 대한 에로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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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서양철학사를 수강하며 플라톤 향연에 대해 작성한 발제문을 정리한 것입니다. 



Platon : SYMPOSIUM



 델포이의 아폴론 신전 현관 기둥에 새겨졌다는 너 자신을 알라라는 말로 우리에게 친숙히 다가오는 소크라테스는 평소 스스로 무지를 자처하며, 인간들 가운데 가장 지혜로운 자는 앎에 관한 한 자신은 아무것도 아님을 아는 자라는 철학을 펼쳐나간 인물이다. 그런 그가 향연에서 예외적으로 에로스에 관한 것 외에는 아무것도 모른다, 즉 에로스에 관해서는 안다고 피력한 바 있다(177d). 이것은 과연 모순된 발언일까? 나는 그렇지 않다고 본다.


 『향연에서 소크라테스와 디오티마의 논의를 보면, 에로스는 다른 것, 자신에게 없는 어떤 것과 관계를 맺는 가운데 존재하기 때문에 신이 될 수 없으므로 다이몬에 지나지 않으며, 그것은 인간과 신의 중간적 존재, 불멸과 필멸의 중간적 존재이자 중개자, 매개자의 입장을 취한다. 다른 한편으로 지혜를 추구하는 사람들은 지자도 아니고 무지한 자도 아닌 중간적 존재다. , 자기가 무지하다는 것을 자각하며, 지혜를 추구하고 사랑하는 사람인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예외적으로 에로스에 관해서는 안다고 말한 소크라테스는 결국 평소와 다름없이 자신이 무지하다고 말하고 있는 셈이 된다. 요컨대, 에로스로 표명되는 무지의 자각은 신이 아닌 인간이 완전한 지혜를 얻지 못하지만 끊임없이 추구할 수 있는 가능성을 지닌, 비극과 희극이 동시에 공존한다.


 『향연에서 아리스토파네스의 이야기 역시 이 비극과 희극은 동시에 공존한다. 그는 완전함을 상징하는 원의 형태를 띠고 있던 인간이 대단한 힘과 능력으로 신에게 대들었고, 그로 인해 인간이 신에 의해 반으로 나뉘어졌다고 말한다. 그리고 잃어버린 예전의 전체에 대한 욕망과 노력을 에로스라고 정의한다. 이는 인간이 현 상태는 완전하지 않는 비극적 요소를 지니고 있는 동시에 완전함에 대한 가능성을 제시한다는 희극적 요소(에로스) 역시 존재한다는 점에서 앞의 논의와 비슷한 측면을 지니고 있다. 나는 이러한 점이 소크라테스가 향연이 끝난 새벽에 아리스토파네스에게 희극을 쓸 줄 아는 것과 비극을 쓸 줄 아는 것이 동일한 사람에게 속할 수 있다는 것을 말한(223d) 까닭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소크라테스의 연설을 들은 다른 모든 이들이 그의 연설에 모두 동의하는 모습을 취했을 때 아리스토파네스가 그에 대해 반박하려 했듯이(212c), 둘 사이에는 큰 간극이 있다. 비록 둘 모두 에로스를 욕구로 정의하고 있지만, 아리스토파네스 연설 속에서 이 욕구는 완전함에 대한 회복으로 회귀적인 성격을 지닌 반면, 소크라테스의 연설 속에서는 지속적인 상승의 노력으로 분출한다.


 즉, 아리스토파네스에게 있어 인간 불완전의 결여가 잃어버린 자신의 반쪽이라면 소크라테스에게 있어서는 아름다움이며, 에로스는 그 자체로 아름다운 것을 수직적으로 추구하게 된다. 말하자면 아리스토파네스의 딸꾹질이 고통에서부터 딸꾹질 이전으로의 회복되는 과정을 그린다면, 소크라테스 연설은 자신이 지니지 못한 아름다움, 좋음으로 향하는 과정을 그린다.


 소크라테스는 아리스토파네스를 의식하여, 사랑하는 자는 자신과 같은 것을 찾는 자가 아니며, 자신의 손과 발이 자신에게 해로운 것이라 생각될 때 자신의 것일지라도 잘라내 버리려고 하듯이, 오직 좋음을 추구한다고 말한다(205d-206a). 그런데 아리스토파네스는 좋음과 같은 도덕적 문제들에 대한 언급이 없기에 이에 취약한 약점을 지닌다. 그에게 도덕성의 문제는 인간과 신과의 관계 회복이라는 종교 문제와 연관 짓는 것에서 끝나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소크라테스와 아리스토파네스 에로스에 관한 논의는 사실 성 자체보다 다양한 인간관계의 정신적 특징 혹은 사회의 기능으로 파악하는 데 중점을 두었다는 한계를 지니고 있다고 생각된다. 성해방운동가들이 성적인(sexual) 것과 생식적인(genital) 것을 분류하는 바를 따르자면, 이들은 성적인 것 자체의 중요성보다도 생식적인 부분을 많은 부분에서 언급한 것이다.


 그런 부분에서 가장 소란스럽게 향연에 등장하는 알키비아데스가 이들에 대해 언성을 높일 수 있는 여지가 있다. 실제로 그는 자신을 성적으로 상대하려 하지 않는 소크라테스에게 큰 불만을 토로하고 있다. 하나로부터 둘로 둘에서 다시 모든 아름다운 몸으로, 몸에서 영혼의 아름다움 등으로의 아름다움 자체에 도달하는 소크라테스의 에로스에서는 물론 하나 역시 소홀히 해서는 안 되지만 사랑과도 같이 정열적으로 그 하나에만 전념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이것은 사실 성을 연구하는 현대의 학자들에게는 매우 중요한 문제가 된다. 우리는 소크라테스와 같이 모두를 사랑하고, 모두에게 사랑받는 자에게 알키비아데스처럼 성적 수치심을 느끼기 때문이다. 그것은 자신의 남편이 모든 여자들에게 잘해주지를 않기를 바라는 것과 같다. 그리고 누구나 알키비아데스처럼 이성이 자신의 성적 매력에 이끌려 성 행위를 하기를 원하지, 소크라테스와 같은 사람은 자칫 자기에게 동정을 베푼다는 생각을 하기 쉽다.


 아리스토파네스와 소크라테스의 이야기가 비슷한 구조를 가지면서도 차이를 지녀 플라톤의 철학이 잘 표현된다고 말한다면, 알키비아데스의 이야기는 플라톤의 철학을 풍부하게 만드는 요소라 말할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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